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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1876-1914)
 주시경(1876-1914)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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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한글의 연구자ㆍ계몽운동가ㆍ교육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과 여성들이 한글을 쉽게 깨우치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였다.

『가정잡지』에 「국문(國文)」이란 글을 연재할 때이다.

"이 잡지는 아이와 여성을 위주로 하는 것이므로 어쨌던 쉬울 듯 한 것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면서 당시에는 흔치 않은 문답식으로 풀이한다.

국문자를 처음으로 만든 사기(史記)

문 : 국문이란 무엇인가?
답 : 국문이란 것은 곧 언문(諺文)이라 하는 것입니다.

문 : 국문을 누가 처음으로 만들었는가?
답 : 조선 세종대왕이 처음으로 친히 만들었습니다.

문 : 세종대왕은 어떠한 임금인가?
답 : 지극히 어질고 밝아서 나라를 잘 다스려 평안하고 즐겁게 하신 임금입니다.

문 : 세종대왕이 국문을 만들어 언제 발표하였는가?
답 : 세종 28년 병인(丙寅)에 반포하였습니다.

문 : 국문을 반포하시던 해부터 올해까지 몇해나 되었는가?
답 : 461년이 되었습니다.

문 : 우리나라에서 전부터 한문을 배워 쓰는데 세종대왕이 왜 국문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답 : 한문을 낸 지나(支那)와 우리나라는 수토(水土)와 풍기(風氣)와 인종이 같지 않아, 그 글이 우리나라 사람의 성질과 구음(口音)에 합당치 못하고, 그 자획과 규모가 번거하고 어렵습니다. 또, 말 외에 따로 더 공부하는 것이어서 한문은 2, 30년 공부해도 잘 알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글로 하고자 하는 말이 있으나, 그 생각을 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염려하여 어려운 글을 따로 더 배우지 않고라도 익히기 쉽고 쓰기 쉽게 이왕 아는 우리말을 기록하여, 글로 쓸 문자를 음의 분별대로 간략하고도 못 쓰는 말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문 : 국문 만들던 대강 사적(史籍)이 무엇인가?
답 : 세종대왕이 '다른 나라들은 다 각각 문자를 만들어 그 나라 말을 기록하되 홀로 우리나라는 없음'을 염려하고 국문 만들 마을을 대궐 안에 설치하고,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 항 등을 명하여 그 일을 돕게 하며, 한문 옛전자(古篆子) 범자(梵字)를 의방(依倣)하여 자모(字母) 28자를 만들어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였습니다. 이때에 명나라 한림학사 황 찬(黃瓚)이 요동(遼東)에 귀양 와 있는데, 성삼문 등을 보내 황찬을 보고 음운을 질문케 하니 모두 13번이나 요동을 왕래하였고, 『홍무정운(洪武正韻)』 (지금 『규장전운(奎章全韻)』같은 책) 모든 한문글자의 음을 다 국문으로 달았습니다. 성삼문으로 요동을 13번이나 왕래케 한 것은 한문글자 음운을 물어 질정차(質定次)한 것이요, 국문자 만들기를 묻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 : 훈민정음이란 뜻이 무엇인가?
답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음〔表音文字〕이란 뜻입니다.

문 : 국문을 만들지 말게 하던 사람이 누구들인가?
답 : 여러 중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많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석 8)


주석
8> 『가정잡지』, 1ㅡ2호, 1906년 7월 25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가정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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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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