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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키 키린의 편지> /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음 /현선 옮김
 <키키 키린의 편지> /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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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키린의 편지>(항해)를 읽고 두 번 놀랐다. 일본의 대배우였던 그가 일반인에게 자필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세상의 다양한 풍경을 자신만의 색깔로 읽어내는 통찰력이 두 번째였다.

<키키 키린의 편지>는 키키가 일반인에게 자필로 쓴 편지와 그 사연을 담았다. 키키는 2018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타인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고찰뿐 아니라 인품과 성격이 그대로 묻어있다.

진한 붓글씨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 그의 편지는 길지 않지만 힘이 있고 진심과 핵심이 있다. 그래서인지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음미하게 된다. 그 속에 작은 유머에 눈과 입도 즐거워진다.

왕따를 주제로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써달라는 부탁에 키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건넨다. "한 사람, 한 사람 다르게 태어나니 당연히 차별은 있을 수밖에 없죠. 따돌림은 차이에서 생겨나니까요. 나도 누군가를 따돌렸고 그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없애겠다는 건 끝이 없는 여정일 테죠. 2016년 8월5일 키키 키린." 아래 쓰인 그의 추신을 읽고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 우리 모두 로봇 인간이 된다면, 그건 지루하겠죠?" 왕따가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도 삶의 일부분이라는 이야기를 짧은 유머를 곁들어 곡선을 그리며 이야기할 수 있다니! 키키가 한 성인식에서 세계에서 활동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청년에게 쓴 편지도 그렇다.
 
"먹고 살 게 있어야 예의가 생긴다고는 하지만 가난하다고 부족하다거나, 부자라고 해서 부족하지 않은 건 아니겠죠. 부디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세계를 둘러보시길. (중략) 입소자가 자립하도록 기다리는 거죠. 이런 방식, 일본에서는 힘들겠죠? (중략)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사람의 기력에 더 좋고 꼴깍하고 죽기에도 더 좋을 텐데 말이에요."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팥소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도쿠에를 연기한 키키 기린(오른쪽)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팥소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도쿠에를 연기한 키키 기린(오른쪽)
ⓒ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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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가 떠올랐다. 키키는 도라야키 가게 주인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에게 팥소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도쿠에를 연기했다. 키키와 도쿠에는 닮았다. 가게에서 일하게 된 도쿠에가 "전화번호도 써주세요. 핸드폰도 돼요"라는 센타로의 부탁에 "나는...전화가 없어. 편지로 연락하거든"라고 대답하는 부분만 그런 건 아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키키와 도쿠에의 얼굴은 겹친다. 센타로가 단팥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다고 하자 도쿠에는 "극진히 모셔야 하니까"라고 말한다. "힘들게 와줬으니까, 밭에서 여기까지"라고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팥을 담가둔 떪은 물을 흘려보내고 당을 넣어 휘저은 도쿠에가 의자에 앉았다. "또 기다려요?" "갑자기 끓이는 건 실례잖아. 당과 친해질 동안 기다려줘야지. 그러니까... 맞선 같은 거야. 뒷일은 젊은 남녀에게 맡기면 돼" 편지를 읽어보면 키키의 실제 삶도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키키의 편지에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열려 있는 마음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배운다. 자신의 반성과 겸손함을 섞은 그의 글은 어떤 삶도 의미가 있다는 너그러움을 주며 우리 삶의 방향을 넌지시 제시하기도 한다. 

누구나 삶의 지혜를 갖추고 여유롭고 푸근한 인간이 되고 싶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은 따로 놀기도 한다. 간혹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작은 부딪힘을 목격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키키의 편지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작은 끈이자 희망이 될 수 있겠다. 진심으로 타인을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자세가 살갑다.

키키는 한 성인식에서 개호복지사(한국의 요양복지사) 일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성숙해진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입니다.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만큼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죠. 나 자신만 봐도 잘 알 수 있어요(73세). (중략) 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는 노인이 될 테니, 인생을 배우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겠네요. (중략) 누구에게나 봉사하며 곧은 마음으로 바위를 뚫기를."

키키는 그저 한 명의 배우가 아니라 멋진 사람이었다. 키키처럼 늙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키키 키린의 편지 - 삶을 긍정하는 유연한 어른의 말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은이), 현선 (옮긴이), 항해(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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