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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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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언론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봐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너희가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한때 언론이 종교적 권위를 가진 시대가 있었다. 새벽 기도, 저녁 예배와 비슷한 시간에 조간신문과 석간신문이 발행되던 시절. 사람들은 스스로의 체험 범위를 넘어선, 마을 밖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뉴스'라는 형식으로 섭취하며 그 뉴스들로 비직관적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퍼즐 맞추듯.

'한 달에 한번 신문을 내겠습니다. 만약 뉴스거리가 생기면 더 자주 내겠습니다.' 미국 최초로 신문을 발행한 벤자민 해리스의 말처럼 단순한 풍문을 모아 전달하던 신문이, '객관성, 중립성, 공정성' 같은 보도 원칙을 정하고 뉴스를 단순히 모으는 게 아니라 뉴스를 만들어내는 데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언론은 선악을 의제화하고 영웅과 악마를 만들어내며 사람들에게 삶의 기반을 판단하는 지침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신적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 위에 올라선 것이다. 

저널리즘의 토양

그러나 소위 '뉴스가 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말이 뉴스라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뉴스는 어떻게 객관성 중립성 공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저널리즘은 그것이 서 있는 토양 바로 그 위에서 위협받는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던져지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세상에 흘러넘치는 사건들 중 하나를 뉴스로 선택하는가?

이 같은 질문은 워낙 근원적이어서 '뉴스란 사건의 보고일 뿐이다' 같은 궁색한 말로 비껴갈 수 없다. 무릇 모든 '보고'에는 보고자가 있기 마련이며, 모든 사건은 보고자에 의해 선택-배제되고, 확대-축소되기 때문이다. 화가에 의해 화폭에 담기는 풍경처럼 풍속처럼, 어떤 인물은 등장하고 어떤 인물은 배제되며,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크고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작다. 초점이 달라지면 사건의 방향이 바뀐다. 보고자, 관찰자, 기록자의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뉴스 보도는 주관적이며 편향적이고 가치 지향적이라는 말도 성립한다. 보고는 보고자의 '진술'이며 '발언'인 것이다. 그렇기에 보고자의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보고자의 책임, 이것이 저널리즘이 선 토양인 것이다. '뉴스화 한다'는 것은 하나의 행위다. 그것도 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드는 창조적 행위이며, 그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의 태도를 형성하는 아주 사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맥 짚기
 
"나는 지하방에 살았다. 스케치북만한 크기의 조그만 창이 있는 방. 볕이 거의 들지 않았기에, 잠에서 깨면 아침인지 밤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2년 후 옥탑방으로 이사를 갔다. 창고를 개조한 방이었는데 소나기라도 내리면 누군가가 기관단총으로 지붕을 갈기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났다. 겨울에는 변기가 얼어서 뜨거운 물로 녹이기도 했다. ... 몇 년 후 취직을 했고, 옥탑방에서 전세방을 거쳐, 아파트를 샀다. 그런데 지금 힌국의 청년들은 그런 믿음, 즉 "점차 내 인생은 좋아질 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있을까?"

- KBS 스페셜 <지옥고, 청년의 방> 남진현 PD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아졌다. 박씨네 쪽방이 아닌 주변 다른 쪽방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100m 떨어진 공용시설에서 세수, 샤워 등을 해결하고, 요의를 느낄 때면 공원 화장실로 뛰어가야 하는 기본권의 사각지대. ... 박씨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통증 때문에 대화 내내 어깨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 한 달 사이 방세가 22만 원에서 25만원으로 3만 원 올랐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고작 3만 원일 수 있지만 쪽방 주인에겐 10% 이상 급격한 인상률이다. ... '집주인은 누군데요? 어떤 사람이에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박씨는 대답한다.) '사실 이 골목에 있는 쪽방 건물은 모두 우리 집주인 거예요. 그 집 가족들은 돈을 모아 근처 역세권에 빌딩도 하나 세웠다니까요.' "

- 한국일보 <쪽방 주민들의 가난을 먹고 삽니다> 이혜미 기자
 
보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단'이다.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에 대한 진단, 세상에 대한 진단. 그래야 그가 속한 공동체의 다양한 담화에 대한 맥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부동산은 어떤가. 평 당 1억에 달하는 가격, 소득수준이 뒷받침할 수 없는 상승폭, 지방-수도권-강북-강남으로 카스트화된 분열, 1500조에 달하는 가게부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질 줄 모르고 위로 솟구치려고만 하는 욕망의 불길.

위의 두 글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맥을 짚고 있다. 거대한 쪽방촌으로 변해 버린 대한민국의 주거 현실, 무섭게 올라가는 월세 전세에 이리저리 쫓기는 쪽방촌 사람들 같은 신세가 돼버린 젊은 무주택자들의 고통과, 그들의 절망 위에 서서 집값을 올리며 배를 채우는 수십 채의 집을 가진 집주인이 벌이고 있는 싸움, 좌절과 탐욕으로 대비되는 무정한 양극화의 논리, 질병의 근원에 정확히 메스를 대고 있다.
 
지난 2018년 11월 14일 ‘고시원 참사 규탄 및 대안 마련 요구 기자회견’이 사망자 7명, 부상자 10여명이 발생한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앞에서 열렸다.
▲ 고시원 참사 현장 "지옥고 폐쇄하라" 지난 2018년 11월 14일 ‘고시원 참사 규탄 및 대안 마련 요구 기자회견’이 사망자 7명, 부상자 10여명이 발생한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앞에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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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누구인가

뉴스는 인용, 다시 말해 인터뷰로 말한다. 정부의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언론에 등장하는 A씨,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세금폭탄을 맞게 되었다는 A씨, 늦어지는 재건축에 불만을 쏟아놓는 A씨, 자녀 교육 때문에 자기 집을 세놓고 강남으로 전세를 얻어 가려 했는데 대출이 막혔다고 부글부글 끓는 A씨, 심지어 뒤늦게 부동산 시장에 참여해 정부의 강한 규제 의지에 분통이 터졌다는 A씨. 끊임없이 A씨가 당하는 피해를 의제화하는 어떤 언론들, 어김없이 등장하는 강남의 부동산중개업자의 말, 모 대학의 부동산학과 교수의 말, 편향된 정보원들.

왜 없는가. 주택소유자이면서도 집값 폭등에 반대하는 건실한 시민들의 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지방 사람들의 말, 월급의 대부분을 집값에 바쳐야 하는 무주택자들의 말, 꿈을 잃고 탄식을 양식으로 삼는 낮은 위치에 선 사람들의 말들. 끌어올려지지 않는 목소리, 실종된 목소리는 상을 왜곡한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전체 모습을 일그러뜨린다.

공정함을 잃은 언론이 내보내는 인터뷰와 뉴스의 결과는 분명하다. 힘의 원리에 의해 언제나 강자가 승리한다. 약육강식이 판치는 시장, 야수와 같은 세상에 언론이 힘을 보탠다. 아무런 교정 작용도 하지 않는다.

부동산 정치, 이익 정치 그리고 언론의 비판

뉴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런데 사실은 늘 맥락을 지니는 법. 맥락 없는 사건은 없고, 맥락 없는 발언도 없기 때문이다. 이익과 이익이 충돌하는 이익 정치, 그래서 이념과 진영의 싸움이 돼버린 부동산 정치에서 뉴스는 이야기의 흐름을 절단하고 특정 맥락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최근 김현미 국토부장관의 발언 논란을 두고 나온 보도들이 대표적이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김현미 장관이 주민에게 '동네물 나빠졌네'라고 말했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불출마 선언' 중 울던 김현미 "동네 물 나빠졌네" 발언 논란>, <세 번이나 믿고 뽑아준 지역구 주민에 막말한 김현미... "동네 물 나빠졌네">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은 의도적으로 절단되거나 축소된 듯하다. 일부 주민이 장관에게 접근해 따라다니면서 '장관 때문에(장관의 부동산 정책 때문에) 일산이(동네가) 망가졌다고' 주장한 앞뒤 상황은 상대적으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또, 많은 언론이 장관의 말을 실수로 규정하며 단죄하지만, 무엇이 잘못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비판의 지점조차 모호한 것이다. '예의 없음'이 문제인가, 아니면 주민 말대로 일산의 부동산 경기를 망가뜨린 게 문제인가? 그렇다면 국토부장관으로서 자기 지역구 주민만을 위해 3기 신도시가 됐든, 광역 교통망이 됐든, 어떤 아파트 공급 정책도 펼치지 말았어야 옳았다는 것인가? 주민들의 요구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맞다는 것일까? 언론은 이를 따져보지 않았다.

부동산 이익을 쫓는 사람을 피해자로 포지셔닝 하고, 그의 말을 무기 삼아 정부의 정책을 희화화 할 때, 대중에 영합하는 언론, 대중의 욕망을 쫓는 정치가 탄생한다. 파시즘이 대중의 권력에 대한 욕구, 지배에 대한 욕구와 결합할 때 비로소 성립했다는 것을, 권력 비판을 사명으로 삼는 언론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권력 비판을 정부 비판으로 혹은 정치인 비판으로 한정해, 더 매서워야 할 대중 욕구 비판, 경제 권력 비판에 입을 다문다.

다음으로 언론의 먹잇감이 된 것은 강기정 정무수석이었다. 강 수석은 최근 '부동산 매매 허가제'를 거론해 논란에 휘말렸다. 그가 '부동산 매매 허가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투기 세력에게 부동산 매매 허가제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부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언론의 표적이 됐다.  

그래도 이 발언에 대한 비판의 방향은 분명한 편이었다. 언론은 발언의 내용과 발언의 주체를 모두 문제 삼았다. '매매 허가제라니 사회주의적 정책 아니냐'는 것은 발언 내용에 대한 비판이었고, '왜 전문가도 아닌 정무수석이 나서 경제 문제에 대해 발언하느냐'는 건 발언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언론의 이런 비판은 온당한가? 적어도 맥락 면에서 볼 때 언론의 그 같은 비판은 마땅하면서도 마땅하지 않은 비판이었다. '투기 세력에 대한 경고'라는 발언의 맥락은 지우고, 발언의 강도만 문제 삼아 그 내용을 악마화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강 정무수석을 둘러싼 논란을 진화하려고 나선 김상조 청와대 정와대 정책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강남의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이 정부의 1차적 목표"라고. 이 또한 부동산 정책과 관련한 발언인 만큼, 여러 논의나 보도가 나올 수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강 정무수석과 김 정책실장의 발언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정책실장이 소위 '전문가'이고, 톤 다운된 발언을 내놓았다지만, 의아한 지점이다.

투기 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파트값 폭등은 풍선 효과를 따라 강북을 지나 수원 용인 성남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정책을 비웃듯, 언론의 물타기에 부응하겠다는 듯. 누가 이익을 보았고 어떤 진영이 정치적 공격을 가했는지, 부동산 정치를 조금만 살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결과다.

땅으로 내려온 언론

뉴스의 유통 양식이 바뀐 지도 벌써 20여 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포털에 뉴스가 통합되고 모바일로 뉴스가 검색되는 순간 언론은 신적 권위를 잃고 땅으로 내려 왔다.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유사 언론과 싸우면서 속도로 경쟁하고, 거짓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순수'의 종말 시대다. 정보원은 오염되기 십상인데, 빅데이터 시대에 정보량은 흘러넘친다. 기업화된 언론사 내부의 압력도 적지 않고 여러 언론으로 분산된 인적 자원 또한 충분치 않다. 위기의 시대, 언론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정부 기업 연구소 따위에 속한 취재원이 넘겨 준 정보를 받아먹기만 하는 길, 다른 기사를 베껴쓰고 사건을 증폭시키고 무의식적으로 특정 프레임을 따라가기만 하는 길, 클릭 수에 연연해 진영화된 독자-시청자에 굴복하는 길, 일부 의사단체나 특정 스피커의 목소리를 무분별하게 과장하는 길, '얘는 이렇게 말했고 쟤는 저렇게 말했어' 하며 수군수군 대는 싸움 구경을 요란하게 중계하는 길, 질투, 혐오감을 부추기며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는 길, 편하지만 왜곡된 길, 기만의 길, 하나의 풍문으로 스스로 전락하는 길, 이런 길들을 피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들을 수행하고 있을까.

아직은 신뢰라는 브랜드로 자기 영역을 지키고 있는 언론, 그들이 그린 지도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 우리 공동체가 아직은 언론을 미로 같은 세상을 헤쳐 나갈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믿기에. 그렇다면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부동산에 대해서만큼은 한목소리로, '많이 묵었다 아니가, 이제 고마 해라'라고.

태그:#부동산정치, #언론, #김현미, #강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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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이란 학생 김민혁군과 김민혁군의 아버지 난민 인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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