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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법원 판결에 정말 기쁩니다. 아버지가 즉결 처형당했을 때 저는 10살이었어요. 아버지는 심하게 폭행당한 뒤 처형됐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보고 막 울었지요." 

1945~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이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지난 3월 27일 나왔다.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올해 83세의 앤디 몬지는 10세 때인 1947년 네덜란드군이 아버지를 즉결 처형하는 모습을 봤다. 군인들은 몬지씨가 아버지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억지로 보게 했다.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은 네덜란드 정부가 몬지씨에게 1만 유로(한화 약 1326만 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함께 소송한 11명의 피해자들도 123~3634유로(16만~482만 원) 사이의 배상금을 받게 됐다. 처형당한 희생자들은 대개 농부였으며, 소송 당사자들은 희생자들의 자녀 혹은 배우자였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또한 <가디언>은 이들이 받은 고통에 비하면 배상금이 적은 편이란 것을 법원이 인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부터 300여 년간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1945년까지 일본에 점령됐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다. 네덜란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1949년까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며 독립 열망을 억누르려 했다. 

특히 네덜란드군이 '소개작전'이라는 이름으로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 사이에 남 술라웨시를 토벌하고 수많은 인도네시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유명하다. 네덜란드 학자들이 이 시기 희생자 수를 1500명으로 추산하는 반면, 인도네시아는 4만 명으로 보고 있다.

몬지씨의 아버지는 1947년 1월 28일 수파마을에서 마을사람 200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몬지씨는 "네덜란드 법정까지 와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돼서 기쁘다"라고 전했다.

소송을 대리한 리즈베스 제그펠트 변호사는 "기쁜 판결이 나왔지만 판결이 나오기까지 8년이나 걸렸다, 그 사이 원고들은 유명을 달리했다"면서도 "관련자들의 고통과 배상 권리를 네덜란드 법원이 인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국제인권법 전문가인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연구원(법학 박사)은 지난 28일 "1990년대 이후 일본 법원에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중 잔학행위에 대한 소송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 이번 네덜란드 판례나 영국의 케냐 독립전쟁 중 잔학행위에 대한 영국 법원의 판결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라고 밝혔다.

네덜란드 정부는 독립전쟁 당시 민간인 즉결 처형은 인정했지만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후 1968년과 1995년에도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2008년 처음으로 생존자와 유족들이 네덜란드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3년 뒤인 2011년 네덜란드 법원은 네덜란드 정부는 생존자 1명과 유가족 8명 등 9명에게 총 20만 유로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항소하지 않고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2013년 9월에는 사건 발생 64년 만에 공식 사죄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 내에서 식민지 지배 역사 다시 보기와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 반성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났다. 2012년 영국정부가 케냐 식민지배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기로 결정한 점과 2008년 이탈리아 정부가 30년간 식민 통치에 대한 배상으로 리비아에 50억 달러를 보상하기로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지만 이에 대해 남북한 국민이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낸 적은 없었다. 다만 이에 준하는 사례로 일제 말기 강제노동(할당모집·관알선·강제징용령) 및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과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성은커녕 이로 인해 한일 간에 갈등과 일본의 무역보복이 뒤따랐다.

전후 보상정책에서 일본은 대내적으로는 그 대상을 전쟁 중 일본을 위해 복무하거나 동원됐던 일본인으로 제한해 민간인 피해자나 외국인 강제동원자는 제외시켰다. 대외적으론 아시아 각 나라와의 '협정'을 통해 배상을 시행했는데, 배상은 일본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에 따라 금전 지급 대신 생산물, 노역 제공방식으로 시행됐기 때문에 개인보상은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은 오히려 이를 경제적 진출의 기회로 삼았다.

피해자 개인들은 국제인도법 위반에 대한 배상 권리를 규정한 헤이그협약 3조에 의거해 적절한 국제적 혹은 국내적 절차가 마련되면 구제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일본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주장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비롯한 국가간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신희석 박사에 따르면, 일본 스스로가 주장했듯이 이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외교보호권' 포기를 의미할 뿐이므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으며, 일본이 1950년대, 1960년대에 아시아 각국과 맺은 조약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추가보상 요구가 가능하도록 규정돼 있다.

특히 체결 당시 일본의 경제사정을 감안해 적은 배상금을 요구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제 일본 기업과 정부는 금전배상, 원상회복, 재활, 진상조사, 공식사과, 역사교육 등 피해자 보상에 나설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 박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민간인 학살과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법적 책임은 시효가 없고, 과거 식민지배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가해국의 국내 법원에서도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와 무관한 중대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가해국 법원에서 배상 책임을 확인한 판례로서 법적, 역사적 가치가 크며, 향후 다른 잔학행위에 대해서도 인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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