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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잊혀짐의 서사

터키 엘라지 지진사태 현장 뒷 스케치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사건 현장에 가면 자꾸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초, 분 단위로 사건이 전개되는 여러 장면들을 한 컷, 한 컷의 사진처럼 손목시계 초침과 분침에 입력시키고 또 그 시각을 보면서 사건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무엇엔가 쫓기는 것 처럼,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생각지도 않은 시각에 어디선가 뭔가 불쑥 생각지도 않은 일이 더 터질 것 같은 초조함이 은연중에 내재한다.  

엘라지 시브리제 지진이 일어난 후 터키정부의 재난비상관리청(AFAD) 구조대는 현장에 한 시간 이십오 분만에 도착했다. 한 시간 이십오 분 동안 뭘했을까? 그 유난스런 과정을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재현해 본다. 

지진이 났다. '어, 지진이 났구나.' 인지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일 분 안팎이었을 것이다. '어, 이 지진 평소와는 다르다. 상태가 심각하구나.'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이다. 적어도 지진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정부관계자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십오 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 때부터 바빠졌을 것이다. 전화 보고를 올리고 전화 지시를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금요일 저녁시간. 엘라지 재난비상관리청장은 뭘 하고 있었을까? 대부분 다른 공무원들 처럼 퇴근한 후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차나 커피를 마시며 거실에 앉아 TV 채널을 돌려 재밌는 드라마나 쇼, 아니면 뉴스를 볼 시간. 아마 인기 방송인 'Güldür Güldür Show'나 'Payitaht "Abdülhamid" '을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짜피 주말 뉴스야 거기서 거기니까. 지진이 나고 재수없게 금요일 당직에 걸려서 군시렁되던 당직자에게서 일차 전화 보고를 받은 후 '야, 피해상황 더 정확히 파악해서 보고해'라고 지시를 내리고 잠시 더 TV에 눈길을 돌리는데 맘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정전사태가 된다. 이 쯤되면 더 이상 보고를 받지 않아도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갑자기 휴대폰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상부에서 전화가 와서 상황보고를 원하고 거기 둘러대는 동안 아까 당직자와 다른 직원들의 전화번호가 빨간색으로 휴대폰 화면에 뜬다. 맘이 급해진다. 서둘러 어둠 속의 아파트를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 와 차를 타고 집무실로 간다.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다. 운전하는 동안 전화로 소집령은 내렸다. 집무실 도착. 휴대폰 인터넷으로 속보를 확인한다. 건물 붕괴 장소는 벌써 파악되어져 상황판에 올려져있다. 소집 인원 확인과 동시에 출발 명령. 그 후 10여분 만에 현장도착 보고를 받는다. 그 때까지 걸린 시간이 한 시간 이십오 분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난 8년간 경험한 터키에 비취 볼 때 십중팔구 그랬을 것 같다. 터키 공무원직도 대한민국에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큼 철밥통이다. 그래서 경쟁율도 높고 공무원시험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한 번 들어가면 편안해진다. 주어진 부서에서 정해진 업무만 칼같은 출퇴근 시간내에 주 5일만 하면 월급은 꼬박꼬박 자동으로 은행계좌에 입금된다. 거기다가 매년 여름휴가는 법으로 보장되어져 있다. 주어진 업무를 의욕적으로 더 잘, 더 많이 한다고 해서 승진을 더 빨리 하는 것도, 보너스를 더 받는 것도 아닌지라 그저 주어진 일만 실수없이 하면 시간이 흐르고 때가 차 승진을 하고 봉급이 올라간다. 그렇게 20년만 버티면 그 때부터 정년퇴직 나이까지 언제든지 은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어 온 세금은 연금으로 돌아나온다.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터키에서 무난히 생활하기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제 아무리 재난비상관리처장이라고 한 들 그 직책도 다름없는 공무원직인지라 혹시나에 대비한 업무적인 열정이 있었으리라 상상하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십 년 후에 찾아 온 지진이 오늘밤 덮칠 것을 감지할 예지능력을 가졌을리도 없을 것이고.

참사 현장에 정부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시민들이 자원해서 생존자들을 찾고 사망자와 부상자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 지역 미디어 기자들은 카메라와 중계차를 동원해서 벌써 지진 참사 현장과 시민들의 자발적 구조작업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고 건 한 시간 반이 소요되어서야 도착하는 재난비상관리청 구조대의 도착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시쳇말로 '쪽 팔린' 모습이 터키 전역으로 생중개됐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온 정부 공식 성명: 현재 사망자 4명, 구조작업 계속. 전 터키의 눈이 엘라지 지진에 고정된 지는 벌써 두 시간 전. 그 아무도 정부의 공식 성명에 호들갑 떨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으로 지켜볼 뿐. 손 빠른 그래픽디자이너는 벌써 엘라지 지진 애도용 그래픽을 올렸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퍼나르고 해시태그가 뜨고 지진 상황을 찍은 사진과 비디오가 돌기 시작했다. 저 상황에서 저걸 찍을 정신이 있었을까? 의문은 가지만 또 한 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에 공유의 공유를 거듭했다. 

21세기 사건사고에서 특종은 거의 없다. 모든 사건사고의 '특종'은 이제 소셜미디어에서 나온다. 뉴스미디어도 정부도 가장 첫 보고는 소셜미디어에서 받는다. 언론과 정부의 뒷북 반응과 보도는 일상화, 정상화되어졌다. 터키도 예외는 아니다. 

지진발생 10분 후 터키 전 뉴스채널은 엘라지 뉴스로 도배를 했다. 지질학자, 지진전문가가 패널로 나와서 앵커와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았다. 중간 중간 정부관계자의 성명을 보도하고 다시 지진 대화로 넘어갔다. 화면은 둘 또는 셋으로 나뉘어서 지진현장 구조상황은 묵음이나 저음으로 생중계하고 있었고 스튜디오 토론은 옆 화면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 포멧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든 방송국들이 똑같았다. 다른 것이라곤 방송사 로고와 레이아웃 뿐. 

그 때 부터는 인내심과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 사상자 수는 계속 늘고 집을 잃은 피해자들은 근처 학교로 안내되고 인근 병원은 비상체제에 돌입. 뉴스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이제 슬슬 정부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늑장대응도 도마에 오르고 지난 10년간 정부가 아무런 지진 대책도 없이 안일하게 있었다는 사실도 거론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놓고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지는 않았다. 지난 2016년 쿠데타 시도 이 후 아주 잘 길 들여진 언론의 모습이라서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대놓고 비판적인, 공격적인 말을 꺼내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에둘러서 슬슬 모호하게 말했다. 

지진 발생 다섯 시간 후부터 지진 관련 뉴스들이 하나씩 둘씩 나왔다. 그 첫 스타트는 병원 뉴스. 엘라지 근방 일곱 지역의 병원들로 소위 부상자들이 1103명이 몰렸는데 그 중 382명만이 치료대상자였고 나머지는 공황발작증세 (panic attack). 공황발작은 심적인 안정을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치료법이 없다. 병원 의료진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인지라 각 병원은 어느새 북새통 시장바닥이 되어버렸다. 지역 병원 중 몇몇은 지진으로 인해 일부 붕괴가 일어난 곳으로 환자 수용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남아있는 다른 병원들의 환자 포화상태는 심각한 레벨에 처했고 이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은 '정신과용 응급실을 이참에 따로 만들어야겠다'는 말로 이 기가막힌 상황을 살짝 비꼬아서 표현했다. 이런 상황을 영어로 '트레지코메디 (tragicomedy)' 또는 희비극이라고도 하지만 감히 '코메디'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만큼 간 크게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은 지금 이 시간만큼은 없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공포 중 가장 큰 것이 자신이 서 있는 땅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한 공황발작이라면 수용하기엔 벅차지만 납득하기에는 충분한 현상이었다. 

재난 시 피부에 가장 밀접하게 와 닿는 고통은 단연 추위다. 지진으로 인해 엘라지 지역으로 들어오는 도시가스송유관이 파손되고 또 화재까지 일어났다. 화재의 원인이 송유관 파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그게 증명되기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 있는 한가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역으로 들어오는 가스는 일괄적으로 다 차단됐다. 최저 섭씨 영하 11도까지 내려가는 추위가 예보된 가운데 지진이 나자 엉겁결에 입고 있던 옷만 걸치고 튀쳐 나온 상황에서 밤을 지새야하는 사정은 그 옷자락을 잡아 여미는 두 손의 장본인이 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지진 발생 두 시간이 채 못되어 각각 8시간 12시간 떨어진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서 시장 특별지시로 엘라지에 긴급히 구호차량 두 대를 보냈다는 뉴스가 떴다. 한 트럭 당 약 만 칠천여명에게 몇 주간 식사제공을 할 수 있는 정비시설이 되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트럭들도 다음날 아침 경에나 들어 올 예정이었다.

터키에서 사건현장에 가게 되면 기자증을 가지고 있어도 곤란하고 가지고 있지 않아도 곤란하다. 기자증을 가지고 있으면 취재현장을 관할하는 경찰서에 가서 보고를 해야하고 또 취재활동에 대한 감시를 공공연히 받는다. 터키중앙정부에서도 기자증을 가진 기자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취재를 해서 보도하는 지 항상 주의깊게 보고 있다. 터키정부에서 지급하는 노란 기자증을 가지지 않고 취재를 하는 경우 그런 귀찮은 눈은 따라붙지 않지만 취재자체는 녹록하지 않다. 국민의 알 권리는 문서적으로는 보장하지만 그 권리가 실질적으로 행사되기에는 어려운 나라가 터키다. 하지만 기자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건의 진실이나 내막에 좀 더 가까기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일단 기자라는 간판이 없기 때문에 인터뷰를 그냥 같이 담배를 피면서 지나가는 대화하듯 할 수 있게 되고 그 대화에서 생각지도 못 한 내용을 건질 수 있게 된다. 상대가 전혀 부담갖지 않고 술술 자기 생각과 아는 바를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속임수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 사람을 인용해야 할 경우 기자증을 가졌든 아니든 실명과 직책을 기사에 넣어야 할 경우 그리고 녹취를 할 경우 동의를 얻어야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익명을 요구하기에 그리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터키에서 취재를 하는 대부분의 프리랜서 기자들은 '기자'라는 직함대신 '작가'라는 직함을 이용한다. 엄격히 말해서 '기자 (journalist)'의 일은 큰 틀에서 볼 때 '작가 (writer)'라는 일에 포함되는 것 아닌가? 또 프리랜서라는 일의 성격 상 어느 언론사에 소속이 정식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그 지위의 모호성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중에 굳이 문제가 될 경우 기사를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엘라지 지진 현장에도 '작가'로 가 있었다. 단지 이 상황에 대해 무슨 글이던 쓰려면 그 현장을 목격하지 않고서는 써서는 안된다는 그 일념에. 기사가 아니라 논픽션 에세이를 쓴다고 해도 현장취재가 따르지 않은 글은 상상력에 따른 소설이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사건사고 현장에 외국인의 모습으로 가 있으면 날 바라보는 시선이 항상 고운 것 만은 아니다. 터키처럼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나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상황에 외국인이 보일 경우 종종 배격적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마치 자신들의 불행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와서 보는 것처럼 불쾌감을 느낀다. 그럴 때 받는 질문의 첫 포문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열린다. '너 지금 여기 왜 있니?' 그리고 그 질문은 바로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니?'로 넘어간다. 이 두 질문이 그냥 현장에 있는 민간인에게서 나온다면 그리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현장에 출동해 있던 경찰관이나 정부관계자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다. 이럴 때 취재니 글이니 하는 말을 절대 하면 안된다. 바로 자세를 바꾸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같은 여행객이 여행을 하던 도중 불행히도 재수 없이 이런 상황을 뜻하지 않게 맞닥뜨려 갈 곳을 찾고 있는 행세를 해야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중인데요. 길도 잃고. 여기 근처 어디 하룻밤 묶을 수 있는 호텔 없을까요?' 그 말을 영어로 하면 십중팔구 상대는 영어를 잘 못하기에 그 상황을 피하려고 귀찮은 듯이 바로 돌아서서 간다. 어쩔때는 자신이 영어를 좀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되는데 그 때는 과잉 친절과 관심이 돌아온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친절이 아니라 자기 주변을 의식한 과시용 친절이다. 그런 상황에 걸리면 꼼짝없이 잡혀서 호텔까지 바래다줌을 당하는 호강을 누리게(?) 된다. 

다행히 지진 사태는 국가안보나 정치적 사건과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래도 그런 까다로운 마주침은 없었다. 다들 너무나도 짧은 시간안에 급박한 상황을 겪은 직후라서 외국인 한 명이 곁에 있다고 한들 거기 신경을 쓸 겨를도 경황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인간 대 또 다른 인간으로 여권과 신분증으로 구분되는 인위적 차별을 넘어 인간의 모든 능력과 이해를 압도하는 숨막히는 자연의 괴력 앞에서 같이 무기력과 초라함의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내 옆에 서있던 소박한 옷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앞의 붕괴된 빌딩을 바라보며 그렇게 읊조리듯 묻는다.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이 자연의 무지막지한, 잔혹한 몸부림이. 나는 감히 대답할 엄두도 못내고 같이 앞만 묵묵히 응시했다. 다시 한 번 그 남자의 입에서 물음이 터져나왔다.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 질문에도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답을 못한 이유가 달랐다. 

완벽하지는 못했겠지만 저 지진의 예봉을 피할 수는 있었을 것 같았다. 십 년 전 이곳에서 마흔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진 후 오늘까지 터키정부는 무엇을 했을까? 그 십 년 동안 지진공법에 의거해 건축물을 재정비했을까? 좀 더 효율적이고 신속한 비상대비책을 마련했을까? 지역주민들에게 지진에 대비한 상황교육을 시켰을까? 그렇게 했어도 오늘과 같은 참사를 면치못했을까? 오늘 이 참사의 진정한 이유는 과연 자연일까 아님 인간일까? 꼬리에 꼬리를 이어 질문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면서 다시 들여다 본 내 손목시계. 시계 바늘은 새벽 다섯 시 삼십 칠 분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구조작업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나와 내 통역인은 디야르바크에서 타고 온 2015년 형 빛바랜 은회색 현대 i20로 돌아 와 각기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좌석을 뒤로 젖히고 잠시 눈을 붙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창을 통해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에 못이겨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시간을 보니 아침 여덟 시 이십삼 분. 핸드폰을 통해 뉴스를 보니 사망자와 부상자 수가 또 바뀌어져 있었다. 사망자 22명. 붕괴된 건물들 아래 추정되는 생존자는 30여명. 지난 밤 터키 에너지 천연자원 장관 파티 됸메즈가 "정부로부터 모든 것을 바래서는 안된다"고 말 한 것이 뉴스로 뜨고 터키대통령 레제프 타입 에르도안이 엘라지에 온다는 뉴스도 떴다. 기온은 섭씨 영하 4도. 영하 11도 보다는 좀 나을까?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픈 맘이 문득 들었지만 근처 학교에서 온 밤을 추위에 떨며 지냈을 피해자들 생각에 그 죄책감이 문명의 이기를 무의식적으로 탐하는 내 사소한 욕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대통령이 온다면 이 작은 도시가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부산해 질 것 같다는 생각에 그리고 더 이상 여기서 취재할 것도 없다고 판단이 들어 통역인은 조수석에서 더 자라고 말하고 내가 직접 운전해서 디야르바크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언제 지진이 일어났냐는 듯 맑고 화창한 겨울 풍경으로 조용히 덮여져있었다. 

앙카라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와 여장을 풀고 나니 거의 오후 네 시가 다 되어갔다. 뉴스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엘라지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하자 마자 간 곳은 어젯밤 지진으로 사망한 이들의 장례식이 치뤄지는 사원. 역시 천재적인 정치적 감각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병원도 아니고 구조현장도 아니고 임시대피소도 아니고 장례식장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국가의 위기대처 매뉴얼이 자꾸 도마에 오르면서 내려가는 정부 신뢰도와 불안정으로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달러 환율을 월요일 증시가 열리기 전에 장례식에서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제자리에 다독이는 한 수였다. 뉴스 생중계로 대통령의 장례식장 참여 모습이 나가면서 엘라지를 제외한 터키 전역의 국민들은 엘라지 사태에 대한 격한 감정적 표현을 알아서 한 풀 꺽을 것이다. 

노련한 정치인들은 죽음의 상징과 의미를 정치적 이미지 도구로 교묘히 이용하는 방법을 마스터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국가적 비극이 발생했을 때 그 비극적 서사의 발단과 전개, 위기와 클라이막스, 완화와 결말의 포인트를 능숙능란한 작가처럼 꽤뚫고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서사의 클라이막스에서 죽음의 상징과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단번에 결말지어버린다.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반지와 함께 용암 속으로 떨어져 사라질 때, 왕좌의 게임에서 대네리스 타케리언이 존 스노우의 손에 암살될 때,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이 숨을 거둘 때 그랬던 것 처럼, 이들도 결정적 순간에 죽음의 상징을 통해 한 비극적 참사의 서사에 정점을 찍고 결말을 향한 안티클라이막스 내림길로 국민들의 정서를 밀어낸다. 이들에게 진정한 결말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정점을 찍은 서사의 흐름이 클라이막스 이 후 어떤 결론으로 얼마동안 전개가 되던 지 내리막길에 들어 선 이상 그들의 이미지에는 더 이상 어떤 큰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볼 때 다가 올 결말도 그들의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 에르도안 대통령의 엘라지 사원 장례식 참석 이 후로 터키국민들 사이에서 엘라지 지진 뉴스는 더 이상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 할 것이다. 터키 주요 뉴스매체들도 본능적으로 보도의 무게를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다른 주요 뉴스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분 매초 새롭게 올라오는 다른 뉴스들에 비극의 감정은 점차 희석되어져 갈 것이다. 

소셜미디어도 비극의 서사에서 감동의 서사로 옮겨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 방문 전까지만해도 지진사태와 애도의 메세지로 가득 찾었던 포스트들이 점점 감동과 희망의 메세지로 대체되고 있다. 염소를 구해내는 구조대원, 위기의 순간에 수십명의 생존자를 구해낸 구조대원 팀, 구조팀과 함께 파견된 구조견들의 활약 (하지만 현재 터키 소셜미디어에 돌고 있는 구조견의 사진은 2019년 알바니아 지진 구조활동에서 활약했던 구조견의 사진), 극적으로 구조된 생존자 (히잡을 두른 할머니의 사진이 엘라지 지진 생존자의 사진처럼 공유되고 있지만 이 전에는 이라크, 시리아, 예멘 내전 당시에도 각국에서 피해자로 벌써 공유된 사진, 사진의 진위나 출처를 알 수 없다)의 서사로 찬사와 감탄이 벌써부터 소셜미디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다시 먹방 포스트, 여행 포스트, 파티 포스트, 셀카 포스트가 밀고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엘라지 포스트는 서서히 밀려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계를 본다. 2020년 1월 25일 저녁 아홉 시 십오 분. 엘라지 지진 업데이트: 첫 지진 발생 후 462개의 여진 발생. 총 29명 사망. 생존자 44명 구출. 붕괴된 건물 속 22명 아직 생존 추정.  1466명 병원에서 치료 중. 총 317대의 구급차 환자 후송에 운용. 3699명의 구조대원, 544대의 구조차량, 17마리의 구조견 현장투입. 재난비상관리청 AFAD, 144개 열적외선센서, 6065개의 가족용 텐트, 400개의 일반목적 텐트, 11532개 간이침대, 15875개 담요 투입. 터키적신월사, 275명 자원봉사자, 55대 차량, 2500개 텐트, 7대의 취사 차량, 4대의 요리차량, 2개의 야외부억장비세트, 15875개 담요, 5079 간이침대, 1563개 난방기, 193420 킬로 상당의 밀가루, 3200개의 음식 소포 투여. 72개 건물 완전 붕괴. 514개 건물 심각한 구조 손상. 409개 건물 경미한 구조 손상. 368명의 정부파견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뤄진 184개의 팀이 엘라지 지진 지역 조사 중. 전기, 수도, 가스 서비스 원상복귀. 

메세지는 분명하다. 터키정부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 지원하고 있다. 더 이상 걱정하지 마라. 

장례식과 물량공세. 비극적 서사의 결말과 감동 스토리텔링으로의 관점변화. 노련한 정치행보와 수려한 정치적 서술. 감정적 반응을 노린 가짜 뉴스와 사진의 공유. 

엘라지 지진사태의 서사는 그렇게 잊혀짐의 결말로 지금 이 시간 치닿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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