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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지식인, 혹은 스타들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속에서 진짜 이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어릴 적 꿈과 직장을 구하는 과정, 일터에서의 보람, 힘든 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진솔한 삶을 기록합니다.[기자말]
알바노조 위원장 신정웅씨. 2018년에 '알바노조'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바뀌었고, 신정웅씨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동안 비대위는 2016년에 만들어진 알바노조 맥도날드 분회의 단체 교섭 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2019년 초에 와서야 '알바노조 비대위 맥도날드 분회'가 본사와 교섭 가능한 정상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알바노조 위원장 신정웅씨. 2018년에 "알바노조"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바뀌었고, 신정웅씨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동안 비대위는 2016년에 만들어진 알바노조 맥도날드 분회의 단체 교섭 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2019년 초에 와서야 "알바노조 비대위 맥도날드 분회"가 본사와 교섭 가능한 정상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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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요? 그냥 살면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알바노조 위원장 신정웅.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다.

"제 고향이 마산이에요. 집 근처에 돝섬유원지가 있었죠. 유원지라서 휴가철에 아르바이트생을 많이 뽑았어요. 배 안전 고리 걸고 푸는 일, 오랑우탄 먹이용 바나나 수레 끌기, 낙엽 쓸기 같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청소년 시절 건강한 노동의 추억을 얘기하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대학 진학 후에도 신씨의 아르바이트 이력은 이어졌다.

"더는 미성년자가 아니니까 집에 손을 벌리냐 마느냐 하는 갈등이 생기잖아요. 공부를 아주 잘하면 미래를 위해서라며 손을 벌리겠지만, 전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또 성인이 되고 새로운 소비 영역으로 들어갔으니, 가끔 어머니가 주시는 몇 천 원으론 부족했죠. 친구들 만나면 몇 만 원씩 나가기도 했으니까. (하하) 자연스럽게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신정웅씨는 대학 졸업과 함께 바로 취업했다. 엔지니어인 그가 주로 했던 일은 휴대폰 기지국을 설치하고 광케이블이나 유선 케이블을 까는 일이었다. 경남지역은 정보통신산업이 발달해서 그런 일을 하는 중소기업이 많았다. 일하면서 기술이 쌓이고 평판이 좋아져 스카우트도 되고 수입도 제법 괜찮았다. 1999년에는 KT 전신인 한국통신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간 지 1년 만인 2000년 12월 7일 해고됐다.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 등의 이유로 공기업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한국통신은 그 핵심 대상 사업장이었다. 그래도 그에겐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이나 불만은 없었다. KT를 나와서도 전과 비슷한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부침이 심했다. 일을 그만두고 다음 일자리를 찾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수입 공백을 메우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2014년 7월에는 처음으로 패스트푸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임금은 적었지만, 야간에 1.5배를 받고 주휴수당까지 합치니 그럭저럭 일정한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40대에 몸 쓰는 일을 하다 보니 벅찼다. 그런 그를 같이 일하던 젊은 노동자들이 '삼촌'이라 따르며 많이 도와줬다. 신정웅씨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갚아주고 싶었다.

밥이라도 사줘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SNS에서 최저임금에 대한 글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회사에 출근기가 있는데, 출근 후 바로 찍는 게 아니라 일할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 찍게 되어 있었다. 이 관행은 불합리하고 노동법에도 저촉되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을 고치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국회 최저임금 공청회에서 '알바노조'를 만나다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역에서 가진 합동 시무식에 신정웅씨 (앞에서 두번째 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올해도 변함없이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 2020 전태일 50주기 선포 합동 시무식에 참석한 신정웅씨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역에서 가진 합동 시무식에 신정웅씨 (앞에서 두번째 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올해도 변함없이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 신정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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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그는 인터넷을 통해 국회에서 최저임금 관련 공청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곳을 찾아갔다. 혼자서 처음 가본 공청회였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참석자들에게 미리 준비한 자료집을 나눠주고, 발표자로 나선 전문가들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료집 내용을 그대로 읽었다.

마지막에 청중들에게 '하실 말씀 있으면 손들고 해달라'고 하는 순서가 있었다. 현장의 생생한 고민을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신정웅씨는 답답한 마음에 몇 마디 현장 얘기를 했다. 그렇게 끝나고 나오는데 두 사람이 따라왔다. 그중 한 명은 당시 알바노조 위원장이었다. 이후 신씨는 알바 노조에 가입했다. 하지만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그저 현장 얘기나 들려주는 '삼촌'으로 만족했다.

2016년 겨울에는 알바노조가 맥도날드 분회를 만들었다. 사측과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첫 아르바이트 노조 분회라는 점에서 맥도날드 분회의 의미는 컸다. 2017년 3~4월 단체교섭을 했다. 그때도 신정웅씨는 머릿수만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2017년 하반기부터 주요 쟁점에 대한 이견으로 노조 내부에 갈등이 생겼다. 아르바이트 노동의 특성상 노동조합의 조직도, 노동자의 연대도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2018년에는 많은 이들이 노조를 떠나갔다. 결국 '알바노조'의 존립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어렵게 시작한 맥도날드 단체교섭도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신씨는 생각했다.

'맥도날드와의 단체교섭만큼은 끝까지 가야 한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그가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규약상 비대위원장은 교섭권이 없다고 했다. 내부에 있던 회의록과 규약을 다 제출했다. 맥도날드 본사는 노동부에 이 문제를 문의했고, 2019년 초에 와서야 '알바노조 비대위 맥도날드 분회'가 본사와 교섭 가능한 정상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사실 소상공인의 문제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알바노동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장님보다 매출에 대해 잘 알 수 있어요. 근무시간이 더 기니까요. 단순히 계약을 맺은 사장과 노동자의 갈등 관계라고 생각했던 시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내게 임금을 주는 사람 뒤에 빨대 꽂아 돈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한 거죠. 매일 매일 열심히 일하는데 소상공인도 돈이 없고, 알바 노동자도 돈이 없는 거예요. 그 뒤에 임대료, 프랜차이즈 가맹비, 카드 수수료, 하청을 준 대기업들이 있더라고요. 내가 맥도날드에서 가맹점주를 위해 일한 게 아니라, 맥도날드를 위해 일했는데, 책임은 가맹점주에게 떠넘긴다면 그건 옳지 않죠. 돈 가져가는 사람이 책임도 가져가야 합니다."

'합의'와 '협의'의 사이에서

코로나 19사태로 매출이 줄어들자 다수의 맥도날드 매장은 주 3~40시간씩 일하던 직원들의 노동시간을 15시간 전후로 단축했다.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근무 인원이 절반이 되어, 두 사람이 하던 일을 혼자 해야 하는 상황이다. 4월 들어 매출은 정상으로 회복되었지만, 고용은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임금은 절반으로 줄고 노동강도는 두 배가 되었다. 코로나 19의 영향을 많이 받은 두 달간의 매출 감소를 인건비 감축으로 메꾸고자, 손실을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게 노동 시간은 임금과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이지만, 그동안 회사는 일방적으로 노동시간을 변경해 왔다. 노사가 근로계약서로 약속한 노동시간을 소정근로시간이라 하는데, 이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노사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맥도날드는 근로계약서에 "매주 당사자 간의 사정에 따라 협의를 통해 소정근로시간이 변경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두었다. 

합의를 협의로 바꾸면서, 사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의해 주 단위로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근거를 뒀다.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서 매장에 따라서 위계에 의한 폭언, 폭행, 압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는 임금실태 등 아르바이트 노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노동자로 고용된다는 것은 엄연한 계약 관계이므로 존중받아야 하는데,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청년은 아르바이트 노동을 경험하며 그 기간도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대략 7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대학생의 경우 66.3%가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고(2016년 대학내일 20대 연구소 통계), 41%는 학기 중에도 상시로 아르바이트를 한다(2016년 알바몬). 이렇게 아르바이트는 이미 우리나라 노동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알바천국과 청소년근로권익센터 조사에 의하면 알바생 5명 중 2명이 부당대우를 경험했다. 부당대우의 내용은 최저임금 미준수, 주휴수당 미지급, 폭언·욕설·성희롱, 산업재해 미처리 등등 다양하다.

아르바이트 노동 자체가 단기 고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오래 일한 노동자조차도 자기 일터를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처음 근로계약부터 시작해 일하면서 웬만한 문제가 발생해도 노동자들은 그냥 참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참는 것을 미덕이나 관행으로 보기 때문에 아주 당연한 권리조차도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노동자들이 열악한 상황에 내몰리거나 부당 대우를 받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르바이트 노동자, 부당함에 눈감으면 안 돼

"우리 사회가 불황의 기간이 길다 보니 '스쳐 지나가는 시간'인 아르바이트 노동 기간이 길어지고 있어요. 그러나 사실 하루 중 1/3을 차지하는 시간이고, 인생을 놓고 보면 청춘 시절인 10년 정도를 차지하는 기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저의 노동은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아르바이트로 되돌아왔어요.
 

우리는 평등, 존중, 정의를 배웠는데,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면서는 사회가 그것과는 반대로 돌아가는 것을 봤습니다. 대통령이 잘못해도 처벌을 받는 세상인데,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상시로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이들이 불합리함에 익숙해지고 표현하지 않게 되면, 사회 전반의 역동성에도 저해가 된다고 생각해요. 결과야 어떻든 문제가 있으면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어도 대부분 피하는 분위기는 잘못된 거죠."

일시적으로 수입 공백을 메우려고 뛰어든 '아르바이트'는 신정웅씨의 삶을 바꿨다. 대단한 사명감이 아니라, 자신이 계속하지 않으면 '이 뜻깊은 일'이 지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알바노조 위원장이 된 신정웅씨. 그런 그에게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가끔 전화로 "너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말한다. 가족이 아닌 노조가 1순위인 것에 대해 섭섭함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삶에서 항상 어머니가 최우선이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는 게 어머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아들이 바르고 당당하게 사는 게 어머니께 효도하는 길이 아닐까요? 예전에는 생각나는 대로 살아갔다면,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어요. 살면서 모든 순간이 이럴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내 앞에 지나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피하면 누군가 이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내가 하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아서 하고 있어요. 내가 안 하면 이 문제는 늦어지게 될 테니까요."

태그:#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노조, #알바 노조, #신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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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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