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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의 유명한 산막이길을 가기 위해서는 칠성면 도정리를 꼭 지나야 한다. 그런데 도정리에는 영화 세트장에서나 볼 법한, 약국도 아닌 약방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청인약방'. 간판과 건물 모습에는 강산이 몇 번은 바뀌었을 것 같은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쌓여 있다. 게다가 약방 주변에 널린 바위들은 알고 보니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고 한 아름 넘는 풍채를 자랑하는 약방 옆 느티나무는 200살이 넘은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고인돌과 느티나무, 그리고 청인약방. 너무나 멋진 조화를 이루는 이 풍경은 추억의 영화처럼 한눈에 봐도 오래된 흑백의 이야기가 차고 넘칠 거 같아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60년 넘게 청인약방을 지켜온 신종철(88) 어르신을 만났다. 귀를 쫑긋하고 들은 이야기, 지금 풀어본다.
 
청인약방 전체 모습  6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청인약방. 약방 오른쪽이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며 왼쪽 느티나무는 200년을 훌쩍 넘긴 수령을 자랑하며 이 마을의 수호목처럼 우뚝 서 있다. 약방 앞에는 신종철 어르신의 동반자 자전거가 놓여 있다.
▲ 청인약방 전체 모습  6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청인약방. 약방 오른쪽이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며 왼쪽 느티나무는 200년을 훌쩍 넘긴 수령을 자랑하며 이 마을의 수호목처럼 우뚝 서 있다. 약방 앞에는 신종철 어르신의 동반자 자전거가 놓여 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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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싶은 꿈 대신 배운 일이 평생 직업 되다 

해방되던 해 내가 5학년이었고 괴산군에는 중학교가 딱 하나 있었어. 다음 해 중학교 시험을 봤는데 군 전체에서 2등으로 합격한 거야. 등록금이 5000원이었는데 아침 밥 저녁 죽 먹는 집에서 무슨 학교를 가?

다행히 집안에 양조장 하는 친척이 5000원을 줄 테니 입학시키고 갚으라고 했어. 할머니가 이 돈을 받아서 등록금 내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거여. 급한 대로 등록금 할 돈으로 장례를 치르고 난 중학교에 못 갔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어. 고향 사람이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치과병원을 하고 있었는데 야간 중학교라도 다니려고 그 집에 가서 일했어. 청소도 해주고 기공사 일도 배우면서 치과 간호원 마냥 일했어. 추운 겨울에도 무명옷으로 견디며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얇은 요 한 장 깔고 자며 견뎠어. 청소하다 손이 얼어 터져도 일하면서 공부했어.

치과에서 가까운 선린상업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숭문중학교에 갔어. 서울대 다닌 초등학교 선배가 숭문중에서 선생 노릇을 해서 하도 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숭문중에 다녔지. 근데 차를 타고 가나 걸어가나 1시간이라 걸어서 다녔어. 그렇게 중학 4학년이 됐는데 6·25가 터진 거야. 용산에 군사기지가 있자녀. 폭격이 심했어. 치과병원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길을 잘 알아 그이와 같이 사흘간 걸어서 고향에 내려왔어.

와서 보니 또 할 일이 없잖아. 서울서 치과 하던 그이가 청주에 내려와서 본동 치과라고 차리고 또 일 봐달라 해서 청주서 지냈지. 근데 의사 부인이 계를 해서 월급으로 그 계를 들었는데 그만 계가 파산 난 거야. 내 돈 다 없어지고 원장 부부는 병원도 팔고 떠나 버렸어. 청주서 2년을 헛살았어. 그 돈 모아 의대 가려고 했는데….

근데 또 누가 인천 신포동 안영치과를 알려줬어. 노인 내외가 병원을 봐달라고 해서 가서 일했는데 동생이 군에 가게 돼서 다시 괴산에 내려왔어. 부모 모실 사람이 없어서.

와서 보니 청주 있을 때 치과에 자주 놀러와 나한테 약방 허가를 내주겠다 약을 팔아보라고 했던 양약종상(양약 도매상)이 생각났어. 그때는 돈 모아서 치대든 의대든 갈 생각이어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고향 오니 할 게 없자녀. 청주에 가서 그이를 만나 약방허가를 받았지. 그이가 미리 허가증을 내놨더라구. 그거 갖고 와서 1957년부터 오늘까지 한 게 이거여.

근디 말여. 내가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청인(淸仁)약방'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여. '청주 있는 분이 내가 인천 있을 때 허가증을 내줘서 오늘까지 살고 있다' 이 뜻이란 말이지.
 
청인약방 내부   지금은 조제약이 아닌 비타민 음료와 일반의약품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아주 가끔 손님이 온다. 약방 선반 위쪽에 신 어르신이 마을에서 활동했을 당시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 청인약방 내부   지금은 조제약이 아닌 비타민 음료와 일반의약품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아주 가끔 손님이 온다. 약방 선반 위쪽에 신 어르신이 마을에서 활동했을 당시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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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에 순응하고 살았지…, 어쩌겠나" 

신종철 어르신의 긴긴 세월을 압축한, 청인약방을 열게 되기까지 이야기를 순식간에 홀리듯 들었다. 아무리 지난 이야기라지만 어르신 이야기 속 세월에는 원망이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 공부를 잘했고 의대에 가고 싶었으나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도 원하는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지 뭐…."

다 그렇게 살았다지만 어찌 여한이 없었을까. 운명은 자꾸 그를 의대 대신 약을 다루는 일에 불러들였고 그는 생각지도 못한 약방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그렇게 펼쳐진 신 어르신의 인생 2막은 시대가 몰고 온 강제를 감내하는 터널의 연속이었다.

"약방은 원래 양반집 별당채였어. 8000원을 달라는데 돈이 있어? 근데 이웃 유지들이 집을 사주더라고. 해보라면서. 집 사준 사람이 자유당 책임자였는데 총무 일을 봐달라는 거야. 집까지 사줬는데 고마움에 총무 일을 수락했더니 3.15부정선거에 관여하는 모의를 지서장, 면장, 당이 이 방에서 했어. 그게 들통 나서 4·19 일어나고 5·16 터진 거야."

집까지 사주며 먹고 살고 해준 이가 시킨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시대가 살벌했고 처자식도 지켜야 했다. 결국 그는 칠성면 '재건국민운동촉진회' 회장도 맡았다.

"지역의 가장 신망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며 군사정부니까 나를 시켜버렸어. 유신정권 들어서면서부터는 대의원을 할 수밖에 없었어. 마을에서 신망과 재력이 있고 활동력 있고 충성심 있는 사람이 대의원이 돼야 한다며 나를 시키는 거야. 안 하겠다고 했는데 도지사가 '우리도 맘대로 하는 거 아니고 상부 지시다. 여기 사는 이상, 해야 한다'고 그러는 거야. 살려면 해야지, 어떡해? 신세를 졌으니 그네들이 이야기하는 걸 잘했든 못했든 안 들어줄 수가 없었어…."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돈 얻어달라면 돈 얻어주고 보증 서주고 주례서고 다 했다. 마을의 대소사를 자기 일처럼 봐주니 술 사 먹이는 선거운동 안 해도 신 어르신은 연거푸 세 번이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됐다.

자의 반 타의 반 온갖 감투를 쓰기 시작하며 5·16 후 계몽운동은 물론 대의원 시절 면민들을 상대로 별의별 강연을 수없이 했고 주민들의 관혼상제를 다 챙겼다. 본디 마음도 여린 데다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부탁을 그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신종철 어르신과 일기장  약방 내부 다른 벽 선반에는 그동안 신종철 어르신이 써온 일기장이 가득하다. 어르신이 쓴 일기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부만 약방에 두고 보여주기도 하고 나머지는 집에 보관하고 있다. 계속 일기를 쓰고 있지만 지금은 눈이 어두워 매일 한 일을 대강이나마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 신종철 어르신과 일기장  약방 내부 다른 벽 선반에는 그동안 신종철 어르신이 써온 일기장이 가득하다. 어르신이 쓴 일기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부만 약방에 두고 보여주기도 하고 나머지는 집에 보관하고 있다. 계속 일기를 쓰고 있지만 지금은 눈이 어두워 매일 한 일을 대강이나마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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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만 1700쌍, 생으로 갚은 돈이 10억 넘어 

죽으면 부서(부고장)를 써서 우편으로 부쳐야 하는데 문맹자가 많으니 그걸 봐달라고 와. 한 번에 최소한 100장은 써야 해, 그거 다 우편으로 부치고. 주례만 1700쌍을 섰어. 와서 부탁하면 '아니든 기든 날 찍었겠지' 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농촌이 어려울 때니까 돈 있는 집에 돈 얻어달라고 사정해 차용증서 써주고 알아서 갚으라 했는데 그렇게 얻어준 돈이 지금 돈으로 아마 20억쯤 될 거야. 근데 3분의 1은 안 갚아. 6억쯤 남았는데 갚을 테지 뭐 하고 놔두니까 금방 10억이 되는 거여. 땟거리도 없으니 못 갚고 떠나거나 죽고 그러네.

이러다 나한테 다 돌아오겠길래 청주은행에 재산 담보 잡히고 급한 거 먼저 갚으면서 40년 동안 나눠 갚았어. 이자 단 1원도 안 빠트리고 갚았어. 또 보증 서달래서 도장 찍어주고 그이가 안 갚으면 법원 가압류가 나오니 할 수 없이 갚고 그랬지.

우리 면의 3분의 2는 나한테 오는 거야. 어떻게 너만 안 된다고 하고 해…. 1995년까지 40년 동안 갚았어.

약값도 반은 못 받아. 보리타작 때 한 번, 벼 타작 때 한 번 갚는데 그것도 없으면 못 갚구. 그러면 고만이지. 70년대까지는 외상장부가 있었는데 다 불태웠어.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일을 했었다고 말했는데 내가 죽으면 믿어주겠나 싶어 장부 몇 개만 남겨뒀어. 평생 매일 일기 쓴 것도 남겨뒀어.

사람 죽으면 부서 쓰는 게 가장 힘들었어. 주례도 하려면 지금 마냥 택시 태워줘? 돈 한 푼 줘? 칠성면만은 내가 절대 남한테 받지 않게 해놨거든. 단돈 10원도 받은 적 없어. 한꺼번에 같은 날 5~6명이 들어오면 다른 분에게 대신 부탁하고 답례하고 그랬어. 그래도 절대 나한테는 인사 못 하게 하고 받지도 않았어. 그러다 주례도 90년대부터 싹 끊었지.
 
환하게 웃는 신종철 어르신.  오랜 세월을 거스름 없이 살았고 순응하며 살았다. 자식들이 공부를 잘했는데 신 어르신은 ‘인과응보’라고 말했다. 선을 행하면 선을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을 받는 거라면서. 
“지금은 약방이라기보다 산막이길 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야. 예전 약방 할 때도 여기가 마을 사랑방이었지. 술 안 먹는 사람들의 사랑방, 허허.”
▲ 환하게 웃는 신종철 어르신.  오랜 세월을 거스름 없이 살았고 순응하며 살았다. 자식들이 공부를 잘했는데 신 어르신은 ‘인과응보’라고 말했다. 선을 행하면 선을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을 받는 거라면서. “지금은 약방이라기보다 산막이길 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야. 예전 약방 할 때도 여기가 마을 사랑방이었지. 술 안 먹는 사람들의 사랑방,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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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챙기는 삶, 칠성면 마을주치의로 살아오다 

신종철 어르신은 그렇게 마을의 큰 어르신으로서 대소사를 살피고 어려운 사람들의 숨구멍을 틔워주며 살았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으며. 의지와 상관없이 맡은 감투였지만 기왕 감투 쓰는 거 돈 몇 푼에 인품을 팔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몇십 년간 딱한 이들 돈 얻어주고 보증 서주면서 생으로 생긴 빚을 갚으며 마을 대소사를 자기 일처럼 하기란 쉽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놓인 사람은 누구든 신 어르신을 찾아가 사정했으리라. 그러면 어르신은 누구 하나 안 된다는 말을 못 하고 이리저리 융통해 주고 남은 빚은 평생 자신이 떠안아 갚아나갔다. 차별 없이 도와주고 차라리 어느 한순간 딱 끊음으로써 더 이상의 과용을 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신 어르신이 한결같이 실천한 일은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보듬는 일이었다. 아니 그 일이 가장 우선이었다.

당시 청인약방은 마을에 하나뿐인 약방이었기에 몸에 이상이 생겼다 싶으면 모두 신종철 어르신을 찾았다. 주민들은 가족 중 누가 아파 누워 있으면 무작정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요새처럼 버스가 다니길 하나? 그래서 그런 데를 댕길라구 아예 자전거를 하나 구했단 말여.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니 약을 가져갈 수가 없지. 그 집에 가서 자세히 물어보고 다시 약방에 와서 약을 지어다 갖다 주고 그랬지.

자전거가 없을 때는 10리 20리도 걸어봤어. 칠성면 내는 안 가본 데가 없어. 자전거도 못 가는 산골 오지 20리 길을 걸어간 집도 있어. 그 집에서 점심에 조밥과 나물, 김치랑 귀한 김을 내줬는데 허기가 져서 그랬나, 그 밥이 내 일생에 가장 맛있게 먹은 밥이여."

"어휴, 부인들 젖몸살 난 거 고름 짜주고 나무 속껍질로 심지 만들어 막고 이튿날 짜내고 그런 거 많이 했어. 어린애를 많이 낳으니 계속 젖 물고 있자녀. 젖꼭지가 헐어서 열에 여덟아홉이 젖몸살을 했거든. 젖에 균이 들어가 퉁퉁 붓고 고름이 되면 짜내야 혀."

"또 농부들은 여름에 비가 오거나 말거나 일하는데 먹는 게 시원찮아서 감기 걸리면 급성폐렴이 와. 사나흘 만에 다 죽는데 페니실린으로 다 고쳐줬어. 이제는 다 죽고 옛사람 되고 없네.

지금 자식들은 제 아버지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모르지만 결혼 봐준 놈들도 제 아부지들이 공부시킨다고 돈 얻어다 못 갚고 죽은 거 모를 겨. 왜 그 자식에게 얘기 않냐고? 아버지 빚이지 자식 빚이간? 그리고 몇십 년 전 이야기해서 돈 달라고 하면 안 돼. 칠성면에서 청인약방 약 안 먹은 이가 없는데 나도 (은혜라고 생각하고) 갚아야지."

시골에서 주치의란 말도 생소했을 시대, 신 어르신은 마을 모든 이들이 아프면 언제든 달려가는 주치의였고 힘든 일이 닥치면 누구라도 도와주는 해결사였다. 마을 사람들이 청인약방을 이용하는 자체만으로 그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아와서 그런가, 자식이 셋 있는데 아들 둘은 서울대 가고 딸은 이화여대 졸업했어. 하나같이 공부를 잘했어. 이걸 '인과응보'라고 하지, 행한 대로 받는 거. 내가 잘하면 내가 복 안 받아도 자식들이 받는 거여.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혀."
 
신종철 어르신과 그의 부인 심정옥씨.  청인약방 앞에서 포즈를 부탁했더니 수줍은 듯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금실 좋게 나이 들어가는 노부부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 신종철 어르신과 그의 부인 심정옥씨.  청인약방 앞에서 포즈를 부탁했더니 수줍은 듯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금실 좋게 나이 들어가는 노부부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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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긴 꼭 좀 써 줘…" 

신종철 어르신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화수분처럼 솟아 나왔다. 90년 가까운 세월에 숨은 이야기인 데다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대를 겪은 그 아닌가. 어느 순간 유명세를 타서 언론에서 너나없이 찾아오고 지상파 방송에도 나오며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신 어르신은 여전히 아쉬움이 많다.

"근데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안 나가거나 아주 조금 나왔어. 난 말이지 이 청인약방을 기증하고 싶거든. 200년 넘은 느티나무와 선사시대부터 있던 고인돌과 함께 이 지역을 살아온 청인약방 말야. 나도 죽을 때가 됐자녀. 근데 괴산군에서 미적대고 안 받아주네…."

청인약방엔 우리 근대사를 넘어오며 변형된 주민들의 생활상과 정치사, 시대상, 양약과 약업에 관련한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청인약방에 켜켜이 쌓인 근대문화유적의 가치와 수십 년을 기록한 신 어르신의 장부와 일기, 이것만으로도 보존가치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다시 갖지 못할 보물과도 같은 기록의 보고를, 지자체는 관심이 없는 걸까, 여력이 없는 걸까.

청인약방은 이미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괴산의 명소가 됐다. 그런데 신종철 어르신이 없다면 누가 그렇게 친절하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을까. 신 어르신은 청인약방을 개인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고 싶지 않다. 많은 이들이 지금처럼 다녀가고 괴산군의 자랑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무 때고 들이닥치는 사람들이 신 어르신은 오히려 반갑다. 비타민 음료를 건네며 대화를 주고받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신 어르신의 꿈은 딱 그거 하나 남았다. 유명대학의 부총장이 직접 와서 기증받고 싶다는 제안도 하고 갔다. 그러나 신 어르신은 국가가 자신의 약방을 기증받길 바란다며 유보했다.
 
청인약방과 고인돌과 느티나무, 그리고 신종철 어르신.   정자세로 서 있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평생을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긴긴 세월을 얼마나 감내하고 살았을지 상상이 된다. 신종철 어르신이 원하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 청인약방과 고인돌과 느티나무, 그리고 신종철 어르신.   정자세로 서 있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평생을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긴긴 세월을 얼마나 감내하고 살았을지 상상이 된다. 신종철 어르신이 원하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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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청인약방과 칠성면의 오랜 기록들이 이 안에 다 있는데 너무 아까워. 그리고 내가 저 짝에 땅이 조금 있는데 숲공원 만들고 있거든. 누구든 쉬어가라고. 그것도 함께 기증할 거야. 지금도 습관적으로 일기는 쓰지만 난 이제 눈도 어두워 글을 못 읽어. 귀도 어두워서 크게 말해야 알아들어. 내 또래 다 죽고 몇 남은 이도 아파서 누워 있고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내 소원이야…."

신 어르신은 너무나 간절하게 말했다. 당장 어찌해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어르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그런 말만 입안에서 되뇌다 왔다. 어르신의 따뜻한 친절을 가득 받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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