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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간 어설프기만 했던 여행의 피로를 덜어준 것은 스위스에서였다. 숙소에 비치된 방명록에 가족의 이름을 모두 적었다. 다음엔 꼭 모두 같이 오자는 바람을 담았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방명록. 사람들은 어떤 사연을 적을까. 방명록 앞에 오래 앉아 모르는 문자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적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딸도 조용히 나가 무언가를 적었다. 무엇을 적었는지 서로 묻지 않았다. 나의 바람도 딸의 이야기도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침 일찍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타고 정오쯤 피렌체에 도착했다. 예약한 한인 숙소를 찾아 기차역을 나섰다. 미리 인터넷을 검색해 기차역에서 숙소까지의 안내지도를 휴대폰에 저장해 왔다. 지도를 보며 지하도를 통과해 광장 앞에 이르니 벌써 지쳤다. 숙소는 골목골목을 돌아야 해서 찾기 어렵다는 주인장의 메시지가 생각났다. 전화를 걸었고 곧 안내하는 사람이 나왔다. 캐리어 중 하나는 벌써 말썽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이동이 없어 숙소에 얌전히 있었던 캐리어가 바닥이 온통 울퉁불퉁한 돌을 만나니 바퀴가 비명을 질러댔다. 바퀴가 이미 다 닳아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곧 떨어져 나갈 것처럼 삐걱거리고 덜거덕거린다.

남편이 친구에게 빌려온 캐리어였다. 빌려온 것에 대해 처음엔 별 신경을 안 썼다. 딸은 달랐던 모양이다. 말썽이 나고부터 아빠가 빌려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냥 사도 될 것을 굳이 빌렸다고 했다. 겉보기엔 멀쩡했는데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챙겨야 하다니, 정말 경험담에나 쓸 만한 사연이다. 딸과 나는 남의 눈에 민감하다. 다른 이의 시선을 살핀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관심 없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의 캐리어까지 신경 쓰지 않을 거란 생각을 못 한다. 표시 나지 않도록 힘으로 끌고 간다. 캐리어가 바닥을 최대한 덜 마찰하도록 온몸을 써서 캐리어를 배려한다. 여행 중반이어서 싸 온 음식들이 뱃속에 들어가는 바람에 조금은 짐이 가벼워졌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얼마나 아껴가며 먹었던 음식들인데, 오늘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도미토리를 예약했으나 빈자리가 없어 2인실이 주어졌다. 오늘 하루만의 행운이었다. 오후 시간에 피사 일정을 잡아 두었고 짐을 정리하고 용감하게 나섰다. 지난 일주일을 이끈 것은 무모한 용기 덕분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었다. 딸은 되도록 지도를 보고 찾아가려고 끝까지 버티는데 그사이 나는 누군가를 향해 돌진했다. 불끈 솟아오르는 이 용기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주저앉아야 했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플랫폼을 확인하고 기차를 기다렸다. 기다리며 여행안내 책자를 다시 본다. 얼른 다녀와서 피렌체 야경을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보기로 했다.


딸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은 3월이다. 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오케이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와의 여행담이 솔솔 들려오던 중이라고 했다. 며칠 뒤 다시 확인했다.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족들 모두에게 여러 번 물었으나 아들은 재수 중이다.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 없어 덤빈 여행 계획이었고, 아들에게는 의례적인 질문이었다는 것을 모두 안다. 재수생을 두고 갈 수 없으니 남편도 남겠다고 했다. 둘이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았지만, 계속 확인하고 다짐받았다. 그래도 정말 되는지. 질문과 상관없이 여권을 만들고 있었다. 딸은 이미 가까운 곳으로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었지만, 나는 제주도 가족여행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그런데 유럽으로의 내가 주도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도 딸과 단둘이, 자유여행으로.

5월 중순쯤 비행기 예약을 마쳤다. IN-OUT만 결정된 티켓이었다. 수도 없이 이름과 여권번호 등을 확인했고 예약은 잘 되었다. 가고 싶은 도시를 정하고 국가 간 이동, 도시 간 이동 방법을 정했다. 유레일패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모든 과정에서 딸에게 거듭 확인했다.
'지금 상황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어. 다음엔 이것을 할 거야. 이동 과정이 어려울 것 같아.' 등. 상황마다 걱정이었는데 딸은 의외로 가볍게 반응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돈만 있으면 된다고. '돈을 아끼려고 그런다.'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핀잔을 들으면서도 또 물었다. 보고 싶은 것이 뭔지,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대답을 성의 있게 하지는 않았다. 결국, 혼자 묻고 답하고 예약하고 진행했다. 숙소와 유명 관광지와 공연 티켓 같은 것들을 이후로도 출국 직전까지 준비했다.


파리에서의 5일의 여정은 시작부터 초긴장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서 처음 내리는 낯선 이국땅. 유럽은 둘 다 초행이라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기까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오후의 햇살 사이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드디어 파리야. 내가 여기 있다니! 난 공항에 도착하면 진한 향수에 취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근데 뭐, 똑같네 한국이랑. 그래도 어딘가 툭 던져진, 낯선 풍경 속에 혼자인 듯한, 이 느낌 좋다."
파리에 입성한 감상이었다. 투박한 감상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가는 기차역으로 가는 길을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안내원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으라고 딸에게 말하고는 앞에 보이는 어떤 이에게 거침없이 다가갔고 손짓하며 물어 대답을 얻었다.

13일간의 여행이었다. 이 여행만 잘 마치면 앞으로는 혼자서도 어디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딸과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의 마찰이 있었지만, 특히 그날의 기억은 생각만 해도 어이없었고 돌이켜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다툼의 발단은 전날의 피로 때문이었다. 여행을 와서 나는 집에서보다 더 부지런을 떨었다. 집이 아니라는 긴장감 때문인지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먹기 전에 이미 나갈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 지난 일주일간은 딸은 나의 호흡에 충실히 맞추어 주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 와서 매일 10시간씩의 강행군이었고 체력을 걱정했던 것은 오히려 나인데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딸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천천히 움직이자고 간단히 말하고 돌아누웠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는 시간에 맞춰 먹고 아울렛 갔다 오고 주변의 가죽 시장도, 베키오 다리도, 전날 못 간 곳도 가자고 미리 말을 해 둔 상황이었다. 우리는 여행과 관광의 그 중간쯤을 보내고 있었다. 도무지 여유를 가질 수 없게 일정을 짜 두었다.

집에서처럼 그냥 둘까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딘가. 피렌체다. 두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딸은 일어났고 느릿느릿 움직였다. 행동이 얌전할 리 없었다. 닥치는 대로 툭탁 던지고 재끼며 왔다 갔다만 반복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끌려 나오는 사람처럼 광장까지 어찌어찌 나왔다. 여전히 퉁퉁거리고 채로. 
숙소로 들어가자고 했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말자고, 오늘 하루 숙소에서 푹 쉬자고, 숙소를 나서는 순간부터 참았던 말이 터졌다. 딸은 싫다고 했다. 나의 마음속에서도 이런 모양새로 숙소에 다시 들어가면 많은 여행객과 주인장의 눈치가 보일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 생각을 딸도 했을 것이다. 말은 뱉었고 짜증은 치밀었다.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딸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당황스러웠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미안하단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의 눈물도 터졌다. 속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싶었다. 너무 속이 상해서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지나는 사람들이, 더욱 낯선 얼굴들이, 그들의 시선이 낯선 동양의 두 여자에게 예리하게 꽂혔다. 짐짓, 다른 이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속상하다고, 당장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먼 곳에서 딸과 싸우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만행을 고발했다.


여행을 준비하며, 남편 없이 딸과 둘이서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며, 처음이었지만 딸과 함께이고 때론 딸이 남편보다 말이 잘 통하기도 했으니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남편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도 했었고, 그런 나에게, 나의 편에서 완벽하게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그날의 상황은 나도 낯설었다. 딸과의 일을 남편에게, 그 먼 거리를 건너 고자질하듯이 말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너무 뜬금없어 충격이었다. 남편이 나를 어떻게 달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울음이 수습됐고 전화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으나 주변이 보였고 민망함이 밀려왔다. 다시 정신을 차렸고 서둘러 국제전화를 끊어야 했다.

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던 대신 여행 기간 내내 지도에 머리를 박고 다녔다.
"몇 블록 지나 어디, 다음 모퉁이를 돌면 어디로. 우리가 갈 곳은 지하철 두 정거장 지나서 내려면 돼. 예약 시간은 몇 시니까 언제쯤 출발하면 될 것 같아. 요금은 얼마야. 동전을 준비해야 함."
숙소를 나서면서부터 하루의 여정을 도맡아 챙겼다. 쓰지 않던 신경을 과하게 썼기 때문인지 매일 피로감을 호소했고 같은 처지의 나는 의례적으로 대답하고 흘려 넘겼다.


그날 이후 반도 더 남은 여행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조심하게 되었다. 딸도 나에게 조심하는 모습이 매 순간 보였다. 가족이 아닌 남처럼 서로를 존중했고 말을 가려서 했다. 그 이후로도 소소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떻든 무사히 여행에서 돌아왔다. 돌아와서 나는 남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딸이 그냥 딸이었고 남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 한 번 딸과의 유럽여행 이후, 지금까지 나는 남편과 둘이서만 자유여행을 즐기고 있다.
 

태그:#첫여행, #유럽자유여행, #딸과의여행, #피렌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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