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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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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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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아이들' 하면 불량기가 떠오른다.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 역시 "교화소"를 들락거리는 청소년들이 주인공이다. 소설 배경은 1920년대 독일의 대도시 베를린이다. 작가 에른스트 하프너는 나치당이 득세하는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열악한 사회 환경이 청소년들의 일탈을 부추겼다는 입장이다. 당시 수렁에 빠진 청소년들 대개가 사회적 피해자란 얘기다.  
   
작가는 총 20장 구성을 통해 "의형제 패거리들(단원들)"의 "밑바닥 생활"과 전문적 범죄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각 장의 제목으로 그들의 변화를 종적으로 좇으며 점차 두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다. 패거리로부터 벗어난 루트비히와 빌리가 어떻게 평범한 삶으로 복귀하고자 애쓰는지를 내면세계를 곁들인 객관적 문체로 전달한다. 마치 호소력을 갖춘 보고서 같다.   

그러니까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에는 몸소 겪은 바를 전하는 르포르타주 냄새가 진하다. 당시 보도 및 통계 자료를 통해서만 창작한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읽는 내내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파리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떠오를 만큼 상황이나 심리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 사실적인 게 불온해서일까? 출판물들은 1933년 나치에 의해 '책 화형식'에 던져지고, 작가는 1938년 나치에 소환된 직후 행방불명된다.  
   
어쨌거나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은 시대적 배경과 문화가 다른 지금 여기에서 읽어도 울림이 크다. 특히 위기 청소년들을 더욱 수렁으로 내모는 교도정책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마침 24일자 한겨레의 <'콩나물시루' 여전한 소년원, 열에 일곱이 "불면증"> 기사가 눈에 띈다. 소설에서는 "교화소"의 억압적 훈육방식이 인간적 존엄성과 개성을 짓밟아 청소년들의 반사적 저항을 불러일으킴을 지적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차축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몸이 대포에서 발사된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앞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것만을 느낀다. 가끔 그는 자갈이 튀어 그의 몸을 때릴 때면 둔중하고 고통스런 타격을 느끼지만, 그것은 진짜 고통이 아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물리적 자아, 시공간과 분리되었다. 그는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달려온 것인가? 한 시간인가? 네 시간인가?" (78~79쪽) 

다짜고짜 뺨을 때린 교도관을 치고 교화소를 탈출해 기차 밑 차축에서 하룻밤을 버티는 빌리의 무임승차 묘사가 생생하다. 그 다차원적 고통 속에서도 빌리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고립된 중에도 자기 운명을 결정하려 목숨을 건 거다. 하늘 아래 존재들 중 위아래가 따로 없다는 동서고금의 통찰이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토양이니 그렇다.
      
"자기들 취향에 맞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이루어지는 훈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 모든 욕구, 너는 이 밤을 견뎌내야만 그런 욕구를 성취할 수 있어. 그런데 밤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죽음이 한순간도 너의 목덜미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거야." (78~81쪽)   
 
주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도덕성의 꽃을 피울 수 있다. 작가는 당시 베를린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는 군상들, 즉 "모든 연령대의 청소년 패거리, 조직 범죄단의 조직원, 가장 밑바닥의 매춘 남녀, 부랑 노숙자, 남녀 거지들"을 훑으며 그들이 동료애와 온정에 목말라 함을 가리킨다. 
   
"빌리와 루트비히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사슬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루트비히는 빌리가 없다면 다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빌리 자신도 동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끝 모를 냉혹한 대도시 베를린을 혼자서는 이겨낼 수가 없다. 그들은 그 사실을 수많은 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중략…) 하지만 둘이라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러면 밤의 길이는 절반으로 줄고, 추위도 절반 정도는 매서움을 상실하고, 심한 배고픔도 맹렬하게 위장을 물어뜯지 않는다." (292~293쪽)  
  
인간의 존엄을 위해 어떻게든 함께하고자 하는 심리를 반영하는 교화정책은 전과자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시민의식과 동떨어진 게 아니다. "정직하게 번 돈"을 지향하며 "아직은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닌" 존재로 안간힘을 쓰는 빌리와 루트비히의 인생은 여론이 성숙할수록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관계 역학이 삶에 미치는 화학작용에 새삼 눈뜨며 음력 정월 초하룻날(구정)을 맞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newcritic21/34)에도 실립니다.


베를린 거리의 아이들

에른스트 하프너 (지은이), 김정근 (옮긴이), 가쎄(GASSE)(2019)


태그:#베를린 거리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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