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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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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서울에서 근대교육을 받고 사회의식에 눈이 틔는 19세기 말 조선사회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유림세력과 세도정치세력에 의해 권력과 부가 독점되고 척사계열의 수구파가 득세했으나 근대화를 위해 서구문물과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개화파가 등장하면서 점차 위기에 내몰렸다.

수구파는 낡은 봉건체제의 고수와 외세의존을 통해서라도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유지하겠다는 지극히 반동적 정치ㆍ사회세력이 되고, 개화파는 서구의 선진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낡은 봉건의 틀을 벗자는 신진 변혁세력이었다. 여기에 동학의 등장과 함께 시대의식이 깨우친 농민중심의 민중세력이 등장하였다.

보수세력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워 부분적인 제도적 개혁을 시도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기득권에 매몰되어 임오병란과 동학농민혁명 때에 두 차례나 외국군을 불러들이고, 개화파는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동양적 문명발전론인 '개물성무(開物成務) 화민성속(化民成俗)'를 내세우면서 갑신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나 '3일천하'에 그치게 되었다.

아직 정치ㆍ사회세력이 취약한데다 외국세력에 의존함으로써 광범위한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농민 세력은 동학을 구심체로 하여 거대한 민중세력을 형성했지만 지도부의 분열과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30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막을 내렸다. 그 즈음 국내 정세를 살펴본다.
  
1896년의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러시아공사관'의 모습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우리가 아는 덕수궁의 고단한 역사는 바로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 1896년의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러시아공사관"의 모습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우리가 아는 덕수궁의 고단한 역사는 바로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1896년의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러시아공사관"의 모습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우리가 아는 덕수궁의 고단한 역사는 바로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 김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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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ㆍ서재필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혁신정부를 세우고자 '14개조 개혁요강'을 마련했으나 3일만에 원세개의 청국군에 쫓겨 실패하고,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을미사변', 이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을미의병' 봉기,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의 공관으로 이거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고종이 사실상 러시아세력에 연금 된 사건이다.

주시경은 1896년 10월 스물 한 살에 김포군 통진의 경주 김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주시경은 학구열이 넘치는 청년이면서 대단히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민족운동에 참여하고서도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여 쉬는 날이 없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하던 1898년(25살) 그는 상동교회(지금의 새로나백화점 자리)의 청년학원 국어강습소에 국어문법과를 만들어 자신의 연구결과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 때의 강의록을 31살 때 『대한국어문법』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상동교회의 강의말고도 그는 학창시절과 그 이후의 삶을 국어연구만이 아니라 서울시내 각 학교의 강습소, 외국인 한어연구소의 국어교사로서, 또 독립협회와 협성회의 간부로서 바쁜 생활을 보냈다. (주석 1)

  
송재 서재필박사 영정
▲ 송재 서재필박사 영정 송재 서재필박사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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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배재학당 재학 중 수행한 큰 역할의 하나는 '협성회'와 『협성회보』 발간에 찬술원(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일이다. 서재필의 지도로 이승만ㆍ전덕기 등과 함께 조직한 '협성회'는 처음에는 학생단체였으나 곧 일반인들도 참여하였다. 1896년 10월에 조직된 협성회는 이듬해 회원 600명 중 재학생이 200명이고, 일반인이 600명에 달할만큼 일반인의 참여가 많았다.

협성회는 뒷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원형'이 되었다. 회의용어 '동의', '재청', '개의' 등이 이때 처음으로 쓰이고, 박수치는 법도 이때에 생긴 것이다. (주석 2)

『협성회보』는 주간지로서 신문형으로 발행하여 인기가 늘었다. 협성회가 1897년 한 해 동안 토론회에 내걸었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주시경은 토론내용을 정리하여 『협성회보』에 실었다.

 (1) 국문을 섞어 씀에 대하여
 (2) 학생이 양복을 입음에 대하여
 (3) 아내와 자매와 딸들을 각종 학문으로 교육함에 대하여
 (4) 학생들이 매일 운동함에 대하여
 (5) 여인들을 내외시킴에 대하여
 (6) 국내 도로를 수선함에 대하여
 (7) 우리 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에 대하여
 (8) 노비(奴婢)를 속량함에 대하여
 (9) 우리 나라 철도놓는 데 대하여
(10) 우리 회원들이 인민을 위하여 가두연설함에 대하여
(11) 회원들은 20세 전에 혼인하지 않음에 대하여
(12) 우리 나라에서 쓰는 말(斗)과 자(尺)를 똑같이 함에 대하여
(13) 국민이 20세 된 자는 일제히 병정으로 택함에 대하여
(14) 서울과 인천 사이에 철도놓는 데 있어서 놓는 규칙을 배우게 함에 대하여
(15) 각처에 공원을 설치하여 몸을 깨끗하게 함에 대하여
(16) 목욕간을 설치하여 몸을 깨끗하게 함에 대하여
(17) 사농공상(士農工商) 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함에 대하여  
(18) 각 곡식 종자는 외국품을 구하여 심게 함에 대하여
(19) 병인들을 외국약으로 치료함에 대하여
(20) 산소(무덤)를 풍수지술로 구하지 말고 집집마다 마땅한 곳을 택하여 씀에 대하여
(21) 무슨 물건이든지 에누리 말고 매매함에 대하여
(22) 각종 문자를 왼쪽에서 씀에 대하여
(23) 내시(內市)를 출입하는 외국인에게 지세(地稅)를 많이 받음에 대하여
(24) 우리 나라에도 상하 양원을 설립함이 정치상 급선무임에 대하여
(25) 군대의 구령(口令)를 우리말로 씀에 대하여
(26) 의관(醫官) 제도를 복구함에 대하여
(27) 각부에 있는 고문관들을 한(限)이 지나거든 외국 사람을 쓰지 않을 것에 대하여
(28)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인민에게 제조소를 설치하여 줌에 대하여
(29) 우리 회 중에서 회보를 발간할 것에 대하여
(30) 정부에서 인재를 택하는 과거(科擧)에 대하여
(31) 개항을 많이 함이 나라에 유익함에 대하여
(32) 신문국을 각처에 설치하여 인민의 이목을 넓힘에 대하여 (주석 3)


주석
1> 고종석, 「주시경」, 『발굴 한국현대사인물(1)』 13~14쪽, 한겨레신문사, 1991.
2> 『나라사랑』, 216쪽.
3> 앞의 책, 217~21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협성회,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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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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