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 14:20최종 업데이트 20.04.2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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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오마스 파라곤 레드 만년필 M촉 분해 컷 ⓒ 김덕래

 
지난해 5월, 대구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꼭 갖고 싶던 펜인데 단종된 모델이라 중고로 어렵사리 구했어요. 한동안 잘 썼는데, 갑자기 잉크 충전이 안 되네요. 안쪽 어디가 망가진 것 같아요. 분명 떨어뜨린 적이 없는데 왜 이럴까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런데 저도 펜을 봐야 뭐라 말씀드릴 수 있어요. 펜촉이 휜 건 살짝살짝 펴내면 되지만, 부속이 심하게 손상된 경우는 난감해요. 교체할 여분의 부속이 다 있진 않거든요. 속상할 그 마음 저도 아니 일단 보내세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

내가 아끼는, 마음 한 조각을 떼어준 펜은, 물질적인 가격을 떠나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물건이 됩니다. '그거 별로 비싼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속상해 하지? 그냥 다른 거 쓰면 되지 않나?' 만년필이란 도구의 성질을 잘 모르는 분은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손을 탄 '쓸 것'엔 무언가가 이미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요즘처럼 노트북과 스마트폰 하나면 못할 일이 없는 세상에서, 잉크를 주입하고, 때때로 세척하고, 또 자주 써줘야만 하는 만년필은 마치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손으로 '쓰는' 행위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펜 한 자루 손에 쥐고, 흰 종이 위에 사각사각 소리 내며 뭔가 끄적이다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조금씩 침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대표 만년필이었던 '오마스'

통상 1920~1940년대를 만년필의 황금기라 부릅니다. 그러나 1950년대 상용화 단계에 진입한 볼펜의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많은 만년필 제조업체가 1960, 70년대를 버텨내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만, 초창기 만년필 생산업체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전체 시장의 볼륨감을 키워 나갔습니다. 위기의 나날을 하루하루 살아내다 보면 늘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흔적도 없이 소멸하거나, 화려하게 비상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파카는 와셔클립으로, 쉐퍼는 화이트닷, 또 펠리칸은 부리클립을 상징화한 것처럼, 몽블랑은 로고인 화이트스타를 앞세워 근대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필기구 브랜드 아이콘이 됐습니다.

오마스(OMAS)는 한때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만년필 제조사로 일본 플래티넘, 이탈리아 오로라와 함께 1919년 문을 열었습니다. 디자인도 그렇지만 필기감이 더 예술이라는 평을 받던 오마스는 이탈리아 업체 중 필기구에 셀룰로이드를 가장 먼저 사용하며 이름을 높였는데, 안타깝게도 폐업했습니다.

이 펜은 2008년 100자루 한정판으로 출시한 파라곤 레드 만년필입니다. 피스톤 작동이 제대로 안 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저에게 왔습니다. 완전히 분해하고 보니 상태가 심각합니다. 피스톤 메커니즘(구조) 일부가 갈라져 있고, 배럴(barrel, 몸통)엔 금이 가서 제 기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겨우 달려만 있는 상태라, 제대로 힘이 걸리면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수리하면 좋을까 고민이 깊어갑니다. 
  

오마스 파라곤 레드 만년필, 손상된 메커니즘 ⓒ 김덕래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사이즈를 재 보니 금이 간 상단부를 아예 날려도, 얕게나마 나사산이 걸릴 것만 같습니다. 몸에 힘을 빼면 사고도 두부처럼 부드러워집니다. 유연함이 몸 안에 자리 잡으면 다양한 상상의 가지를 펼치게 되고, 그것이 역발상으로 이어져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떨어지기 직전인 부분을 아예 제거하고, 절단 부위를 매끈하게 다듬었습니다. 다행히 잘 잠깁니다. 어떻게든 붙이려는 시도 대신 정반대의 수를 썼는데 그게 먹혔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힘겹게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험해졌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닦고 매만지며,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컨디션을 끌어올렸습니다. 성인 남성의 힘을 만년필은 버텨내지 못합니다. 아빠들이 힘줘 꽉 잠근 유리병 뚜껑은 그저 안 열릴 뿐이지만, 배럴은 또 다릅니다. 사진처럼 길게 금이 간 상태라, 메커니즘을 결합하면 제대로 잠기지 않고 헛돌게 됩니다. 손상된 부분은 가장 힘을 많이 받는 지점입니다. 접착제를 사용해도 얼마나 오래 버텨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마스 파라곤 레드 만년필 피스톤 메커니즘 ⓒ 김덕래

  

만년필 배럴(Barrel, 만년필 몸통부위) ⓒ 김덕래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순간

이럴 때 효과적인 수리법이 있습니다. 제가 즐겨 쓰는 마스킹테이프입니다. 따로 수선용으로 특화된 전용 키트는 아니지만, 깨진 제 펜 몇 자루도 이걸로 보수했습니다. 금이 간 배럴 안쪽과 바깥면에 접착액을 바른 후 충분히 말려줍니다. 너무 두꺼워도 또 얇아도 안 됩니다. 과하게 두툼하면 부속간 간섭이 생기고, 또 얇으면 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얇게 펴 말리고 덧바르는 과정을 반복해 두께감을 조절하는 편이 낫습니다.

한번에 해결하려는 과욕은 금물입니다.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테니스 라켓 손잡이에 테이핑 작업을 하듯 촘촘히 감았습니다. 작업시 테이프의 탄성을 충분히 활용해 약간씩 당겨가며 감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잘 버텨줍니다. 무심히 그냥 감기만 하면 제대로 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조립 후 잉크를 충전합니다. 정상적으로 주입됐습니다. 배럴 수리 부위도 탄탄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양호한 수준입니다. 수리 전 예상한 그림대로 잘 손봐졌습니다.

모든 제품엔 이성적 기준에서의 내구 연한이 있고, 감성적 영역에서의 기대 사용수명이 있습니다. 만년필에 만약 정령이 있다면, 머무는 곳은 펜촉일 것입니다. 이 만년필의 펜촉은 다행히도 아주 약간 틀어졌던 상태라, 좀더 좋게 다듬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초반의 경미한 헛발(처음 필기할 때 잉크가 잘 안 나오는 현상)이 잡혔고, 펜촉 단차 조정으로 필기감이 개선됐습니다. 균일한 흐름입니다. 좋습니다. 이 펜은 아직 한참 더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마스 파라곤 만년필 수리 후 ⓒ 김덕래

 
사용 중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잉크를 충전할 때는 메커니즘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작동시켜야 합니다. 노브(손잡이)를 반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려 피스톤이 바닥에 닿으면 꼭 멈춰야 합니다. 마지막 조금 넘치는 그 힘이 부속에 무리를 줍니다. 무심히 반 바퀴라도 더 돌려버리면 겨우 결합된 부분이 버텨내질 못합니다. 다시 이탈되면 힘들어진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처음 펜을 받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펜촉 상태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니, 수리가 불가하면 잉크를 찍어 딥펜처럼이라도 쓸 수는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자구책이겠지요. 이 펜이 만들어진 원래 상태대로 쓸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조사가 문을 닫아 더 이상 부속을 새것으로 교체할 수 없는 펜이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고, 다행히 바람은 현실이 됐습니다. 
 

오마스 만년필 시필 테스트 ⓒ 김덕래

 
만년필을 반려견에 비유한 제 글을 보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공감한다고, 나 역시 낡아 삐걱거리는 만년필이 마치 오랜 세월 함께 한 노령견 같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냥 서랍에 넣어만 두고 있었다고. 펜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그렇게 아날로그에 진한 향수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소멸하지만, 이 만년필은 아직 아닙니다

한때 번영을 누렸으나, 이리저리 흔들리다 2016년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오마스(OMAS). 오로라, 비스콘티, 몬테그라파와 같은 이태리 브랜드들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소멸해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서글픈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만년필은 아직 아닙니다.

잉크가 문제없이 충전됐습니다. 글씨도 잘 써집니다. 하지만 사람으로 치면 큰 수술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손상 부위를 잘라내고, 갈아내고, 붙이고, 또 다듬고, 조였습니다. 고맙게도 만만찮은 수리 과정을 펜이 잘 버텨줬습니다.
 

오마스 만년필 수리 완료 ⓒ 김덕래


여든이 넘은 아버지께서 최근 병세가 깊어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전신마취 후유증으로 환각과 섬망 증세를 겪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연세에 비해 분명했던 판단력이 흐려진 아버지에게 다그치듯 말했던 걸 후회합니다. 아이처럼 음식 투정을 하는 아버지를 억지로라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힘들어 하는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서로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나보다 더 기가 막히고 답답했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란 걸 왜 몰랐을까요. 얼굴, 팔, 다리 할 것 없이 온몸 곳곳에 수많은 전선과 튜브가 꽂힌 상황은 분명 아버지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거칠어진 팔과 다리에 로션을 바르다 멈칫했습니다. 분명 탄탄한 근육이 팔뚝과 종아리에 가득했는데, 왜 지금은 마치 크림빵 속처럼 부드럽기만 한 걸까요. 세게 누르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는 마치 갓 썰물 후 갯벌 같습니다.

펜이 잘 손봐진 것처럼, 아버지도 하루빨리 툭툭 털고 병실 밖으로 나오길 소원합니다. 아버지의 내구 연한이 만년이면 참 좋겠습니다.

* 오마스(OMAS) : 1919년 문을 연, 디자인도 그렇지만 특유의 버터필감으로 더 유명했던 브랜드. 2016년 폐업으로 더 이상 신품을 구할 수 없다. 이젠 역사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한때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필기구 생산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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