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 중에 마약 흡입이 있다고 말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하던 눈길의 매질을 당한 적이 있다. '좀 별난 버킷 리스트네'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다가, 아주 천하에 몹쓸 위인이 되었다.

'나잇살이나 먹어서 그런 치기 어린 말 따위를 하다니'하는 한심해하는 눈빛에서, 한 번 손댔다 중독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과도한 기우까지, 여하튼, 경멸과 탄식의 뭇매를 맞았다. 불법인 것은 안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치도곤을 당할 일 인가엔 여전히 동의되지 않는걸... 어떤 중독도 타인을 해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을 해칠 뿐, 그것도 치명적으로.
 
중독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스틸 이미지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스틸 이미지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30초. 존재에서 무(無)까지."

마약을 딱 한 번만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게 한 건 결정적으로, 바로 이 말 때문이었다. <숨을 참던 나날>의 저자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헤로인이 자신의 몸에 들어온 감각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내 상상력은 너무 무능해서, 이 느낌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존재'에서 '무'가 된다는 이 극단적 느낌은 대체 어떤 초월감인 걸까,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영화 <페인 앤 글로리>에서 주인공 살바도르가 헤로인을 처음 흡입하고 기절할 듯 잦아들며 눈꺼풀을 발발 떠는 모습에서, '아 그가 존재에서 무로 넘어가고 있구나', 알아챘지만, 그 엄습한 장악감을 알 길이 없다.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영화계 거장이다. 32년 만에 자신이 만든 옛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한다는 소식을 듣고, <맛>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친구인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를 찾는다. 살바도르는 알베르토가 <맛>을 촬영할 당시 헤로인에 젖어 있었고, 이 때문에 과잉으로 흐른 알베르토의 연기가 영화의 분위기를 반감시켰다고 비난했고 그로서 소원해졌다. 그런 알베르토를 다시 찾아 영화 재상영 얘기를 하다, 우연히 헤로인의 '맛'을 보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살바도르의 헤로인 접촉은 우연인 듯, 장난인 듯싶지만, 그가 쓴 글 <중독>은 그 너머를 내비친다. 살바도르는 30여 년 전 헤로인에 중독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그의 중독을 막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랑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의 사랑에 한계를 느낀 살바도르는 애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와 이별하고, 그때의 아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났던 사랑의 날들을 글 <중독>에 녹였다.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애사는 결코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살바도르에게 헤로인 중독으로 헤어진 연인 페데리코는 마음 한켠에 짙게 드리운 그늘이다. 헤로인 때문에 헤어진 연인을 헤로인으로 불러내어 공감하게 되리라고는 살바도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실의 아픔을 준 그것을 자신에게 투입함으로써 그 시절의 그를 회복시키고 화해하게 되는 아이러니.
 
살바도르에게 영화는 곧 삶이다. 영화 없는 삶은 그에게 에크모를 낀 채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지나간 날들의 복기가 필요했다. 무심히 흘려보냈을 그 시간 속에 분명 자신이 놓치고 만 것이 있었을 테고, 그 놓쳐버린 순간들이 자신을 이루어왔음을, 그것도 아주 소중했던 부분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지나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는가. 지나간 한순간 한순간이 자신을 완성시켜온 퍼즐 조각이었음을.
 
반짝임(글로리) 속에 스미는 통증(페인)
 
살바도르의 몸은 고통 덩어리다. 온몸이 거의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등골의 가운데를 길게 가르고 있는 상처는, 응집된 그의 고통을 해결해보고자 메스가 지나갔던 흔적을 알려준다. 수술을 받고 약물을 투여하고 수중치료도 받아보지만 효험이 없다. 등의 통증, 요통, 두통, 편두통, 이명, 쌕쌕거리는 폐 소리, 패닉, 불안, 우울증, 불면증까지, 그의 몸과 정신은 고통의 종합세트라 할 만하다.

이 정도면 일상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통증은 극심한데, 의학이 규명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그는 서있다. 첨단 장비로 몸의 곳곳을 들여다보지만 자신의 통증이 제 이름을 찾지 못할 때, 어떤 약도 치료도 무효일 때, 아픈 사람은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된다.
 
영화 속 살바도르의 통증은 그의 삶에 대한 함의를 지닌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고통은 독립되기도 연결되기도 하지만, 이들이 교직하는 지점을 명백히 짚어내기는 어렵다. 고통에 관통당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쩔쩔맨다. 설명할 길이 없는 아이러니와 반전이 얽힌 삶에 속수무책인 것처럼 말이다.

분명 엄청나게 할퀴고 간 상처임에 틀림없지만, 그 상처가 나를 성장시켰음을 부정할 수 없고, 분명 빛나던 순간으로 남아있는 그 지점조차도, 때로 아픔 없이 돌이킬 수 없으며, 또 어느 누군가에겐 깊은 상처를 안기기도 했을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삶을 이루지 않던가.
 
어느 화랑에서 날아든 초대장에 실린 한 그림은 살바도르가 거의 완전히 망각했던 어린 그날의 '첫 번째 열망'을 회생시킨다. 문맹이었던 마을의 화공 에두아르도는 어린 살바도르에게 해석 불가한 두근거림을 알려준 첫 사내, 어쩌면 첫사랑일지 모른다. 글을 모르던 자신에게 연필 잡는 법부터 글을 읽고 쓰는 법까지 세심하고 의젓하게 가르치던 꼬마 선생을 에드아르도는 각인하고자 한다.

동굴 밖에서 안으로 햇빛이 찬란히 쏟아져 들어오던 그날, 그 빛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는 미소년, 지극히 아름답다. 그 빛 아래의 그를, 첫 열망의 흔적을, 마땅한 종이가 없어 고작 종이 포대 자루에 남기지만, 그의 순수하고 뜨거운 첫 마음을 새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림을 마치고 더러워진 몸을 씻은 에두아르노의 벗은 몸을 보고 정신을 잃은 살바도르. 그는 그날 열에 달떠 쓰러진 이유가 단지 일사병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이제 안다. 자신을 열로 휘감은 그 옛날의 순간이 한 점의 그림으로 생생히 소환될 줄이야.

'아, 어린 날이여. 나는 그날의 나로부터 잉태되었구나.'
 
가난했던 유년 시절의 동굴 집, 햇빛만큼은 풍요로이 쏟아져 들어오던 그날의 어린 살바도르가 한 화랑의 벽에 걸려있다. 에두아르도는 살바도르에게 약속한 대로 그림을 색칠해 보냈지만, 그림은 주인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그 그림이 수신자를 찾지 못했던 그 먼 시간에서 거슬러 올라와, 주인 앞에 당도한 것이다. 그림을 찾아 헤매지 않았음에도, "그림은 도착해야 할 곳에 도착했다."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스틸 이미지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스틸 이미지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파편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듯 이어지는 영화는 어머니에게 머문다.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신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그렇지만 당당히 아들에게 고한다. 너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노라고. 아들은 그 희생이 버거웠을 것이다.

자신답게 사는 일이 어머니의 희생에 보답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자신의 열망이 어머니의 희생을 배반할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괴리는 모자 사이의 틈을 조금씩 벌려놓았을 것이다. 희생한 어머니의 인생을 자신이 요구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희생에 빚지지 않았다고 우길 수 없기에. 희생한 부모의 죽음에 자식은 회한으로 사무친다.

<페인 앤 글로리>는, 많은 시간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되돌릴 수 있다면, 다르게 펼치고 싶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지만, 실은 되돌린다 해도 속절없음을 안다. 그때 그 결정을 한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이가 아니기에. 삶의 궤적을 오차 없이 새겼을 나이테는 나의 과거를 허물없이 볼 수 없게 한다. 허나 어쩌랴. 이 또한 나인 것을.
 
참, 살바도르는 헤로인에 중독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그렇게 깊고 고요한 아픔을 남긴 옛 연인은 그를 떠난 후, 그의 애면글면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냈다. 결국 "서로의 세상에 갇힌 채였던" 두 연인의 헤어짐은 서로를 구해낸 셈인가. 그 시절로부터 평생 부채감을 지녔던 살바도르는 비로소 빚쟁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실은 자기연민에서 헤어났다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 듯하다.
 
영화는 페로니코의 건재를 확인한 살바도르가 헤로인을 변기에 버리는 장면으로, 그의 온전함을 증명함으로써 관객을 안심시킨다. 거장 영화감독이 헤로인에 빠져 폐인이 될 리 없다는 듯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반추하며 아픔과 영광이 혼재한 자신의 삶의 알리바이를 확보하자, 살바도르는 다시 메가폰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영화는 결말을 낙관적으로 열어놓는다. 그런데 왜 좀 싱겁게 느껴질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안토니오 반데라스 중독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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