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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별세. 향연 84세
 3월 18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별세. 향연 84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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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로 사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많은 역사 사료를 뒤져 마치 그 역사 속 현장을 사는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었을까요.

때때로 은둔의 장막을 걷었습니다. 그리고 해처럼, 불처럼 앞장섰습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여겼으므로 덮이고 뒤틀린 과거를 들추고 바로잡는 일에 장막을 드리우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고구려역사문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및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등에 시간과 기금을 쾌척했습니다.

사학자 이이화. 3월 18일, 그 어른께서 땅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84세. 20일 저녁,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의 영정 속에서 밝은 미소로 슬픈 인사를 받았습니다.

미소 아래에는 캔맥주가 잔 하나와 나란히 놓였습니다. 은둔의 집필 시 유일한 낙이었던 맥주. 김영희 사모님의 애달픈 배려였습니다. 추서된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영정 속 미소에 화답하는 모습으로 놓였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응일, 응소 두 자녀에게 빈소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집으로 갑니다. 투병을 하시는 동안 영감님께서 식사 한 끼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더운 밥 한 끼 해서 올리려고요."

3월 21일 정오, 장의차가 헤이리의 역사사랑방 앞에 멈추었습니다. 댁 앞 마당에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떠남이 애달픈 분들이 영정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떠남이 애달픈 분들이 영정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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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이 내려졌고 사모님께서 직접 지은 더운 밥 앞에 모셔졌습니다. 맥주도 빠지지 않았고 100여 권의 저술 중에서 10년을 고스란히 바친 22권의 <한국사 이야기>가 놓였습니다.
  
사모님은 병상에서 챙길 수 없었던 마지막 한 끼를 직접 지으신 더운 밥으로 올렸습니다.
 사모님은 병상에서 챙길 수 없었던 마지막 한 끼를 직접 지으신 더운 밥으로 올렸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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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를 마친 영정은 집필실인 '蛟猶明也堂(교유명야당)'를 돌았습니다. 구리시의 아치울에서 2007년 헤이리로 집필실을 옮기신 뒤 13년간 은둔해온 곳입니다. 蛟·猶·明·也는 바로 이이화 선생님이 존경하는 네 분의 함자를 모은 것입니다.

'蛟'는 허균의 호인 교산(蛟山)에서, '猶'는 정약용의 당호인 여유당(與猶堂)에서, '明'은 전봉준의 어릴 적 이름이었던 명숙(明叔)에서, 그리고 '也'는 선생의 선친 호인 야산(也山)에서 취했습니다.
  
영정이 선생님 집필실을 돌았습니다.
 영정이 선생님 집필실을 돌았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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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실은 한옥 창호로 구분한 두 칸입니다. 전실은 좌식 책상으로 후실은 입식 책상입니다. 병원에서 투병하신 지 몇 개월이었지만 방금 자리를 비운 듯 그대로였습니다. 평소 끽연을 즐기셨던 어르신이었지만 담배 냄새 하나 없음이 빈 자리의 시간을 증거했습니다.
  
집필실 위에 걸린 畓雪野中去(답설야중거)
 집필실 위에 걸린 畓雪野中去(답설야중거)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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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이 떠난 집필실 위에는 畓雪野中去(답설야중거)가 판각으로 걸려있습니다. 오래전 사모님께서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서산대사께서 지으시고 후에 백범 선생님의 좌우명으로 인용된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이 오언시의 원작자는 조선 순조 때 학자인 이양연(李亮淵)입니다. 모두 원작자가 잘못 알려진 것이지요."

畓雪野中去(답설야중거) | 눈내린 들길을 걸을 때
不守頀亂行(불수호난행) | 함부로 발걸음 내딛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隨作後人定(수장후인정) |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되리니


노제를 마친 장의 행렬이 다시 길에 올랐습니다. 애도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 어르신이 남긴 발자국을 뒤따랐습니다.
 
장의행렬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장의행렬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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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이이화, #역사사랑방, #교유명야당, #한국사이야기, #국민훈장무궁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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