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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의 한 원룸 건물, 현관 비밀번호가 문 틈새에 적혀있다. 그대로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현관문이 열렸다.
 동대문구의 한 원룸 건물, 현관 비밀번호가 문 틈새에 적혀있다. 그대로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현관문이 열렸다.
ⓒ 김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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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문 앞까지 누구나 올 수 있다는 게 너무 소름 돋고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거주하는 A씨는 인근 대학교에 다니는 1인 가구 여성이다. A씨가 거주하는 곳은 다세대 주택으로 한 건물에 약 20여 호의 방이 있다. 1층 공동현관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 보안문이 설치되어있으며 보안문은 거주자들끼리만 공유하는 비밀번호로 풀 수 있다.

그런데 최근 A씨는 자신이 거주하는 건물의 공동현관에서 수상한 글씨를 발견했다. 현관 옆 건물의 외벽에 공동현관 비밀번호와 같은 4자리의 숫자가 적혀있던 것이다. 비밀번호 유출에 의한 범죄를 우려한 A씨는 그 즉시 펜을 이용해 비밀번호를 덧칠해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며칠 후 A씨는 자신이 덧칠한 숫자 근처에 또다시 누군가가 적어놓은 비밀번호를 발견했다.

거주민들을 범죄 위험에 노출하는 위험한 관행

A씨의 사례와 같이 비밀번호를 통해 공동현관을 드나드는 공동주택은 현관 근처에 비밀번호가 적혀있는 것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비밀번호를 적어놓는 것일까. 서울시 종로구에서 배달업에 종사하고 있는 B씨는 노출된 비밀번호를 근처 배달노동자들이 적어놓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손님들이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지 않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어쩔 수 없어요. 서로 돕고 돕는 거죠." 

B씨의 확신과 같이 공동 주택 현관에 노출된 비밀번호 대부분은 일부 배달노동자들이 업무상 편의를 위해 적어놓은 것으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집 앞까지 배송을 원하는 거주민들이 현관 비밀번호를 배달 업체에 알려주면  배달노동자들이 현관 근처에 비밀번호를 적어놓고 지속해서 이용하는 것이다.

배달 노동자들이 배달시마다 일일이 고객을 호출하거나 연락하는 수고를 덜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은 건물의 비밀번호를 외부인에게 공개하여 거주민들을 범죄의 위험에 노출할 가능성이 있다.

다수의 아파트 단지와 오피스텔에서는 공동현관의 보안문 시스템과는 별개로 경비원이 상주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관리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대학가 원룸촌과 같은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의 공동 주택들은 대부분 비밀번호를 통해서 현관의 보안을 유지한다. 즉, 비밀번호만 알고 있다면 외부인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배달노동자들이 순수하게 업무를 위해서만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면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관행은 외부인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건물을 드나들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준다. 배달을 위해 표시해놓은 비밀번호가 공동주택의 1차 보안을 무력화시키고 거주민들을 범죄의 위험에 노출하는 것이다.

특히 대학가 원룸촌의 공동 주택과 같이 거주 가구 대부분이 1인 가구로 구성된 건물의 경우에는 범죄의 위험에 취약할 수 있다. 상당수의 성범죄가 혼자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노출된 비밀번호가 1인 가구 여성을 노리는 성범죄에 이용될 수도 있다.

노출된 비밀번호를 이용한 범죄 사건

 
동대문구의 한 건물, 현관 비밀번호가 눈에 띄게 큰 글씨로 적혀있다. 역시 비밀번호를 그대로 입력하자 현관문이 열렸다.
 동대문구의 한 건물, 현관 비밀번호가 눈에 띄게 큰 글씨로 적혀있다. 역시 비밀번호를 그대로 입력하자 현관문이 열렸다.
ⓒ 김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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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송파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공공 주택 주변에 적힌 비밀번호를 이용해 건물 내부의 자전거를 절도한 혐의로 한 10대 소년이 불구속 입건되었다고 한다. 또한, 2019년 군산에서는 위와 같은 수법으로 원룸에 침입해 400만 원 상당의 자전거를 절도한 혐의로 24세의 남성이 불구속 입건된 사례도 있었다. 이는 이미 노출된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이용한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이를 이용해 외부인이 건물에 자유롭게 출입한 사례가 있다는 것은 침입자의 의도에 따라 절도를 넘어 대인범죄, 특히 여성대상 성범죄에도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범죄에 악용된 사례도 있는 만큼, 공동주택의 현관 비밀번호가 배달노동자들에 의해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있다는 문제는 이따금 언론에 의해서 보도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탓인지,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실효성 있는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공동 주택이 밀집해있는 지역에서는 노출된 비밀번호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많은 공동주택의 거주민들이 여전히 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태그:#1인가구, #여성대상범죄, #성범죄, #보안,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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