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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밑에서부터 차오른다."

한 때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재난 관련 이야기를 하던 출연자가 했던 말이다. 재난은 대체로 그 사회 내에서 힘없는 계층이 가장 먼저 그리고 더 큰 고통을 경험한다. 1348년, 흑사병의 공포 역시 종교적 광기와 함께 혐오와 배제로 나타났다. 이는 유대인과 같은 이민자나 빈민들처럼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들을 향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혐오를 조장하고 이용했다.

유대인 혐오, 인종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

탈무드에서는 신을 만나는 행위는 신성한 것이기에 평소에 자주 손을 씻는 등 청결한 생활 습관을 강조한다. 덕분에 유대인들의 흑사병 발생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반면 유럽인들의 청결 상태는 심각했다. '비누 밑에 돈을 감추면 절대 찾을 수 없다'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씻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이 사악한 마법을 쓰기 때문에 병이 피해간다고 생각했다.

조선대 사학과 김병용 교수는 과거 유럽의 유대인 혐오를 인종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으로 구분한다. 인종적 차원의 혐오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50?)는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 집단 책임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흑사병이라는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유대인을 속죄양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때마침 유대인이 우물과 하천에 독을 풀었고 이것이 흑사병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는 유대인들을 산채로 불태워 죽일 정도로 광기 어린 학살로 이어졌다. 교황 클레멘스 6세가 공식적으로 이것은 헛소문이라고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실상 방조하다시피 했다. 이렇게 각 지역의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이 상황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조장했다.

이미 1078년 교황이 기독교 국가의 공직에 유대인들의 취업을 금지했고, 1215년 라테란 공의회는 유대인들이 수공업에 종사할 수 없게 했다. 이렇게 사회적 진로가 제한되다 보니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 등으로 몰리게 되었다.

교회에 비해 각국의 제후들은 상대적으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했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뤄야 했던 왕들은 유대인에게 돈을 빌려 전쟁 경비를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 차원의 혐오가 흑사병 이후에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흑사병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유대인으로 향하자 기득권들은 내심 이 상황을 반긴다. 학살되거나 쫓겨난 유대인들에게 빚을 갚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재산을 손쉽게 차지할 수도 있었다. 유대인의 재산은 정부로 귀속되었다가 공매 등을 통해 귀족들이 나누어 가졌다.
 
  흑사병 때 광기어린 학살은 유대인들이 동유럽과 북유럽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 피렌체 유대교 회당  흑사병 때 광기어린 학살은 유대인들이 동유럽과 북유럽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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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금지, 그러나 떠나는 상류층

이후에도 토스카나 지방에는 흑사병이 계속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피해 도시를 떠났다. 여기에 높은 사망률까지 겹쳐져 갈수록 인구는 줄어들었고 경제도 위축되어 도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374년 피렌체 정부는 대피한 사람들이 도시로 복귀하지 않을 경우 무거운 벌금을 물리는 조례를 만들었다. 그리고 1383년 네 번째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는 도시를 떠나는 것을 금지시켰다. 만약 무단으로 떠날 경우 재산을 몰수하고 시민권까지 박탈당할 수 있게 규정을 강화했다.

하지만 상류층에게 이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많은 부자와 귀족들이 정부의 규정을 무시하며 보란 듯이 가장 먼저 도시를 떠났다. 그들에게 벌금은 푼돈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행정과 재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산 몰수나 시민권 상실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다. 기득권층이 저 문을 지나 대피할 때 어떤 이들은 성벽 안에 갇혀야 했다.
▲ 피렌체 성벽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다. 기득권층이 저 문을 지나 대피할 때 어떤 이들은 성벽 안에 갇혀야 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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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들의 이중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만 죽음의 공포 속에서 도시를 지켜야 했고, 당연하게도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여기에 혐오와 배제라는 고통 또한 함께 겪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빈민들의 거주지는 정비가 부족하고 위생 상태가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그리고 당시 흑사병의 원인은 오염된 공기라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그래서 빈민들은 병을 옮기는 집단이 되었고 거주지 전체가 봉쇄되었다. 주민들은 의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의사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방치된 그들은 어떠한 도움도 없이 죽어가야 했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의 시체들을 한 군데 모아 구덩이를 파고 재빨리 묻어 버렸다.

기득권은 이런 소수자 혐오와 빈민 배제에 대한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부추겼다. 대중들의 공포와 분노에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혐오하게 된다.
 
많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의심하였고, 프랑스인이 영국인을 비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사들이 부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만을 보살피자 가난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의심받았다. - 김병용, 2006. <중세 말엽 유럽의 흑사병과 사회적 변화>, 대구사학 제88권 

혐오보다는 연대를, 배제보다는 배려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혐오와 배제를 조장하는 세력과 집단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그 대상과 방법은 예전보다 다양해졌다. 이들은 일반인들의 연대를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혐오하길 바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 대다수의 우리는 혐오보다는 연대를, 배제보다는 배려를 선택하고 있다.
 
연대하는 '우리'는 바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혐오가 자랑스러우신지.(관련기사 : 영국에서 본, 자랑스러운 연대와 부끄러운 혐오) 
 
  구미에서 자가격리 중인 친구가 대전에 사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에게 고맙다며 보내준 사진이다.
▲ 연대와 배려  구미에서 자가격리 중인 친구가 대전에 사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에게 고맙다며 보내준 사진이다.
ⓒ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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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병용(2007) <중세 말엽 유럽의 흑사병과 사회적 변화> (대구사학 88, 159-182)
오성남(2015) <기후변화와 건강 그리고 질명(흑사병 중심으로)> (한국방재학회 15(4))
박흥식(2006)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 (서양중세사연구 제25호)
박흥식(2016) <흑사병은 도시 피렌체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서양사론 제130호)
서울대학교 중세르네상스 연구소 <중세의 죽음> (산처럼)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장지연 옮김,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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