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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뉴욕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 3월 1일 이후 60일간 뉴욕에서의 일상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뉴욕에서의 사는이야기이지만 그 속에서 느낀 혼란과 소소한 감정들이 어쩌면 모두가 공감할 만한 내용 같아서요.[기자말]
미국 뉴욕 시간으로 5월 6일 기준, 뉴욕시의 코로나 확진자는 18만 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도 2만 명에 달한다. 벌써 두 달이 넘었다. 더는 이 숫자에 놀라지 않는다. 매일 챙겨보던 뉴욕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의 브리핑도 보지 않는다. 보나마나 또 늘었을 것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지만 나아진다는 말의 기준이 하루 확진자가 3천 명일 때란다. 한 자리 수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방심하지 않는 한국의 분위기와 다르다. 5월 중순부터 뉴욕의 경제 재가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종식되기 전에 뉴욕에서 다시 회사를 다녀야 한다. 위험에 노출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도 어김없이 통한다. 분노와 슬픔, 두려움과 걱정이 60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니 희미해진다. 어디에서도 내 인생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는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만 남았다. 60일 동안 뉴욕에서의 소소하지만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매일 조금씩 정리해봤다. 기록은 언제나 의미 있는 법이니까.  
    
미국의 국민노트, 컴포지션 노트에 일기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국민노트, 컴포지션 노트에 일기를 기록하고 있다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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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3월 1일 뉴욕시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 요즘 이상하게 어디에 가도 기침 소리가 들린다. 마트나 도서관에서는 심한 기침하는 사람도 한두 명 있다. 남편의 잔기침이 일주일 전에 시작되었고 나는 속이 꽉 막힌 것처럼 좋지 않다. 

만약 우리가 코로나19에 감염된다면, 뉴욕에서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다. 치료비를 감당할 돈도 만만치 않다. 구급차를 부르기만 해도 200만 원을 내야 한단다. 불안한 마음에 타이레놀을 먹었다. 

태어나서 생존을 위협하는 무언가에 대비한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우선 공책에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적었다. 밥이 되는 것들, 밥을 대체할 것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들, 필수 약품과 화장지.

한국과 뉴욕에서의 생존 준비는 다르다. 화장지 사재기에 대해 고심했다. 화장지가 왜 생존에 필수품인지는 모르겠으나 남들이 하는 대로 아마존으로 주문해 두었다. 마스크와 세정제는 구하지 못했다. 지난 2월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했던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을까 싶어 마트를 돌아다녔지만 그때도 이미 품절이었다.

지금이라도 눈치껏 미리 물건들을 챙겨두는 편이 좋겠다. 화장지 외에 라면 한박스, 쌀, 파스타면, 우유, 계란, 토마토소스, 고기 등을 주문했다. 마스크는 우한에서 만든 게 올 수도 있다고 해서 찝찝하지만 100장에 50달러 짜리가 가장 저렴한 거라 구매했다. 쌀은 4월이 되어야 도착한단다. 쌀 없이 한 달을 버텨야 한다.

3월 5일
 
개의 산책을 위해 집 앞에 나왔는데,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 여러 대가 있다.
▲ 구급차가 즐비한 뉴욕 맨해튼의 동네 개의 산책을 위해 집 앞에 나왔는데,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 여러 대가 있다.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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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작은 동네에 슈퍼확진자가 발생했다. 한 사람이 수십 명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했다. 그는 맨해튼으로 출퇴근하던 변호사라고 한다. 미국은 확진자의 정보나 동선을 공개하지 않는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다.

예외적으로 이들 가족의 정보가 공개됐다. 동선과 이용한 교통수단, 여기에 그들의 이름과 얼굴, 출신 대학까지 기사에 나왔다. 그 중 20대 아들이 우리 동네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며칠 전 근처 피트니스에 가서 운동을 하고 왔는데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가만히 누워서 내 몸에 주의를 기울인다. 폐에서 바이러스의 움직임이 있는 것 같고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도 든다. 남편은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렇다고 자꾸 오바하지 말라고 한다. 점점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에 근접하고 있다. 많이 두렵다. 그저 다들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뉴욕, 뉴저지 셧다운 전에 차를 타고 1시간 거리의 한적한 공원에 다녀왔다.
▲ 리버티 파크에서 바라본 뉴욕  뉴욕, 뉴저지 셧다운 전에 차를 타고 1시간 거리의 한적한 공원에 다녀왔다.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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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아침에 출근했던 남편이 2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건물을 닫았다고 했다. 앞으로 공지가 있을 때까지 재택근무를 한단다. 이미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될 수 있으면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던 터라 언제쯤 재택근무를 시행할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외출을 삼가야 한다. 마스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긴장한 채로 배낭 2개와 캔버스백을 들고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에 갔다. 동양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늘어나서 걱정이다. 마스크를 썼다고 폭행하고, 쓰지 않았다고 폭행한 사례가 있어서 그저 운에 따라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사재기로 인해 텅 비었다
▲ 뉴욕 마트 베이커리 진열대 사재기로 인해 텅 비었다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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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트의 매대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팔리긴 할까', '오래된 건 아닐까' 하고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사던 빵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파스타와 쌀 코너도 마찬가지. 그나마 남아있는 건 비건용이거나 글루텐프리 또는 곡물로 만든 제품들이었다. 

우리 동네 마트엔 한국 제품은 신라면과 불닭볶음면이 입점해있는데 불닭볶음면은 많이 남아 있었다. 너무 매운 건 생존음식에 부적합한가보다. 하나를 집어들었다. 시리얼과 고기류, 야채, 우유, 치즈, 계란, 팬케이크 가루 등을 사고 집에서 보낼 무료한 시간들에 대비해 맥주도 구매했다. 뉴욕에는 술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들이 많은데, 셧다운 전에 와인과 맥주를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늘어섰다는 후문이다.

3월 18일 

그저께 700명이던 확진자가 2500명으로 늘어났다. 밖에 나가지 않으니 하루 종일 집에서 시간을 쓰는 법을 모르겠다. 배가 고픈 것에 따라 일상이 좌우되는 기분이다. 이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집에서 무언가를 집중해서 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시간에서 좋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외부의 상황으로 인해 내 일상이 엉망이 된다면 나중에 많이 아까울 것 같다. 남편은 재택근무로 인해 뉴욕에서 처음으로 몸과 마음의 안정을 얻은 듯 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매일 같이 주방에 가서 요리와 설거지를 분담하고 있다. 오늘은 만두를 빚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삼시세끼 집밥이다.
▲ 뉴욕에서 만두빚기 코로나바이러스로 삼시세끼 집밥이다.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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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일주일 만에 외출을 했다. 1분 거리에 있는 델리(우리나라 편의점과 비슷한 장소)에 갔다. 마스크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아서 알코올이 함유된 휴대용 거즈를 여러개 들고 나왔다. 뭔가를 만질 때마다 수시로 손을 닦았다. 필요한 물건을 샀다. 

델리에서 사면 물건 값이 1.5배는 비싸지만 멀리 가는 것보다 안전하니 온라인배송을 이용하되 정 마트에 가야하면 이곳을 이용하기로 했다. 점원은 마스크도, 장갑도 끼지 않았다. 델리 안에 있던 백인 여성은 비닐 장갑을 꼈고 손수건 마스크를 했다.

주요 식료품을 구매할 땐 아마존 당일배송을 이용하고 있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시킨 물건들이 품절로 인해 오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테이크아웃과 배달만 가능하던 음식점들도 서서히 문을 닫고 있다. 코로나19에 걸리는 것도, 인종간 혐오로 인한 폭행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전부 다 생존과 직결된다. 두렵다.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된다. 

3월 31일

2주 넘게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나쁜 꿈을 자주 꾸었고 1년 만에 위염이 재발했다. 처음으로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개를 한국에 데리고 가는 것이 복잡해서 곧 마음을 접었다. 비상시국인 만큼 개를 비행기 옆 좌석에 태워서 한국으로 데리고 갈 수 있게 해주길 바랐다. 
 
집 앞 1분 산책에도 방긋 웃는 개
▲ 산책 집 앞 1분 산책에도 방긋 웃는 개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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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우선 미국 수의사에게 건강검진 확인서를 받아야한다. 광견병 주사 확인증이나 기타 질병 유무를 확인받은 개만이 무사히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 지금은 동물병원에 가는 것도 꺼려진다. 

간다해도 발급을 받는데만 한 달 넘게 걸린다. 또 비행기에 탈 때 개는 따로 화물칸에 타야한다. 시국이 이런지라 '혹시 화물칸 캐리어나 수화물에 코로나바이러스가 묻어있기라도 하면 어쩌지, 동물도 걸릴 수 있다는데' 걱정이 된다. 

공항과 비행기가 지금으로선 더 위험할 것이다. 뉴욕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린 후 치료를 위해 한국행을 택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종종 본다. 이곳의 열악한 병원 상황을 보면 그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4월 7일

뉴욕에서 쿼런틴(quarantine, 전염병 예방을 위한 자가격리) 생활을 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규칙적인 생활은 하지 않는다. 뉴욕에선 오후 7시마다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빵빠레를 불거나 박수치고 환호하는 것이다.

최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의료진을 향한 응원이자 쿼런틴 생활로 지친 서로를 격려하는 의미이다. 나는 차마 창문을 열지 못했다. 우리집이 동양인이 사는 곳인 게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다. 히스패닉이 많이 사는 동네에 몇 없는 동양인이라 표적이 될까 행동을 조심한다. 커튼 사이로 몰래 밖을 염탐한다.

4월 11일
 
남편의 애플파이
▲ 집에서 만든 케익 남편의 애플파이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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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이다. 생일날 집에만 있기는 처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담이 되는 건 아무래도 동거인일 것이다. 집에서 생일자의 기분을 맞춰야 하니 할 일이 많아진다. 남편은 미역국을 끓이고 어제부터 재워둔 양념소갈비를 구워 아침을 차려주었다. 좋은 곳에서 외식하는 것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그리고 눈물이 날 뻔했는데 케이크를 구하러 나갈 수도 없다보니 그가 난생 처음 애플파이를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에 없던 행복을 발견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확실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지 않고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소중한 경험이 조금은 다른 풍성함을 주지 않을지. 

4월 12일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고 그렇기에 두려운 이 시기에, 나를 지켜줄 국가마저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더구나 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한 곳에 살고 있다. 

평생 뉴욕에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다 정리하고 한국에 가고 싶기도 하다. 동시에 지금 떠난다면 다신 뉴욕에서 살 기회가 없을 것이기에 어찌되었든 남아야한다는 생각도 있다. 이래저래 혼란스럽다. 뉴욕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이 다시 회복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걱정이 깊다. 특히 엄마는 사람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며, 한국이 가장 안전하다고 돌아오라고 성화다. 무뚝뚝한 아빠마저 답답해도 절대 나가지 말라고 웬일로 연락을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과 만든 요리 사진을 보낸다. 부모란 자고로 자식이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안심하는 법이니까.

5분 거리에 있는 우체국에 다녀왔다. 미국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에게 마스크를 조금 보내주기 위해서다.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한 번에 한 명씩 들어가서 우편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 뉴욕 UPS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한 번에 한 명씩 들어가서 우편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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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뉴욕은 좋은 아파트먼트가 아닌 이상 대부분 런드리에서 빨래를 해야 한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땐 빨래를 할 때마다 빨래더미를 짊어지고 런드리에 가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돌아가는 걸 기다렸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가서 건조기에 빨래를 옮긴 후 또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무거운 빨래를 들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 진이 빠지기 일쑤다.

그래도 1년쯤 지나니 나름 기다리는 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빨래방의 평화를 즐기게 되었다. 허나 더는 런드리에 가지 않는다. 누가 확진자인지, 우리 건물에 확진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니까 같은 세탁기를 사용하는 것이 영 찝찝하다.

그래서 손빨래를 한다. 허리도 아프고 물기를 짜느라 팔도 아프다. 오늘은 이불 빨래를 했다. 너무 힘들었다. 담요까지 포함해 6개 이불을 전부 빨았으니 팔이 후들거렸다. 그런 보람도 없이 탈수를 하지 못해 빨래가 하루 종일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마르려나.

4월 20일

겨우 마른 이불에 우리 개가 약간의 오줌을 쌌다. 강아지 시절부터 실수를 한 적이 거의 없어서 녀석이 당황한 것 같다. 어렵게 한 빨래였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우리 개가 아프다. 방광염이 재발한 것 같다. 신장 쪽 문제로 오줌을 제어하지 못한 적이 한 번 있는데 증상이 비슷하다. 

산책을 거의 못하다보니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조금씩 나눠준 것이 원인인 듯하다. 한국에 있는 수의사 선생님이 전화로 조언해주신 대로, 모든 간식을 끊고 사료만 주기로 했다. 지금은 가족들 모두 아프면 안 된다. 최대한 집에 있는 약으로, 잘 먹고 잘 자는 걸로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뉴욕 코로나 쿼런틴 일상
▲ 뉴욕 집에서  뉴욕 코로나 쿼런틴 일상
ⓒ 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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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쿼런틴 40일 차, 이제야 적당한 일상의 속도를 찾았다. 집중해서 할 일을 했고 개와 함께 집 앞에 있는 공원에 잠깐 다녀왔다. 운동을 시작했다. 5월 중순에 뉴욕을 재가동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5월 15일이면 셧다운이 끝나는데 뉴욕시에서 연장하지 않는 한, 남편도 그때부터 다시 출근을 할 것이다.

4월 30일

남편과 집에 계속 붙어있으니까 부부싸움만 늘어간다. 한국에서 코로나이혼이다, 코로나블루다 말이 나올 땐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내가 이 상황을 겪어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2주 정도는 같이 요리한 거 먹으면서 살림하는 맛이 있었는데 그후로는 시들하다.

24시간씩 40일을 집에서 개와 셋이서만 있다보니 대화할 소재도 다 떨어졌다. 대화하지 않고 계속 얼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삭막하다. 내가 원하는 건 다정한 대화가 이어지는 삶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사랑이란, 부부란, 대화란 뭘까.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좀 떨고 싶은 날이다.   

5월 2일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KF94, KF80 등 공적마스크와 면마스크를 바지런히 모아서 뉴욕으로 택배를 보내주었다. 마른 나물과 김, 라면, 과자 등 먹을 것과 집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동대문표 잠옷들이 담겨 있었다. 집에서 한국 마트가 멀어서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갑고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마스크는 다른 물건들과 따로 분리해서 택배를 보내야 한다. 큰 박스 하나, 작은 박스 하나 총 2개가 왔다. 택배비도 따로내야 해서 총 19만 원이 들었다고 했다. 뉴욕의 한국 마트에도 거의 모든 물건들이 있지만 지금 맨해튼에서 한국마트 온라인 배송을 이용하려면 한 달 뒤에야 물건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아무튼 음식이 든든하게 있으니 그나마 힘이 난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뉴욕으로 공적마스크와 먹을 것 등을 잔뜩 보내주었다.
▲ 한국에서 도착한 택배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뉴욕으로 공적마스크와 먹을 것 등을 잔뜩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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셧다운이 아직 풀리기 전이지만 이미 많은 뉴요커들이 센트럴파크로, 브라이언트파크로 나가서 뉴욕의 봄을 즐기고 있다. 뉴욕이 재가동되어도 당분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코로나19도, 인종차별로 인한 폭행도 여전히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오늘도 상상하고 그리워한다. 걸어서 뉴욕의 미술관에 가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배가 고프면 아무 곳에서나 사먹는 값싼 피자의 맛에도 감동하던 그 소소한 일상을.
 
뉴욕 공원에서
 뉴욕 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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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뉴욕코로나, #뉴욕일기, #코로나19, #해외생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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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에 수원에서 태어나 철학과를 졸업했다. 방송작가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SNS 홍보 담당자 및 기획자를 거쳐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로 일했다. 팩트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고 싶어 가끔은 이상한 글로 복잡한 내면을 표현한다. 책 <솔직한 서른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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