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9 07:57최종 업데이트 20.05.2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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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가 벌어졌던 남일당이 있던 자리 뒷편으로 고층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권은비

 
신용산역에서 내려서 2번 출구로 나선다. 나서자마자 뒤편으로 마치 하얀 트로피처럼 빛나는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 보인다.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건물이다. 하얀 실을 엮어 직조한 듯 한 정교한 외형, 그 속에 수백 개의 조명등들은 대낮인데도 별처럼 빛난다.

이 건물에 들어서면서 나의 털모자 위에 가득한 보푸라기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건축은 때론 사람을 스스로 구별하게 만든다.


건너편으로는 어느 대기업의 사옥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뛴다. 자세히 보니 아파트다. 대기업 사옥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아파트. 그렇다. 아파트로 불로소득을 얻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어쩌면 기업이겠다.

언제부턴가 늘어난 거인들

이 아파트 앞에는 무려 7m 높이의 사람 조형물이 서 있다.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하얗게 도장된 스테인리스의 조각들이 연결되어 거대한 사람을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팔을 활짝 펴고 있는 형상이다.

서울 시내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이미 비슷한 조형물을 다른 곳에서도 봤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도심에는 이러한 '거인' 조형물이 곳곳에 서 있다. 안 그래도 도심에는 사람이 가득한데, 도심 속 건물 앞에 서 있는 조형물도 사람이다.

전 세계 메트로폴리탄 중에 서울만큼 사람 형상의 조형물이 많은 곳도 없을 것이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인' 조형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걸리버가 서울에 오면 기뻐할까?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중시하고, 사람을 제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라서 그런 것일까?

용산에는 철근과 유리로 지은 마천루들이 가득하다. 20세기 초등학생들이 그린 미래 사회의 모습이 21세기 용산에 현실화가 되었다. 불과 10년 사이의 변화다. 건물 앞에 서 있는 조형물도 이러한 건물의 모습을 닮아간다. 크고, 높고, 반짝이며, 매끈하다.

이제는 더 이상 여성의 배에 하트가 조각된 청동조형물이나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조각한 석재조형물 따위는 현대 건물 앞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도시 속 조형물들은 오래전 회화작품들이 그러했듯이 벗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자식을 돌보는 여성을 당연시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매끈한 동네

거인 조형물을 바라보다가 다시 목적지로 향한다. 직진하면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220-1번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 곳이 오늘의 목적지다. 구 남일당 건물로 불렸던 곳. 그 날, 아침 뉴스에서 보았던 불타는 망루가 있던 곳. 망루에서 솟구친 검은 연기가 용산의 새하얀 아침을 뒤덮었던 곳.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여기 사람 있다!"라고 외쳤던 곳. 2009년의 용산은 이제 이곳에 없다.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먼지 한톨도 이곳에 없다. 이곳에는 오로지 크고 높고 반짝이며 매끈한 용산만이 존재한다.

남일당이 있던 자리, 공사가람막 앞에서 가만히 서 있어 본다. 인도 위의 사람들은 어딘가로 분주하고 걸어가고, 차들은 끊임없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도로 위를 달린다.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행인들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여기에 누구 하나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없다.

맞은 편 건물, 역시 매끈하게 지어진 고층 건물 유리창에 '성형' '피부'라는 간판이 보인다. 크고 높고 반짝이며 매끈한 피부. 그것이 지금 용산의 피부이다. 순간 꽈-앙! 공사현장에 철근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이제 손에 쥐고 있던 국화꽃을 공사장 한구석에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처럼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분주한 이 세계의 속도에 억지로 리듬을 맞춰본다.

2009년 1월 20일 이후, 이 매끄럽고 반짝이는 세계는 변한 것이 없다. 그날을 기억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패배감을 떨쳐버리려 했는데, 역시나 실패했다. 
 

용산의 피부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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