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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70년대 들어 중산층 형성 같은 경제적 풍요를 경험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TV 180만 대, 냉장고 85만 대, 세탁기 26만 대가 팔리며 '소비사회'로 본격 진입했음을 알렸다. 동시에 1970년대 한국은 유신체제를 통해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된 시기를 겪었다.

7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79년이 우리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바로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해이기 때문이다. 1979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18년 동안 이어진 박정희 철권통치가 종말을 고했을까? YH무역 농성 사건,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과 국회의원직 박탈, 부마민주항쟁, 10.26, 12.12 쿠데타가 모두 1979년에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과 1979년
 
박정희 빈소에서 조문하는 김영삼 1979년 11월 1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청와대 비서실에 마련된 박정희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취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과 의원직 박탈 조치는 부마항쟁 발생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 박정희 빈소에서 조문하는 김영삼 1979년 11월 1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청와대 비서실에 마련된 박정희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취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과 의원직 박탈 조치는 부마항쟁 발생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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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 전후로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 내 인권 문제가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한미 갈등'이 고조되었다. 8월에는 YH무역 여성노동자 187명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YH무역 노동자의 농성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김경숙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 위원회는 김경숙이 곤봉과 같은 물체로 머리를 가격 당해 숨졌다는 부검 소견서를 찾아냈다. 진압 과정에서 스물두 살 김경숙은 '타살' 당한 것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 노동자 임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홍구 교수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나뉜 대한민국에서 양자를 모두 겸한 집단이 '여성 노동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산업화의 역군이자 유신체제 붕괴의 실마리를 제공한, 민주화 투쟁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 반드시 다시 쓰여야 한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 운동가들도 아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 당시 민주의 최전선을 지킨 것은 무쇠 팔뚝의 남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가녀린 '공순이'들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된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은 YH무역 여성 노동자의 '농성'을 거쳐, 1979년 부산과 마산 노동자의 '봉기'로 이어졌다. 

10월 7일에는 미국에서 박정희의 치부를 폭로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납치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날으는 돈가스' '공포의 삼겹살'로 불린 김형욱은 박정희 체제에서 가장 오랫동안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형욱은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와 박정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회고록 출간으로 박정희를 곤경에 빠뜨렸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통해 프랑스 파리에서 김형욱을 '제거'했다.

10월 4일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투쟁을 선언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을 변칙적으로 제명하는 사건이 터졌다. 같은 날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대거 검거되었고, 공안 사건으로 발표됐다. 인혁당 사건으로 숨진 8명의 속옷을 모아 만든 '남민전'의 깃발은 그렇게 꺾였다.

'무장 도시 게릴라 사건'으로 발표된 남민전의 총책은 이재문이었다. 이재문은 김근태에 앞서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재문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했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전사'의 길을 걸어간 '시인' 김남주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홍세화는 프랑스로 망명해서 오랜 시간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살았다.

민족문제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임헌영은 1983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재오는 민중당 사무총장을 거쳐 한나라당 최고의원을 지냈다. 교사로 10년 옥고를 치른 이수일은 전교조 위원장이 되었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29명은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10.26의 도화선, 부산마산민주항쟁
 
비상계엄령 선포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와 관련하여 박정희 정권은 1979년 10월 18일 자정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 전날인 10월 17일은 유신 7주년 기념일이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 임방현이 비상계엄령 선포 사실을 기자들에게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임방현은 1970년 12월 10일 박종홍과 함께 대통령 특별보좌관(특보)으로 임명된 바 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친위 쿠데타를 선포하자, 임방현은 박종홍과 함께 ‘10월 유신’으로 부르자고 건의했다.
▲ 비상계엄령 선포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와 관련하여 박정희 정권은 1979년 10월 18일 자정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 전날인 10월 17일은 유신 7주년 기념일이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 임방현이 비상계엄령 선포 사실을 기자들에게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임방현은 1970년 12월 10일 박종홍과 함께 대통령 특별보좌관(특보)으로 임명된 바 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친위 쿠데타를 선포하자, 임방현은 박종홍과 함께 ‘10월 유신’으로 부르자고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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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6일 저녁, 5만여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이 부산시청과 광복동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랫동안 '부마사태'로 불린 부산마산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부산 도심 시위는 17일에도 이어졌다. 시위가 이어지자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계엄 선포 후에도 주변 지역으로 시위가 번지자, 마산과 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됐다. 박정희는 친위 쿠데타인 1972년 유신 이후 7년 만에 또다시 군을 동원했다.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은 학생 위주의 시위였을까? 부마항쟁 과정에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은 1600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학생'보다 '시민'이었다. 박정희가 "식당뽀이와 똘마니들"이라고 말한 시민이 주축이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가 학생뿐 아니라 시민까지 광범위하게 번졌음을 알 수 있다. 부마항쟁은 19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7년 만에 처음으로 발생한 '대중적 반정부 투쟁'이자 1961년 4.19 혁명 이후 두 번째 터진 '민중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 과정에서 "유신철폐"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같은 정치적 구호가 터져 나왔다. 정치적 억압만이 문제였을까? 박정희 정권의 경제 실패가 부마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부산과 마산 지역에는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이 몰려 있었다. 정부가 대기업 위주의 중화학공업 중심 정책을 추진하자, 중소기업은 경제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와 부동산 가격까지 치솟았다. 부가가치세가 도입되자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공화당 위에 재벌 있다." 

재벌이 나라를 쥐락펴락한다는 야당의 비판에 청와대조차 속수무책이었다. 1976년 14.1%, 1977년 12.7%로 정점을 찍었던 경제성장률은 1978년 9.7%, 1979년 6.5%로 급락하다가 1980년에는 -5.2%를 기록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이 시기 경제는 엉망이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칭송받던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부산만 하더라도 1979년 부도율이 전국의 2.4배, 서울의 3.0배로 치솟았다. 마산은 1979년 9월까지 수출 공업단지 24개 업체가 휴업 또는 폐업하면서 6천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979년 당시 최저생계비는 27만7942원이었으나 근로자 월 평균임금은 14만2665원에 불과했다. 생계비조차 벌 수 없는 노동자가 다수였다. 이렇게 누적된 시민의 불만이 부마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한 말처럼 '경제'가 문제였다.

운명의 날, 10월 26일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박정희 대통령 초도 순시를 앞두고 현장 점검에 나선 경호실장 차지철. 박정희가 앉을 자리에 미리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차지철은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경호실을 강력한 권력기관으로 키웠다. 수도경비사령부조차 경호실 휘하에 둘 정도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도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로 청와대 경호실을 거쳐갔다. 혹자는 10.26이 터진 이유를 김재규와 차지철의 충성 경쟁 또는 권력 투쟁으로 꼽기도 한다. 그의 오만함은 주변의 반발을 불러 10.26 직후 박정희를 저격한 사람이 차지철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박정희 대통령 초도 순시를 앞두고 현장 점검에 나선 경호실장 차지철. 박정희가 앉을 자리에 미리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차지철은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경호실을 강력한 권력기관으로 키웠다. 수도경비사령부조차 경호실 휘하에 둘 정도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도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로 청와대 경호실을 거쳐갔다. 혹자는 10.26이 터진 이유를 김재규와 차지철의 충성 경쟁 또는 권력 투쟁으로 꼽기도 한다. 그의 오만함은 주변의 반발을 불러 10.26 직후 박정희를 저격한 사람이 차지철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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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이 터지고 열흘이 지난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술자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권총으로 경호실장 차지철을 먼저 쏜 다음,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명지대 4학년 가수 심수봉의 기타 반주에, 한양대 3학년 모델 신재순이 라나 에 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던 순간이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박정희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순간, 김재규는 32구경 발터(Walther PPK)로 차지철에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쏘았다. 저녁 7시 40분이었다. 두 발을 쏜 후 세 발째 총알이 발사되지 않자, 김재규는 의전과장 박선호로부터 건네받은 38구경 리볼버(Smith & Wesson Model 36 Chiefs Special)로 박정희의 머리를 다시 쏘았다. 

이보다 5년 전인 1974년 8월 15일 영부인 육영수도 문세광이 쏜 리볼버 총탄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최고 권력자 부부가 같은 총기로, 같은 총상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이어온 박정희는 그렇게 죽었고, 10.26을 통해 박정희 체제는 몰락했다. 

박정희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김재규는 왜 박정희와 차지철을 쏘았을까?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각하'라 불리며 중앙정보부장을 넘어서는 위세를 자랑했다. 차지철의 월권과 오만함은 유신체제 상층부에 갈등과 불만을 야기했다. 차지철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와 별도로 대통령에게 따로 '직보'하며 청와대 보고체계를 무너뜨렸다.

박정희 시대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은 훗날 회고록을 통해 이런 '비선'(秘線) 조직의 발호가 국정 혼란과 10.26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역시 최순실이라는 비선 실세를 두었다. 부녀가 모두 비선 조직을 통해 국정 문란을 야기하며, 저격과 탄핵으로 대통령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전례를 남겼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정희 시대 권력자 김종필은 10.26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 경쟁에서 지게 되니까 빵 하고 차(차지철)를 쏘고 뭐가 미우면 뭐도 밉다고 영감(박정희 대통령)까지 쏜 게 10.26이라고 믿는다." 

김종필의 말처럼 10.26은 지배체제 안의 '권력투쟁' 또는 최고 권력자를 죽인 '시해'일까. 아니면 김재규의 주장대로 '의로운 혁명'일까. 10.26을 가까이 지켜본 중앙정보부의 한 국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김재규의 시해 사건은 계획이라고 보기엔 너무 엉터리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엔 너무 치밀합디다." 

산불은 산을 다 태워야 멈춘다 
 
부산대학교 인문관 부산대 본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1956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해서 1957년 9월 공사를 시작, 1959년 10월 완공한 건물이다. 1층은 사람들이 편하게 지날 수 있도록 필로티로 구성했다. 건물이 곡면으로 휘는 부분에 출입구와 중앙 계단, 전면 유리를 배치했다. 중앙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때 유리를 통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전망을 접할 수 있다. 계단실 뒤편으로 모자이크 창을 내서 조형미를 강조했다. 서강대 본관, 제주대 본관과 함께 김중업이 지은 3대 대학 건축물로 꼽힐 곳이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의 지휘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인문관 앞 운동장은 넉넉한터다. 2015년 8월 17일 총장 직선제를 주장하며 본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부산대 고현철 교수의 추모 조형물도 인문관 앞에 있다.
▲ 부산대학교 인문관 부산대 본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1956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해서 1957년 9월 공사를 시작, 1959년 10월 완공한 건물이다. 1층은 사람들이 편하게 지날 수 있도록 필로티로 구성했다. 건물이 곡면으로 휘는 부분에 출입구와 중앙 계단, 전면 유리를 배치했다. 중앙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때 유리를 통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전망을 접할 수 있다. 계단실 뒤편으로 모자이크 창을 내서 조형미를 강조했다. 서강대 본관, 제주대 본관과 함께 김중업이 지은 3대 대학 건축물로 꼽힐 곳이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의 지휘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인문관 앞 운동장은 넉넉한터다. 2015년 8월 17일 총장 직선제를 주장하며 본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부산대 고현철 교수의 추모 조형물도 인문관 앞에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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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이 이어지던 1979년 10월 18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대학교 본관(지금의 인문관)을 방문했다. 당시 부산대학교 본관 2층은 계엄군의 지휘부로 쓰였다. 부산대를 방문한 김재규를 맞은 사람은 총장 박기채다. 

1970년대 부산대 총장은 '어용총장'이라 불릴 만큼 정권 친화적 인물이 연이어 임명되었다. 박정희와 동향에 같은 만주국 출신이었던 신기석은 1973년까지 8년 동안 '최장수 총장'으로 재임했다. 이후 신기석은 공화당 의원이 되어 '교수재임용제'를 발의했다. 부산대 총장 출신 신기석 덕분에(?) 1976년 2월 28일 국공립 및 사립대학 전임강사 이상 교수 416명이 재임용에 탈락해서 대학으로부터 쫓겨났다. 

문교부장관 출신 윤천주는 부산대 총장을 거쳐 서울대 총장으로 '영전'했다. 김종필 시절 중앙정보부가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할 때 윤천주는 정당 기초 강령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서울대 학도호국단 사열식 때 그가 "받들어 총"을 아홉 번 외쳤는데도 학생들이 '무시'했던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윤천주는 서울대 출신으로 서울대 총장이 된 첫 사례였으나 학생들은 그를 총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부마항쟁 때 총장이었던 박기채는 당시 문교부장관인 박찬현의 '친구'였다.

10월 18일 부산에 내려가 부마항쟁을 직접 살펴본 김재규는 일부 불평분자의 '폭동'이 아님을 인식했다. 심각한 사태로 발전할 수 있는, 박정희 지배체제에 대한 '민란'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김재규는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 경제에 희생당한 서민들의 분노'가 부마항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을 직접 둘러본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입니다. 불순세력은 없습니다."

김재규의 상황 인식과 달리, 박정희와 차지철은 부마항쟁을 '탱크로 밀어버릴 사태'로 생각했다. 김재규의 보고를 들은 박정희는 화를 벌컥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장관)나 곽영주(4.19혁명 당시 경무대 경무관)가 발포명령을 내려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총살을 하겠느냐." 

박정희가 이런 말을 내뱉자 동석했던 차지철이 이렇게 맞장구쳤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 인식의 차이는 유신체제 상층부에 심각한 '균열'을 발생시켰다. 균열은 결국 유신체제의 '파국'으로 이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제거'만이 수많은 희생을 피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그는 산을 다 태우기 전에 산불을 멈추고 싶었는지 모른다.

의사인가, 시해자인가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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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의사'(義士)인가, '시해자'(弑害者)인가? 묘하게도 70년 전인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의 총탄에 쓰러진 날도 10월 26일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유신체제의 원흉인 박정희가 모두 10월 26일 총탄에 쓰러졌다. 

같은 날 이토를 쏜 안중근이 한국과 일본에서 극단적 평가를 받는 것처럼, 김재규도 극단적인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10.26 당시 박정희는 62세였고, 별다른 지병이 없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다면 유신체제는 1979년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독재자의 죽음은 또 다른 독재자의 등장으로 이어졌지만,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에 의해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다. 

1967년 장준하는 '삼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 29,999,999명이 대통령 될 자격이 있어도 단 한 사람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 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만큼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50개월 후 '무자격 대통령' 다카키 마사오도 죽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를 쏜 김재규가 '육본'(육군본부)이 아닌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갔으면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여운을 남겼다. 거사 후 궁정동 안가에서 차를 타고 남산으로 향했던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에서 가까운 3.1 고가도로 입구에서 차를 돌려 육본으로 향했다. 차량에 동승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말을 듣고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바꿀 정도로 그는 거사 이후 계획이 치밀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박정희 저격 직전에 부하 박선호와 박흥주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단독으로 거사하다시피 했다. 김재규는 왜 다른 이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고, 그 이후를 도모하지 않았을까?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는 그 이유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다."

거사 과정에서 김재규는 자신이 죽을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 '홀로' 거사했기 때문에 김재규는 박정희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으나 그 때문에 김재규는 박정희 사후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다. '암살'은 단독으로 가능하지만, '혁명'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이 지점이 김재규와 전두환의 차이였다. 전두환은 휘하 병력이 많지 않은 보안사의 수장이었으나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었다. 

10.26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와 3군 사령관 이건영은 김재규가 추천한 사람이고,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김재규의 학교 후배였다. 국방부 장관 노재현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김재규는 비상 상황에서 군을 움직이기 위해 육군본부 벙커로 향했을 것이다. 육본으로 향한 김재규는 국무회의를 위해 옮긴 국방부 청사에서 10월 27일 자정을 넘겨 '체포'되었다. 10월 27일 0시 20분, 김재규의 '10.26 혁명'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남산'과 '육본' 사이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이 쓴 동명 논픽션을 영화화한 작품. 2020년 1월 개봉해서 47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내부자들> <마약왕> 같은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어왔다.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으로 짐작되는 김규평 역은 이병헌이, 박통 역은 이성민이, 차지철로 여겨지는 곽상천 역은 이희준이 연기했다.
▲ 영화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이 쓴 동명 논픽션을 영화화한 작품. 2020년 1월 개봉해서 47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내부자들> <마약왕> 같은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어왔다.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으로 짐작되는 김규평 역은 이병헌이, 박통 역은 이성민이, 차지철로 여겨지는 곽상천 역은 이희준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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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의 상당수는 비상계엄과 위수령이 발동된 부산과 마산에 나가 있었다. 김재규가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서 참모총장을 비롯한 고위 장성을 회유하고, 소집된 국무위원 회의장을 봉쇄한 후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 정국을 주도했을지 모른다. 중앙정보부 물리력만으로 정국을 장악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예측도 있으나, '남산'으로 갔다면 적어도 거사한 지 5시간 만에 체포되진 않았을 것이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발동으로 시작된 '긴조 시대'는 2159일 동안 이어지다가 박정희 사후인 1979년 12월 8일 해제되었다. 긴급조치뿐 아니라 박정희가 집권한 18년 중 10년 동안 계엄령과 위수령, 비상사태가 이어졌다. '비상'이 '일상'처럼 이어지던 시대였다. 

박정희 사후 '서울의 봄'은 '한국의 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점이 아쉽지만 그 책임을 김재규에게 지울 수는 없다. '총성'으로 끝난 그의 '충성' 덕분에 우리는 유신체제를 끝냈으니까. 박정희에게 총탄을 날림으로써 유신체제를 종식시킨 김재규의 역할은 온전히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김재규는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과업에 실패했을 뿐이다."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혁명'을 거듭 주장한 김재규에 대해 어느 대법원 판사는 이런 평을 남기기도 했다. 

"성공하면 혁명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지, 어디 재판정에서 완성되는 혁명이 있느냐?"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김재규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김재규가 유신체제의 일원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 의해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것도 사실이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질서를 안중근이 준비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평가절하할 수 없듯, 박정희 사후 질서를 김재규가 준비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수 없는 건 아닐까.

1979년 12월 15일 제7차 공판에서 김재규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저는 혁명을 성공시켜 놓고 심판받고 있습니다. 재판은 유신의 배경을 가지고 하고 있고, 저는 자유민주주의 배경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습니다. 이 결과는 4-5개월 후 다시 심판을 받으리라, 국민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봅니다." 

'재판정의 심판'이 아닌 '국민의 심판'을 기대한 김재규에게 국민은 어떤 심판을 내렸을까.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이뤄지던 1980년 5월 24일,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뤄지지 않은 김재규의 '유언'
 
김재규와 박선호 철모를 쓴 군인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고, 포승줄에 묶인 채 김재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의전과장 박선호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주요 임무는 한 달에 10회 정도 열리는 대통령의 연회 자리에 여성을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이었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대구 대륜중학교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대륜중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으려 했던 ‘우현서루’의 명맥을 이은 곳이다. 김재규와 박선호 두 사제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 김재규와 박선호 철모를 쓴 군인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고, 포승줄에 묶인 채 김재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의전과장 박선호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주요 임무는 한 달에 10회 정도 열리는 대통령의 연회 자리에 여성을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이었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대구 대륜중학교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대륜중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으려 했던 ‘우현서루’의 명맥을 이은 곳이다. 김재규와 박선호 두 사제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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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 하루 전, 김재규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기쁘게 갑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고 편안히 사십시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김재규가 만끽하라고 했던 자유민주주의도 우리는 누리지 못했다. 1980년 10월 22일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유권자의 95.5%가 참여한 이 투표에서 국민의 91.6%는 신군부의 헌법에 '찬성'했다. 

김재규의 명으로 박선호와 함께 10.26에 가담한 박흥주 대령은 재판 과정에서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했던 중앙정보부장의 비서관이 행당동 달동네 13평 전셋집에 산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자동차도 올라가지 못하는 산동네에 살았던 그의 청빈한 삶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사형이 확정된 후 박흥주는 아내와 두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요. (...) 의연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박흥주의 바람과 달리 우리 사회는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을 철저히 잊고 외면했다. 외면했을 뿐 아니라 박정희를 신봉하고 그 연장선에서 그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기도 했다. 

박흥주 대령은 현역 군인이라는 이유로 1980년 3월 6일 가장 먼저 사형이 집행되었다.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야산에서 그는 총살당했다. 육사 18기의 선두주자로 차기 육군참모총장감으로 꼽혔던 박흥주는 사형장에서 눈가리개를 거부했고, 숨이 끊어진 후에도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10.26 과정에서 총을 쏜 사람 중 총살 당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김재규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부하들이 죽게 되면 언젠가는 함께 묻어주십시오." 

'사육신'처럼 함께 묻히고 같이 제사 지내길 원했던 김재규의 마지막 소망과 달리, 죽음을 무릅쓰고 10.26에 가담한 중앙정보부 6인의 요원은 함께 묻히지 못했다. 김재규는 고향이 아닌 경기도 광주, 박선호는 고양, 박흥주는 포천, 이기주는 양주에 각각 묻혔다. 유성옥과 김태원은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흩날렸다. 

10.26을 함께 한 6인의 합동 추모제는 30주기인 2010년 5월 24일 처음 열렸다. '장군'으로 죽고 싶었던 김재규의 묘비는 1989년에야 세워졌다.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라고 새긴 그의 묘비는 누군가에 의해 '의사'(義士)와 '장군'(將軍) 두 글자가 훼손되었다. 

'서울의 봄'이 '한국의 봄'이 되지 못한 이유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1979년 12.12로부터 1980년 5.17을 거쳐 1980년 9월 1일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그의 권력 장악은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1979년 일어난 ‘왕좌의 게임’에서 권좌를 차지한 이는 전두환이었다. 보안사령관이었던 그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기반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의 권력 탈취로 ‘서울의 봄’은 끝나고 말았다.
▲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1979년 12.12로부터 1980년 5.17을 거쳐 1980년 9월 1일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그의 권력 장악은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1979년 일어난 ‘왕좌의 게임’에서 권좌를 차지한 이는 전두환이었다. 보안사령관이었던 그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기반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의 권력 탈취로 ‘서울의 봄’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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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쓰러진 궁정동 안가는 유신헌법의 초안이 만들어진 곳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궁정동 안가에 판단기획국 김영광 부국장을 팀장으로 5명을 투입해서 유신체제를 준비했다. 암호명은 '풍년사업'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온 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 쥐는 '풍년'의 시작이었지만, 시민 다수에게는 자유의 나락 하나 구경할 수 없는 '흉년'의 출발이었다. 유신헌법을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 중 하나가 김기춘이다. 

중앙정보부 별관이었던 궁정동 안가는 구관을 중심으로 본관(중앙정보부장 집무실)과 가동(신관), 나동(양옥), 다동(한옥)으로 이뤄져 있었다. 10.26 당시 박정희 최후의 만찬이 열린 곳은 대통령 전용 별채인 '나동'이다. 나동은 바닥면적 100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었다.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3년 3월 헐려 '무궁화동산'이라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박정희가 쓰러진 곳은 어디일까? 무궁화동산 북쪽 구부러진 소나무가 있는 곳이 그 자리다. 무궁화동산 공사를 맡은 반도환경개발 이승률 회장은 박정희가 숨을 거둔 자리에 굽은 소나무를 따로 심었다. 유신체제가 '탄생'한 이곳에서 유신체제는 '붕괴'했다. 

박정희가 죽은 다음날인 10월 2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비상계엄사령관이 되었다. 11월 3일에는 박정희에 대한 국장이 치러졌다. 왕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후 대한민국은 왜 '민주사회'로 이행하지 못했을까? '서울의 진정한 봄'은 왜 우리에게 오지 않았을까? 

박정희 체제 몰락 이후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지 못한 이유는 '새로운 독재자' 전두환의 출현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권력도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 유시민의 말이다. 공백 상태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시민 대표인 의회도, 시민사회도 아니었다. '신군부'였다. 10.26 직후인 10월 27일 중앙정보부는 군 보안사령부에 의해 '접수'됐다. 권력의 공백을 틈타 군내 사조직 '하나회' 수장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를 장악한 것이다.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까지 맡으며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일인자인 박정희, 이인자인 차지철과 김재규가 죽거나 체포된 상황에서 일개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어떻게 권력을 '탈취'할 수 있었을까? 당시 국무총리는 최규하였다. 한홍구 교수의 지적처럼 최규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신군부의 쿠데타 성공을 '방조'했다.

12월 6일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12.12 쿠데타'다.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쿠데타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쿠데타에 맞섰던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은 총격을 받고 쓰러졌고, 특전사령관을 지키던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아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대통령을 '제거'하고 또 다른 대통령을 '배출'한 중앙정보부는 전두환 치하에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이름을 바꿨다. 초대 안기부장은 유학성이다.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또다시 이어졌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이름만 바뀌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전역한 박정희 대장은 전역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박정희의 소망(?)과 달리 전두환, 노태우 같은 '불운한 군인'이 이 나라에 연이어 출현했다.

유신시대의 대학
 
박정희의 서울대 시찰 1970년 11월 13일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를 시찰하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전 모습이다. 유신시대 박정희 정권은 실험대학 및 지역대학 강화, 연구기반 조성 사업 같은 여러 대학정책을 추진했다. 서울대학교는 1971년 4월 2일 관악캠퍼스 공사를 시작, 1975년 이전했다.
▲ 박정희의 서울대 시찰 1970년 11월 13일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를 시찰하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전 모습이다. 유신시대 박정희 정권은 실험대학 및 지역대학 강화, 연구기반 조성 사업 같은 여러 대학정책을 추진했다. 서울대학교는 1971년 4월 2일 관악캠퍼스 공사를 시작, 1975년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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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부산과 마산의 대학을 살펴보기 전에, 유신시대 대학 이야기를 해보자. 박정희 시대의 대학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 것은, 이 시대 수립된 대학정책이 한국 대학의 기본 질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유신체제는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비상계엄령 선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시국이 위기 상황임을 강조하면서 대통령을 직선이 아닌 간선으로 뽑고,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지명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의 핵심 내용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삼권분립을 무너뜨리고, 입법권과 사법권까지 장악하는 1인 독재체제의 강화였다. 

바로 한 해 전인 1971년, 박정희 정권은 9월에 대학개혁 정책과 10.15 학원안정화 조치를 연이어 발표했다. 이 조치로 대학생 1889명이 연행당했다. 정부는 연행한 학생 중 175명을 제적시키고, 74개 대학 서클을 해산시켰다. 유신 선포를 앞두고 저항 세력의 싹을 미리 자른 것이다. 

1972년 박정희는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이런 입장을 표명했다. 

"대학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닙니다. 올바른 국가관을 가진 근대 산업사회의 기능 간부와 민족국가의 내일을 지도해나갈 역군을 길러내는 곳입니다." 

대학이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발상을 드러낸 것이다. 1963년 11월 박정희가 연설을 통해 처음 내뱉은 '조국 근대화'의 물결은 캠퍼스에도 몰아쳐, '대학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국가권력은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을 앞세우는 '개발독재'를 표방하면서 대학 근대화까지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졸속 정책이 속출했다. 1962년 군사정부는 대학정비 명목으로 부산대 법대 학생들을 경북대 법정대로 편입시키고, 경북대 문리대에서 폐과된 학생들은 부산대로 보냈다. 충남대와 충북대는 합쳐 '충청대'를 만들었다. 원상복구되긴 했으나 군사정부가 대학을 대상으로 권력의 칼을 어떻게 휘둘렀는지 알 수 있다. 

1966년에는 지역 국립대학을 '불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같은 5개 국립대학교와 제주대, 춘천농대, 충북대 3개 국립단과대학을 1973년까지 민간에 팔아 사립대학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그대로 추진되었다면, 부산대학교는 '국립'이 아닌 '사립'대학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는 정부 주도로 대학 특성화와 실험대학 및 지역대학 강화, 연구기반 조성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중 핵심은 '실험대학'(pilot institute) 정책이었다. 실험대학은 정부가 개혁이 가능한 대학을 선정하고,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다. 정부는 1973년부터 실험대학 정책을 시행하면서 대학 운영을 평가했다. 

실험대학 정책을 앞세워 군사정부는 대학의 교육 내용, 인사뿐 아니라 구체적인 항목까지 관리하기 시작했다. 대학 운영 평가항목 중에는 도서관 이용도와 도서 구입 여부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었다.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를 포함한 10개 대학으로 출발한 실험대학은 1981년 89개 모든 대학으로 확대되었다. 공교롭게 1973년은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해다. 박정희는 농촌을 뜯어 고친 것처럼 대학도 개조하기를 원했다. 

대학이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력양성소'로 바뀜에 따라 대학의 무게중심도 이공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에 따라 이공계 위주로 대학의 정원을 늘렸다. 1965년 대학생은 인문사회계(45.6%)가 자연계(44%)보다 많았지만, 1980년에는 자연계(53.2%) 학생이 인문사회계(32.1%)보다 훨씬 많았다. 인력이 필요한 국가와 학생을 늘려 장사를 하고 싶은 대학, 한국 사회의 뜨거운 교육열이 결합하면서 대학과 대학생은 크게 늘었다.

서울대학교와 충남대학교가 새 캠퍼스로 이전하고, 사립대학이 다투어 지방 캠퍼스를 마련한 것도 이 시기다. 1977년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와 연세대 원주캠퍼스를 시작으로, 1978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동국대 경주캠퍼스, 한양대 안산캠퍼스가 문을 열었다. 1979년에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가, 1980년에는 건국대 충주캠퍼스, 고려대 조치원캠퍼스, 경희대 수원캠퍼스가 조성되었다.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를 통합해 출범한 영남대는 이사회를 통해 박정희를 '교주'(校主)로 모셨다. '박정희 왕립대학'이라 불린 영남대학교는 100만 평 부지에 20층짜리 중앙도서관 신축 계획을 세웠다. 캠퍼스 부지가 여유있는 영남대에 당시로서는 초고층으로 보일 법한 20층 도서관이 세워진 까닭은 뭘까?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경산을 지나던 박정희가 측근에게 "영남대가 어디냐?"라고 물었다. "저쪽입니다. 각하"라고 답하자, 박정희는 "여기서는 안 보이네"라고 한 마디 했다. 각하의 한 마디에 고속도로에서도 잘 보이도록 20층짜리 도서관을 세웠다는 속설이 전한다.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보다 더 높은 도서관을 짓기 위함이었다는 '이설'이 전하나 박정희 지시에 의해 지었다는 점은 같다. '맘모스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캠퍼스를 계획한 영남대는 1980년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이사장으로 모셨다. 

재수생이 크게 늘어 사회 문제가 되자, 1978년 10월 문교부는 대학 입학 정원을 크게 늘렸다. 실업고등전문학교와 초급대학, 간호학교는 '전문대학'으로 바꿨다. 1970년대 전문대 학생 수는 4배 가까이 급속히 늘었다. 산업화와 공업화에 필요한 기술자와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 도서관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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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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