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의 언덕>은 오는 23일 개봉에 앞서 지난해 말부터 전국 곳곳 관객을 찾아 직접 만나는 특별한 여정을 진행중이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잠시 중단되긴 했지만 감독과 배우들의 이런 노력은 대형 멀티플렉스 중심인 국내 극장 환경에 가려진 독립영화를 빛나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찌감치 딸을 고아원에 보낸 영분(정은경), 엄마의 생사도 모른 채 자랐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한희(장선)가 우연히 만났다. 공간 배경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태백의 어느 마을이다.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겪은 영분은 딸의 얼굴을 보러 왔음에도 끝내 또다시 버리려 하고, 딸은 그런 엄마를 다 이해한다며 떠나지 말라고 설득한다. 두 사람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처럼 <바람의 언덕>은 기존에 우리가 품고 있는 엄마와 딸에 대한 관념과 편견을 뒤집는다. 엄마지만 엄마이고 싶지 않은 영분과 그런 영분을 어떻게든 품으려 하는 한희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며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을 건드린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경복궁 인근에서 배우 정은경, 장선을 직접 만났다. 두 배우 모두 영화 촬영의 순간들과 그간의 관객 반응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영화를 본 가족들, 의외의 반응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 영화사 삼순

 
영화를 본 관객들은 저마다 영분 혹은 한희 입장에 몰입해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아무리 자신의 삶을 살기로 했다지만 엄마가 어떻게 딸을 버릴 수 있냐며 원망 어린 반응을 보인 관객부터, 그런 두 사람의 선택에 많이 공감하는 관객까지 온도 차가 크고 다양했다. 

"연극에서 엄마 역을 많이 했었음에도 촬영 전까진 나 역시 엄마의 태도를 이해 못했다. 아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끝날까. 박석영 감독님이 영분은 엄마이기 전에 인간이라고 하시더라. 본질을 못 본 거다. 희생, 헌신, 인내하는 엄마의 모습만 떠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반엔 내가 이 작품을 망치면 어쩌나 불안함도 그래서 있었다. 다 찍어 놓고, 관객분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이 영화가 뭔지, 감독님이 그리려 했던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정은경)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되게 담담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전 선배님과 반대로 촬영하면서 뭔가 (장애물에) 부딪혔다랄까. 어떻게 엄마를 원망 한 번 안 하는지. 어떻게 한희는 자신을 참고 견딜 수 있었을지 그런 걸 많이 고민했다. 세상에 그런 딸이 어딨어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영화를 통해 보고 싶다는 감독님 말씀이 힌트가 됐다." (장선)


두 배우 모두 영분과 한희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법한 엄마와 딸의 모습과 꽤 거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상업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된 관성적인 표현에 너무 익숙해진 건 아닌지 의심해가며 연기했다.

그 결과 그 어떤 영화 캐릭터보다 현실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엄마와 딸이 탄생할 수 있었다. 딸을 버린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아냈을 뿐이고, 버림받았던 딸 역시 주어진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을 뿐이다. 두 인물이 화해하거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관객 입장에서 기대할 수 있겠지만 <바람의 언덕>은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영화 <바람의 언덕>의 배우 장선.

영화 <바람의 언덕>의 배우 장선. ⓒ 아워스

 
'모성'의 정체

"언젠가 우리 식구들이 다 같이 이 영화를 보러 왔는데 감상을 얘기 안 해주더라. 일주일이 지나 내가 동생에게 물었다. OCN이나 채널 CGV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친군데 그가 말하길 영화가 재미없다더라. 영화에서만큼은 뭔가 환상이 있어야 하고, 현실과 다른 재미가 있거나 갈등이 해소됐으면 했는데 너무 사실적이라는 이유였다. 친누나인 내 모습도 영화에서 보인다고 그랬는데 전 스스로 영화 속 내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너무 현실적이라 보기 좀 그렇다는 분들에게 이런 사실적 영화도 봐주길 바라는 마음도 솔직히 좀 있었다. 

만약 제가 연기 못하게 되면 단순노동이라도 해볼까 생각했는데 <벼룩시장> 구인 광고를 보면 45세 이상은 뽑지 않더라(웃음). 이미 제 나이는 훌쩍 그 기준을 넘긴 거다. 영화 속 영분 역시 제 나이와 같다. 나름 씩씩하게 안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지 않나 싶다. 자길 좋아해 주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고 헤어질 때 헤어졌다. 신분 상승을 원했거나 안주하려 했으면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또 한희를 두고 왔기에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다는 죄의식 또한 있었을 것이다." (정은경)


"한희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아원에 있다가 입양되기 전 압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더라. 한번 거절당한 아이가 또 선택의 순간에 섰기 때문이다. 스스로 건강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희는 고아원을 나온 후 필라테스를 배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에서 살 자신은 없고 자신과 그래도 (정서적으로) 연결된 태백을 택했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와 함께.

한희 입장에선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한다는 건 스스로가 아픈 일이었다. 어떤 순간엔 엄마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 시간을 지나며 이십 대 후반을 맞이했고, 엄마와의 만남을 자주 상상했을 때 원망보다는 그리움의 마음이 더 컸을 것 같았다. 투정도 부려본 사람이 부릴 줄 안다고. (크게 기뻐하라는) 이름의 뜻처럼 환희는 부정적 표현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시 떠난다는 엄마의 말과 반응에 너무 아프겠지만 용서를 떠나 단지 엄마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장선) 


정은경은 "영화 속 엄마와 딸이 바뀌었다"며 "엄마가 딸 같고, 딸이 엄마 같다"고 표현했다. 바꿔 말하면 <바람의 언덕>은 모성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배우들은 그것을 온몸으로 오롯이 표현한 셈이다. "엄마에 대한 편견, 모녀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이 다들 있을 텐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부모님이 작아진다거나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는 것 같다"고 배우 장선이 생각을 덧붙였다. 
 
 영화 <바람의 언덕>의 배우 정은경.

영화 <바람의 언덕>의 배우 정은경. ⓒ 아워스


삶의 진실 바라보기

기존 관념과 편견에 균열을 내면서 삶의 진실 한 조각을 드러내는 게 독립영화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면 <바람의 언덕>은 매우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해냈다. 어쩌면 상업영화에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연극과 독립영화에서 내공을 다져온 두 사람이기에 표현할 수 있던 정서가 아니었을까.

1996년 첫 무대를 시작으로 정은경은 벌써 20년 넘게 크고 작은 영화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장선 또한 연극 무대를 두루 경험하다 2015년 <소통과 거짓말>을 시작으로 영화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다른 사람보단 좀 늦게 연기를 시작했다. 6년간 경리 일을 하며 직장에 다니다가 극단에 들어갔지. 제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 고등학생 때 우연히 무대를 경험한 게 마음에 크게 남아 있더라. 박수를 받으며 아 나도 잘하는 게 있구나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대하셨고, 어머니 역시 그 무렵 돌아가시며 꿈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좀 잠잠해졌을 때 하기 시작한 거다. 선남선녀가 나오는 영화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연극 역시 제가 키도 작고 그래서 주연은 할 수 없으니 계속 버티며 가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영화도 하게 된 거고." (정은경)

"저도 선배님처럼 고등학생 때 작은 역할을 했는데 기억에 크게 남은 것 같다. 대학에서 연극을 경험하며 큰 재미를 느꼈다. <소통과 거짓말> 감독님도 연극 연출자로 만났었는데 마침 영화를 찍는다 하셨고 제안해주셔서 영화를 시작하게 됐지. 첫 작업 때 기억이 좋았기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 같다." (장선) 


이 대목에서 정은경은 배우를 두고 "하나의 종교와 같다"고 표현했다. "기도하듯, 때론 상처도 받지만 인내하면서 지금까지 무대에 올랐다"는 정은경은 "마흔에 들면서 사람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고, 관심도 생기며 연기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는데 50이 되면서 살짝 무서워지기도 해 다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했다. 

삶을 충실히 살아온 자의 내밀한 고백 아닐까. <바람의 언덕>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영분이 스치듯 만났던 택시기사 준배는 "사람은 그 나이대의 진실 있다"고 괴로워하는 영분에게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솔직한 바람을 드러냈다. 나아가 배우 일만으로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코로나19가 잦아듦과 동시에 <바람의 언덕>의 찾아가는 상영회 또한 다시 이어질 예정이다. 호기심 어린 질문을 품고 두 배우와 감독을 맞이해 보는 건 어떨까. 
 
 영화 <바람의 언덕>의 배우 정은경(좌)과 장선.

영화 <바람의 언덕>의 배우 정은경(좌)과 장선. ⓒ 아워스

 
바람의 언덕 정은경 장선 태백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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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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