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 09:50최종 업데이트 20.04.0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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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영향이 실로 막대하다. 모든 사람이 외출 시 마스크로 입을 막고 다니며, 재택근무하는 직장인이 크게 늘었다. 아이들은 개학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음주 문화 역시 코로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어서, 집에서 술을 마시는 '홈술족'이 크게 증가했다. 덕분에 편의점 와인 매출이 대폭 상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막강한 코로나19도 나의 생활 패턴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작가인 나는 원래부터 재택근무였다. 번듯한 작업실이나 한적한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의 온기를 느끼며 작업하는 작가도 있겠으나, 그건 통장에 인세 팍팍 꽂히는 사람 얘기일 뿐. 침대에서 빠져나온 아침부터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가는 밤까지 의복의 변화가 없다. 달라지는 것이라고는 허리가 아파서 글 쓰는 자세를 조금씩 바꾸는 정도랄까. 예컨대 몸의 균형을 위해 양반다리 할 때 다리를 포개는 순서를 바꾼다든지.

난 원래부터 홈술, 아니 홈와인이었다. 밖에서 와인 마시면 돈이 엄청 깨지니까. 뭐든 집이 훨씬 싸다. 술 사준다고 나오라는 이도 없다. 고만고만한 사회과학 작가가 뭐 볼 것 있다고 불러내 술을 사주겠는가. 2006년부터 지금까지 작가 생활하며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단절되었다. 작가란 참으로 고독한 직업이다. 나는 일반인이 코로나 사태를 겪을 때나 사는 삶을 진작부터 살고 있었구나.
 

몰리두커 더 복서 쉬라즈 2017 호주 와인인데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쉬라즈 품종으로 만들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최고의 가성비 와인으로 꼽았다. ⓒ 임승수

   
그렇다고 내 삶에 아주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홈와인 생활에 다소 변화가 일어났다. 음주 빈도가 늘어난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는데 지금은 주 2회, 간혹 3회 마시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초등학생 두 딸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애들은 학교에 가고 나와 아내는 집에서 글을 쓸 터다. 아내 역시 몇 권의 책을 썼고 한겨레신문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이라는 칼럼을 연재 중인 작가다.


그런데 요즘엔 온종일 4인 가족이 집에서 징글징글하게 붙어 있다. 진정한 믿음, 소망, 사랑의 종교로 거듭나기 위해 타락한 교회에 반기를 들고 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마르틴 루터조차 자녀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단다.

'너희들이 해놓은 짓을 보고도 내가 너희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거냐?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코로나19 이후 글 생산성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들어갔다. 어찌 맨정신으로 살 수 있겠는가. 와인의 힘을 빌릴 뿐.

둘째 이유는 돈벌이 문제다. 나와 아내는 백수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프리랜서다. 현재 우리 가족의 고정수입은 나의 오마이뉴스 원고료, 아내의 한겨레신문 원고료, 이게 전부다. 대충 계산하면 세금 떼고 대략 한 달에 60만 원 정도다.

기존에 출간한 책의 인세가 간간이 입금되지만 그리 흐뭇한 액수는 아니다. 원고료와 인세 합해봐야 4인 가족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을까? 나와 아내가 저자로서 이런저런 곳에서 강의하고 받은 강연료를 합치면 어느 정도 생계를 유지할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강연이 취소되었다. 이제는 진짜 원고료와 인세가 수입의 전부다. 산 입에 거미줄 쳤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거기서 '아이큐가 고정수입보다 높은 남자 임승수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중학교 때 측정한 아이큐가 156(아니면 154)이었는데 매달 고정수입이 156만 원보다 적으니 그걸 개그 소재로 쓴 것이다. 그때는 고정수입에 간헐적인 강연 수입이 있어서 전체 수입은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강연이 취소되어 전체 수입이 아이큐보다 적을 지경이다. 어찌 맨정신에 살 수 있겠는가. 술이나 까야지.

그러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왜 그렇게 술만 퍼먹느냐고? 예전에 사놓은 와인을 꺼내 마시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19 유행으로 모두가 힘들지만, 알다시피 소상공인, 자영업자, 프리랜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특히나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부부는 가장 타격이 심한 그 업종에 동반 종사하고 있다.

3월 7일 토요일이었다. 애들은 종일 집에서 떠들고 싸운다. 작년에 계약한 책의 원고는 도떼기시장이 된 집구석 탓에 진척이 없다. 수입은 대폭 줄었으나 지출은 꾸준하다. 사회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이 가라앉았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에 권투장갑 낀 캐릭터가 돋보이는 몰리두커 더 복서 쉬라즈(Mollydooker The Boxer Shiraz) 2017을 꺼냈다.
 

몰리두커 더 복서 쉬라즈(Mollydooker The Boxer Shiraz) 2017 ⓒ 고정미

 
호주 와인인데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쉬라즈 품종으로 만들었다. 권투장갑 낀 캐릭터가 뽀빠이를 닮았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최고의 가성비 와인으로 꼽았으며 와인 애호가들이 즐겨 마시는 유명한 와인이다. 물론 호주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오는 순간 퀀텀점프 수준의 가격 상승으로 가성비에서 다소 멀어지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애용하게 된 배달앱에서 오겹살 집을 찾아 주문했다. 함께 배달된 명이나물에 노릿하게 구워진 오겹살 한 점을 올려서 입에 넣었다. 명이나물만큼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잘 잡아주는 놈이 또 있을까.

이제 알코올로 혓바닥을 세척할 차례다. 잔에 담긴 빨갛다 못해 보랏빛까지 느껴지는 진득한 액체를 입에 머금었다. 라벨은 촌스러운 뽀빠이인데 맛과 향은 기똥차구나. 풍미가 엄청나게 강한데도 목에서 넘어가는 느낌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럽다. 아내는 이렇게 향과 맛이 일치하는 와인은 처음이라며 연신 감탄이다.
 

프리랜서 작가 부부의 주말 저녁 밥상 배달 오겹살과 몰리두커 더 복서 덕분에 행복한 토요일을 보낼 수 있었다. ⓒ 임승수

 
인생 뭐 있나 싶다. 술이 맛있으면 그만이지. 아내는 그런 내가 단순해서 편하고 좋단다. 나도 아내가 편하고 좋다. 술 마시면서 아무 말 안 해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관계, 그것이 가족이겠지. 적절히 취기가 올랐다. 애들은 내가 술 마시면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를 꼬드긴다. 오늘은 8살짜리 둘째다.

"아빠, 과자 사러 가자!"
"알았어! 뭐 먹고 싶어?"
"나는 가서 보고 고를게. 언니는 칸쵸. 엄마는 참ing."


아이랑 손잡고 집 앞 편의점으로 이동 중이었다. 마침 맞은편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며 다가온다. 그 남성이 지나가자 둘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아빠, 나 숨 안 쉬었어."
"담배 때문에? 몸에 안 좋으니까?"
"엉. 손으로 코를 막지는 않았어. 혹시 그 사람이 보고 기분 상할까 봐."


별 얘기도 아닌데, 술기운 때문인가? 눈시울이 시큰하다. 잘 컸구나. 오늘 뽀빠이 와인을 안 마셨으면 둘째가 과자 사러 가자고 나를 꼬드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담배 피우는 남성과 마주치지 못해 우리 둘째의 기특한 말을 듣지 못했을 테고, 그 탓에 소중한 기억을 남기지 못했을 것 아닌가. 앞으로 몰리두커 더 복서 쉬라즈를 마실 때면 우리 둘째의 기특한 말이 떠오르겠구나. 역시 술 마시기 잘했다.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가족과 보내는 소소한 시간이 큰 힘이 된다. 꼭 마트까지 안 가더라도 대충 편의점 와인에 배달 음식이면 어떤가. 가족과 즐겁게 먹고 마시면 그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없다. 대한민국 모든 프리랜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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