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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자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위상(上)과 아래하(下) 이 두 글자다. 이 두 글자에서 구름(云), 구름·기운(三·气←氣의 갑골과 본자), 비(雨), 하늘과 비(示), 하늘(天), 받침(丌), 천명(言·帝), 소리·음악(音), 용(龍), 비(霝), 왕(王), 천명(不·否·丕·辛) 세계관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상하 두 글자는 중국과 한반도 고대인의 세계관을 그려내는 데 아주 핵심이 되는 글자라 할 수 있고, 한중일 미술의 기원을 푸는 데도 핵심이 되는 글자라 할 수 있다.

이 연재글은 한중일 최초의 상하(上下) 분석글이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한자 위상과 아래하에 담긴 세계관과 한중일 미술의 기원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기자말

한국미술의 기원은 무엇일까

나는 한국미술사 강의를 나갈 때마다 오늘 인트로를 뭐로 할까, 고민한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데, 미술과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모인 자리이면 내 자신에게 묻고, 또 거기에 모인 독자들에게도 은근슬쩍 물으면서 강의를 시작한다.

"오늘 한국미술 이야기를 들으러 오셨는데요. 저가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다른 게 아니라 한국미술의 기원이 있다면, 그 기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보통 여러 사람들이 불교, 연꽃, 용, 자연미 같은 것을 든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때는 4세기 무렵이다. 고구려는 제17대 소수림왕 2년 372년에,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1년 384년에,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제23대 법흥왕 14년 528년에 국가 종교로 인정한다. 고구려와 신라는 156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것은 그저 팩트일 뿐 이렇게 된 내력이 중요한데, 이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신라는 선진 세계관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것일까. 또는 '무시'한 것일까. 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데, 어쩌면 이것은 뜻밖에도 한국미술사에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 미술사와 통일신라 미술사에서 조금 자세하게 다룰 생각이다.

불교와 연꽃은 4세기 초에서 6세기 초 미술이다. 용도 그 언저리다. 자연미는 좀 다른 개념인데, 이것은 한국미술의 기원이라기보다는 한국미술의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자연미를 든 분에게 다시 묻는다.

"한국미술의 기원을 자연미라 하셨는데요, 그러한 구체 사례를 몇 개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그러면 대개 집을 지을 때 쓰는 구부러진 기둥이나 대들보를 든다. 야나기 무네요시도 한국미술의 자연미를 들 때 이것을 든 것 같다. 그런데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때 쓴 그릇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다. 물론 그런 자연미가 있는 그릇도 있기는 하다. 특히 분청자는 자유분방한 자연미가 넘쳐흐른다. (여기서도 미술사학자가 밝혀야 할 것은 왜 분청자 장인들은 그렇게 자유분방한 디자인과 무늬 패턴을 그렸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고려청자는 그 빛깔부터 차가운 그릇이고, 이 그릇에 쓰인 무늬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테레오타입 패턴이 주를 이룬다. (나는 아무리 멋진 청자를 보더라도 갖고 싶지 않다. 내 그릇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백자도 마찬가지다) 청자를 빚었던 사기장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쩌면 분청자의 자유분방함은 청자 미술의 '억압'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그릇에서도 우리는 엄정한 규칙과 스테레오타입에 얽매인 패턴을 본다. 그 패턴을 벗어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한국미술사는 삼국과 통일신라 그릇에 있는 패턴을 아직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청자도 분청자도 백자도 청화백자도 마찬가지다. 그 디자인 패턴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김해박물관 그릇의 9할은 빗금무늬인데, 우리는 100년도 넘게 그 그릇의 무늬를 '삼각집선문'이라 퉁을 쳐왔다.

과연 빗금무늬를 풀지 못한 채 우리는 가야 사람들의 세계관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그 많은 그릇에 빗금무늬와 동그라미 원무늬(圓圈文원권문)가 있는데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서 우리는 과연 신라 사람들의 세계관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근대 미술사학과 고고학의 연구 풍토가 이렇게 되어 버린 까닭은 무엇보다도 '한국미술의 기원'을 뚜렷하게 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까닭 때문에 나는 이 어려운 이 주제, 한국 신석기미술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북쪽 언덕. 쌍영총(雙楹塚 쌍쌍·기둥영·무덤총)은 말 그대로 천장을 받치고 있는 쌍기둥이 있다 해서 쌍영총이다. 그래서 북학 사학계는 쌍기둥무덤이라 한다.
▲ 도1 고구려 쌍영총 남쪽 천장 벽화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북쪽 언덕. 쌍영총(雙楹塚 쌍쌍·기둥영·무덤총)은 말 그대로 천장을 받치고 있는 쌍기둥이 있다 해서 쌍영총이다. 그래서 북학 사학계는 쌍기둥무덤이라 한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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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학과 고구려벽화

저번 글 '하우저와 야나기 무네요시 그리고 신석기미술'에서도 말했듯이 신석기시대 빗살무늬는 민화에도, 조선 제기에도, 조선 악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조선 장인들이 그 패턴을 그릴 때 그 패턴에 깃들어 있는 '스토리'를 이미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 벽지 디자인을 살펴보면 그 패턴은 거의 다 고구려벽화, 다시 말해 '무덤방' 벽화의 '구름무늬'에서 온 것이다.

도1에서 천장 대들보에 그려진 무늬가 바로 구름(云)무늬다. 하지만 어느 벽지 디자이너도 그것이 고구려벽화 무덤방 구름무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늬는 살아남았지만 그 무늬에 깃든 스토리(story)는 이미 잊힌 것이다. 무늬(또는 미술)의 운명이 원래 그렇다. 마찬가지로 빗살무늬 터틀넥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그 무늬의 기원이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 있다는 것을 추호도 모를 것이며, 또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빗살이 구름(云)과 비(雨)라는 것은 더더욱 모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미술사학자는 그것을 알아봐야 하고 또 반드시 풀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한반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고, 그렇게 조금씩 풀어냈을 때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 한반도 역사를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벽화 구름무늬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 문제만큼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한국미술의 기원 신석기 미술, 신석기 세계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고구려 장인들은 무덤방 벽을 온통 구름무늬로 장식한 것일까. (이것은 그저 '장식'이 아니다!)

이것을 풀지 못하면 우리는 고구려 무덤방 벽화뿐만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의 세계관도 뚜렷하게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이 또한 삼국시대 미술사에서 아주 자세하게 풀어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먼저 말해 두고 싶다. 우리는 지금 고구려벽화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해석하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고구려벽화를 아주 엉뚱한 문제틀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자명하게',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아무 문제의식도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무덤은 죽음을 해결하는 방식

도1은 고구려 쌍기둥무덤 벽화다. 무덤 주인인 듯한 부부가 앉아 있고 양쪽에 노비가 둘씩 시중을 들고 있다. 물론 이 무덤이 부부 합장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또 고구려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이 벽화에 대한 미술사학과 고고학계의 연구 수준이다. 혹 더 깊이 들어간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여기까지', 더 깊이 들어간 연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그림을, 망자가 현세에서 살았던 삶을 펼쳐 그린 그림으로 보는 것과 아니면 내세에 가서도 현세에서처럼 귀족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해석이다. 나는 전자로 보지만(이는 삼국시대 미술사에서 아주 자세히 논할 것이다), 우리 학계는 대체로 후자로 해석하고 있는 듯싶다. (우리는 이렇게 배워 왔다!)

이때 불교와 유교의 세계관이 은근슬쩍 들어온다. 심지어 기독교 '내세관'까지 들어온다. 아니 고구려벽화 관련 글을 읽다 보면 이 두 세계관이 아주 전제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베이스에는 서양 미술사학의 문제틀이 깔려 있다. 이런 해석틀은 너무나 '자명해서' 이미 우리 학계에 '공리(公理)'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불교에도 유교에도 이런 내세관은 없다. 현세에서 귀족으로 살았으니 내세에서도 '똑같이' 귀족으로 살았으면 하는 내세관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내세관은 윤회이고, 유교는 조상신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벽화를 불교와 유교의 세계관으로 보는 것은 전도에 가깝다. 무덤이란 자고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고구려벽화에 담긴 세계관,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이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벽화를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유교와 불교의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것, 것도 자명하게, 아무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하지만 이것은 전도다.

지금 우리 고고학계는 고구려 이전과 또는 고구려 세계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이 무덤을 어떤 형식으로 썼는지, 이것만이 중요하다. 것도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봉토封土, 절석切石, 토총土塚, 수혈식竪穴式, 횡혈식橫穴式, 적석총積石塚)을 써 가면서 무덤을 쓴 방법으로 갈래를 나누고, 편년을 정하고 있다. 무덤을 어떤 방법으로 썼든, 그들이 '죽음'을 어떻게 해결해 왔는가, 이게 더 중요하고 먼저가 아닐까.

태그:#김찬곤, #한국미술의기원, #한자 상하, #위상아래하, #고구려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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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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