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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린장벽 앞에서
▲ 1기 이신영 베른린장벽 앞에서
ⓒ 꿈틀리인생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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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6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내렸다. 이곳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덴마크에 대해 아는 것은 우유와 요구르트밖에 없었던 게 2년 전이었다.
 
꿈틀리 인생학교를 졸업한 후 덴마크행을 선택하며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꿈틀리 인생학교에 입학하다
 
2016년 17살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입학했을 때 난 인생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내 미래가 공부, 시험, 대학, 취업, 그리고 결혼이라는 공식으로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길을 간다고 해서 그 길이 나에게도 좋은 길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모님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눈 끝에 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강화도에 있는 꿈틀리 인생학교에 가게 되었다. '옆을 보는 자유'라는 모토를 가진 이 학교가 맘에 들었다. 꿈틀리는 일반적인 고등학교와 다른 점이 많았다.
 
먼저 나이와 상관없이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모두 이름 대신 별명을 불렀다. 전국에서 모인 16살에서 18살까지 나이가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또 우리가 공부라고 하면 떠올리는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교과목이 시간표에 없었다. 대신 농사, 토론, 요리, 청소, 빨래, 민주시민교육 등과 같이 삶에 필요한 수업을 했다. 수업을 평가하는 시험도 없었다. 매일매일 친구들과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놀았다. 비가 오면 밖으로 나가서 물싸움을 했고, 해질녘이 되면 강화도의 논두렁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밥맛은 항상 꿀맛이었고 밤마다 수다를 떠느라 취침 시간을 놓쳐 혼이 나기도 했다.
  
2학기 때는 덴마크에서 안드레아라는 친구가 왔다. 원래 나는 영어 포기자였다. 그래서 초반에 그 아이와 대화를 하는 게 부끄럽고 어려웠었다. 하지만 안드레아와 같이 축구도 하고 밤에 몰래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놀다 보니 점점 영어가 편해지게 되었다. 대화가 편해지며 안드레아와 많은 대화를 나눴고 자연스럽게 안드레아가 온 덴마크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2학기의 막바지인 졸업이 다가오자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꿈틀리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잘 웃었고 솔직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으며 도시보다 자연을 좋아했다.

이제는 꿈틀리 밖에서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가?'를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거나 대학교에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가장 행복했던 꿈틀리 교육의 본고장인 덴마크에 가고 싶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덴마크에 가면 답이 나올 거 같았다. 그 말씀을 선생님께 드리니 필요한 책들을 추천해 주셨다. 계획을 짜는 것도 도와주고 나를 응원해줬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가?

한여름 밤의 꿈같던 1년여의 세월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다. 18살 꿈틀리를 졸업한 후 나는 꿈틀리 에프터스콜레의 윗 단계라 할 수 있는 덴마크에 있는 호이스콜레를 가기로 했다. 호이스콜레는 20세 이상부터 입학이 가능했기에 나에겐 1년이라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선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아무 계획 없이 산책을 자주 나갔고 남들이 출근하고 학교 갈 아침에 목적지 없는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러다 맘에 드는 카페가 나오면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한나절을 보냈다. 외롭기도 했지만 그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내가 쓸 돈을 내가 벌다 보니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렇게 나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꿈틀리 친구들 집을 여행할 비용과 덴마크 1년 용돈, 덴마크행 편도 비행깃값을 벌었다.
  
바닷가에서 발리볼 심판 보는 중
 바닷가에서 발리볼 심판 보는 중
ⓒ 꿈틀리인생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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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덴마크 자유학교인 오더 호이스콜레(Odder højskole)를 가기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코펜하겐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1만 2천여 명이 사는 시골마을 '오더'로 갔다. 이 학교는 학생 비율이 덴마크 학생이 90명, 인터내셔널 학생수가 25~30명 정도라 수업 대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진다. 학비가 기숙사, 식비를 포함해도 굉장히 저렴해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다.

한 학기에 100여 명의 학생이 6개월 동안 같이 생활하는 시스템이었고 나는 두 학기를 다니며 1년 동안 머물렀다. 이곳은 대학진학 전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고 예술과 체력단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진로를 고민하는 곳이다.
  
두 번의 학기 동안 내가 선택한 주요 과목은 각각 '아트'와 '패션 디자인'이었다. 도자기, 사진, 스포츠 등 다양한 서브 과목도 들었다. 모두 재밌었지만 그중 댄스 선생님인 헬레나와 함께 춤을 추는 걸 가장 좋아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춤을 췄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 했던 나를 잊고 억눌렀던 흥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학부모들 앞에서 댄스공연
 학부모들 앞에서 댄스공연
ⓒ 꿈틀리인생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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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는 수업보다 친구들을 사귀고 덴마크 문화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트 수업도 흥미로웠지만 놀기 좋아하던 나의 관심사는 방과 후 생활에 쏠려 있었다.
 
덴마크 친구들이 매일 입에 달고 살던 'we live only once(우리는 오직 한 번의 삶을 산다)'라는 말처럼, 20살 이신영은 오늘만 살 것처럼 열심히 놀았다. 매주 테마가 다른 주말 파티와 학교 영화제 준비, 댄스 공연 준비, 다양한 스포츠 활동, 오르후스 시내 놀러 가기 등 날마다 바쁘게 놀았다. 놀다 지치면 덴마크, 일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체코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 국적, 성격도 모두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 꿈, 행복에 대한 공통 관심사로 즐겁게 이야기했다.
 
매일 놀았지만 매번 즐겁지는 않았다. 언어, 문화적으로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1학기 덴마크 친구들은 영어 사용을 두려워했다. 나도 덴마크어를 할 수 없으니 소통이 힘들었다. 인터내셔널 친구들은 영어를 썼지만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그 친구들과 오랜 시간 대화하는 건 힘이 들었다. 유명 미국 배우의 가십을 친구들이 이야기하며 웃을 때 혼자서 웃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친절히 답해줬지만, 계속 그 아이들에게 의존하며 살 수는 없었다. 거의 7개월 동안 그날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공부했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며 유럽의 농담 스타일도 연구했다.
 
2학기가 되어 친구들이 떠나고 새로운 친구들이 들어왔다. 2학기 친구들은 덴마크, 인터내셔널 구분 없이 영어를 잘했다. 학교를 반년 이상 다녔고 영어 실력도 나아져 2학기 생활은 전보다 순탄했다.
  
새로운 친구들과 스크린을 설치해 잔디밭에서 영화 보기, 학교 차를 빌려 바닷가에 놀러 가기, 한국 언니들과 한식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 등 여전히 열심히 놀았다. 학교 내 있는 바(Bar) 멤버가 되어 여러 칵테일 만드는 법도 배웠다. 다만 1학기 때 질리도록 한 사교와 파티는 전처럼 쫓아다니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수업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패션 디자인 수업은 들을 계획이 없었는데 마음을 바꾸어 메인 과목으로 골랐다. 수업을 듣게 된 이유는 1, 2학기 때 내 주위에 패션을 전공하는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우리는 매일 쇼핑을 다녔는데 주로 빈티지 옷 매장을 갔다. 유행을 따라가는 옷이 아니라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옷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원래 나는 남들에게 멋져 보이고 싶어서 유행하는 옷을 많이 입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옷은 남들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옷이라는 걸 친구들과 어울리며 알게 되었다. 수업을 들으며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개성 있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초보자였던 나는 마음만 앞섰지 6개월 만에 원하는 대로 패션쇼를 할 손기술은 갖추지 못했다. 부족한 점과 아쉬운 점이 컸던 패션쇼를 마치며 나는 패션 학교에 가서 제대로 옷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자유를 얻은 조나단처럼 
 
직접 만든 옷으로 패션쇼에 참가했다
 직접 만든 옷으로 패션쇼에 참가했다
ⓒ 꿈틀리인생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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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덴마크에서 그리운 부모님, 가족, 꿈틀리 친구들, 반려묘 유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10kg이 넘게 늘어난 몸무게는 내가 얼마나 덴마크에서 행복했는지를 수치로 증명해줬다. 나는 국내 패션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외국어보다 모국어로 배우는 학문의 깊이가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소개해준 패션스쿨 에스모드 입학 설명회를 참석했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그린 패션 스케치를 가지고 면접을 보러 갔다. 한 면접관이 나에게 왜 패션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이 질문은 스스로도 계속 물었던 질문이었다. 나는 "제가 처음으로 하고 싶은 간절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 답은 <갈매기의 꿈>을 읽으며 찾았다. 주인공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처럼 먹이를 잡기 위해 나는 대신 완벽한 비행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외로움을 극복하고 '완전한 자유'를 얻은 조나단처럼,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때 비로소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에스모드에 합격했다.
 
에스모드 입학을 한 달 앞둔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여유를 즐기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여행을 가면 현실과 멀어진 세상에서 새로운 나를 마주 할 수 있다. 부모님을 떠나 꿈틀리에 갔을 때도 그랬고, 덴마크로 떠날 때도 그랬다. 나는 조나단처럼 나의 사명을 찾아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인생여행을 하는 중이다. 나의 인생학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또 다른 인생학교를 기다려 본다.
   
꿈틀리 인생학교가 5기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https://ggumtlefterskole.blog.me

덧붙이는 글 | 이신영씨는 꿈틀리인생학교 1기 졸업생입니다.


태그:#꿈틀리인생학교, #꿈틀리, #전환학교, #추가모집, #대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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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숨가쁘게 달려온 청소년들에게 '옆을 볼 자유'를 주는 1년의 시간, 한국형 에프터스콜레 꿈틀리인생학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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