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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신뢰 | 스웨덴 의회 연설 | 대통령의말
ⓒ 대한민국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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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을 떠나는 총리는 기차역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있을 때,
그걸 본 역장은 기쁘겠소라는 인사 한마디만을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그 중립국에서는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신동엽, <산문시1> 중 

작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스웨덴 스톡홀름 의회 연설에서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 1>을 인용했다.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한 사람들이 사는, 신동엽 시인이 동경하던 '바로 그 나라'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낭송한 시. 그에 비할 수야 없지만 내게도 신동엽 시인의 시에 얽힌 특별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그날 나는 지각을 했다. 아침 조회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교실에 도착했다. 지각하면 교실 뒤편에 서 있어야 했던 터라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어쩐 일인지 담임 선생님은 나를 앞으로 불러 무언가 적힌 종이를 한 장 주셨다. 지각한 벌이니 시를 외워 조회 마칠 때 반 친구들에게 낭송해주라고 하셨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였다. 선생님은 "오늘은 4‧19혁명 기념일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조회를 마치고 교실을 나가셨다.

2020 총선, 코로나19 속에 치러진 유일한 선거
   
제21대 총선일인 15일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투표소에서 투표하는 모습.
 제21대 총선일인 15일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투표소에서 투표하는 모습.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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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쳤다. 코로나19 사태로 미국·영국·프랑스·뉴질랜드·스리랑카 등 47개국 이상이 선거를 연기한 가운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전국 규모의 선거를 실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지난달 2일, 이스라엘이 전국 단위 총선을 실시한 바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코로나19 확진자는 7명에 불과했다.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미국은 15개 이상 주에서 대선 후보 경선이 연기됐다. 미국 <CNN>은 21대 총선의 투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선거를 연기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는 코로나19 역시 선거를 막지 못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28년 만에 최고 투표율(66.2%)을 기록했다.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일어서는 달.

신동엽, <사월은 갈아엎는 달> 중
민중의 힘으로 지켜내는 민주주의 위기

코로나19와 경제 위기로 전 지구적인 생존 위기를 맞은 이 때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글로벌 거대 기업의 지배, 주식시장과 경제 상호의존성이 뒤섞인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에서 서구 선진국이라고 불리던 나라들의 방역체계와 허술한 의료 시스템은 너무나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탈리아만 해도 예산 부족으로 병상 수를 10년 간 두 배 넘게 줄였고 영국은 코로나19 확산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공공의료 시스템에 대한 패배를 선언했다. 뉴욕에서는 수많은 의료인들이 방호복과 마스크 부족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었다.
방역과 의료 시스템의 붕괴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공공 의료 예산 감축의 결과로 생겨난 결과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차별과 혐오의 정치만을 이어갔고 민주주의는 희미해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레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 지내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신동엽, <봄의 소식>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연대'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창원촛불모임’은 4월 16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창원촛불모임’은 4월 16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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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은 책 <복음의 기쁨>에서 '늙은 노숙인이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건 뉴스가 안 되지만, 주식시장이 단 2포인트라도 떨어지면 뉴스가 된다'며 자본에 함몰된 정치, 인본주의의 붕괴에 대해 비판했다.

16일,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맞았다. '기억·책임·약속'이라는 주제로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한편, 세월호 참사 관련 단체와 유가족이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는 대구 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달 초부터 모금을 시작해 열흘 만에 6천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았고 800개의 손소독제와 마스크 1만여 개를 대구에 사는 감염취약계층과 의료진에게 전달했다.

코로나19 공포가 확산되면서 그간 대구 지역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악성 댓글들이 쏟아졌다. 대다수 대구 시민들은 피해자임에도 가해자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일부 단체와 인사들이 막말과 조롱을 쏟아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기에 대구 사람들의 고통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옆에서 그냥 지켜주셨던 분들이 팽목에서 자원봉사해 주셨던 분들이었다. 국가적인 재난상황에 필요한 건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다"라며 유가족들은 대구 시민들에게 연대와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무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믈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올해로 4‧19혁명 60주년을 맞는다. 신동엽 시인의 바람대로 거짓과 허례허식의 껍데기는 가고 순수한 알맹이만 남았는가? 그의 시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이토록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그가 바라던 '하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적 가치의 회복만이 지금의 인류 위기를 구할 수 있다. 인간과 생태 중심의 공동체 의식 회복. 시작은 바로 4.19 그 미완의 혁명이었다.

태그:#419혁명, #419혁명60주년, #신동엽, #코로나19, #세월호6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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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든 사람이든 평가보다 그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애정을 쏟습니다. 책방 둘러보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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