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관련사진보기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 「비밀」, 이시영

'무장한 개혁자'(이사벨라 비숍) 또는 '왕조타도의 혁명가'

김개남 장군은 반봉건ㆍ반외세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43살에 목이 잘렸다.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환치하고 민족의 비극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잘못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우고자 봉기에 나섰다가 기득권 부패세력이 끌어들인 외세에 밀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피를 뿌렸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조각된 동학농민군들. 장태를 굴리며 관군에 맞서는 모습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역사의 수레바퀴는 잘못 굴러가서 나라는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척왜'의 깃발 대신 '히노마루'(일장기)가 나부끼고 동학농민혁명을 탄압했던 무리들이 일제의 마름노릇을 하면서 다시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이 오고 분단이 되고 동족상쟁과 백색ㆍ카키색 독재가 이어지는 긴 세월 동안 위대한 선각자는 역사의 뒷켠에 묻혀졌다.

동학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정명(正名)을 회복함에도, 그 혁명의 주역의 하나인 김개남 장군은 전봉준 장군의 위광에 밀려 '괄호' 또는 '기타'의 단역으로 묶이었다. 역사인물의 편향성은 한니발과 나폴레옹, 을지문덕과 연개소문만을 기록한다. 전쟁사는 지휘체계상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동학농민혁명은 글자 그대로 혁명이었다. 혁명은 혼자 할 수 없다. 쿠데타와 다른 것이다.

김개남은 전봉준ㆍ손화중과 시국인식과 혁명노선에서 확연히 달랐다.

"전봉준을 중도좌파로, 김개남은 강경좌파로, 손화중을 온건우파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손화중을 비롯하여 김덕명ㆍ최경선 등 우도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봉준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주석 7)


다음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가 동학지도자들 간의 노선 차이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다.

지난 가을 9, 10월경부터 전라, 충청 및 황해 각 도에서 봉기한 동학당은 외형은 농민봉기와 유사할지라도, 그 종류는 각양각색이어서 원래 동학도라고 하는 가운데에는 일종의 종교와 유사한 유도(儒道)와 불법(佛法)을 혼합한 천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동도(東徒)의 수령 이하 접주라고 칭하는 각처의 우두머리들은…자신들의 세력을 키웠으며 김개남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는 등 곧 그 내부에 혁명ㆍ척왜ㆍ축관(革命ㆍ斥倭ㆍ逐官) 등 각양각색의 목적을 갖고 있는 집합체로서 그들의 당교(黨敎)는 능히 인심을 단결시켜 죽을 힘을 다하게 하는 데 충분할 것 같습니다. (주석 8)
 
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김개남은 1차봉기 때부터 단순히 탐관오리의 징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를 전복하려는 데 목표가 있었다. 자신이 군주가 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개남(開南)이란 작명에서 보이고, 1차봉기 때 내걸었던 4대강령에서도 분명히 하였다.

김개남 등 일부 지도자는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를 건설하려는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전봉준ㆍ최시형 등의 조선왕조의 국법에 준하는 패정개혁 등의 활동 요구, 즉 집강소 체제하에서의 활동 요구를 거부하고 더욱 급진적인 폐정개혁 등의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동학지도자들은 조선왕조 질서 내에서의 개혁을 통한 보국안민 실현,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구상을 지닌 지도자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동학지도자들은 1894년 농민봉기 시기에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분열ㆍ대립하였다. (주석 9)

  
동학농민군으로 분장한 학생들이 관작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동학농민군으로 분장한 학생들이 관작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이재형

관련사진보기

 
김개남의 왕조타도의 혁명성은 공사간의 몇 가지 기록에서도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유생 박주대(朴周大)의 기록이다.

이때 호남의 동학 우두머리 김개남은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에 웅거하여 칭호를 참칭하면서, 좌우상(左右相)과 6조장관(六曹長官)을 두고 홍솔팔인교(紅率八人轎)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개원개남(開元開南)〔새왕조〕의 선봉대장 전봉준과 손화중은 모두 청솔팔인교를 타고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한 부대는 공주 금강에 이르렀고 한 부대는 공주 이인(利仁)에 이르렀다. (주석 10)

김개남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기드문 민중을 주인으로 하는 새왕조 창업을 시도한 혁명가였다. 그의 시도는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과 정보력에 의해 좌절되고, 이같은 의도를 꿰찬 왕조의 관리들에게 즉결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주석
7> 이이화, 앞의 책, 170쪽.
8> 『일본공사관 기록』7, 3쪽.
9> 이희근, 앞의 책, 97쪽.
10> 「나암수록(羅巖隨錄)」, 『사료대계』2, 403쪽, 여기서는 이희근, 앞의 책, 95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 #김개남장군 ,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김개남, #왕조타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중앙정보부에 끌려갔지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