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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제어장치가 안 된 열차의 모습이었다.

그의 주변, 그러니까 청와대나 공화당ㆍ유정회는 물론 정부의 각급 기관은 박정희가 운전하는 열차의 객차일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직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5ㆍ16 쿠데타 이후 이미 17~18년차의 1인 집권기에 접어들어서 더욱 안하무인격이고 절제를 몰랐다. 주변에는 기회주의 충성분자들로 가득차고, 권력핵심에는 강경론자들이 포진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온건노선은 점점 설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드러내놓고 김재규를 질시하고 대통령에 접근을 봉쇄하였다.
  
 1978년 12월 28일, 청와대 영빈관 만찬에서 온 국민의 축의에 감사한다며 축배를 들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큰 영애
 1978년 12월 28일, 청와대 영빈관 만찬에서 온 국민의 축의에 감사한다며 축배를 들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큰 영애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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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말에는 두 가지 큰 정치행사가 예정되고 있었다. 12월의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선거다. 대통령 선거는 통대에 의해 체육관에서 한 두 명 들러리 세워놓고 형식상 치르면 되었지만, 문제는 국회의원 선거였다. 이론적으로는 3분의 1의석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1구2인의 중선거구제여서, 공화당과 유정회가 3분의 2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총선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1972년 대통령 선거와 1978년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없는 가운데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국회의원 선거는 2명의 동반 당선을 보장한 중선구제인 데다가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함으로써 국회는 더 이상 민의를 반영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대역전극이 선거를 통해 연출되었다. 1978년 12월 12일에 유신체제가 들어선 이래 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1.1퍼센트 더 많이 득표하였다. 이것은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는 징표로 이해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야당과 '민주세력'들의 반유신투쟁이 강화되어, 1979년 부마항쟁으로 전개되었다. 12ㆍ12사건 후 기울기 시작한 유신독재 권력은 결국 궁정동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주석 1)


잘못된 선거제도로 당선자를 신민당이 3분의 1 의석도 차지하지 못했으나 득표율에서는 1.1퍼센트 앞선 것이다.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짓눌려왔던 국민이 분명한 목소리를 낸 결과였다.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 100선 1978년 남편 김대중이 형집행정지로 가석방 후 동교동 자택에서 뉴욕타임스,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내외신과 기자회견을 했다. 오른쪽이 이희호 여사.
▲ 이희호 여사 생애사진 100선 1978년 남편 김대중이 형집행정지로 가석방 후 동교동 자택에서 뉴욕타임스,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내외신과 기자회견을 했다. 오른쪽이 이희호 여사.
ⓒ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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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취임 이래 정치쪽에는 일정한 선을 그어왔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랬다. 정보기관이나 검ㆍ경과 같은 '수직상'의 체계가 엄격한 권력기관은 수장의 성향에 따라 풍향이 달라진다. 그의 온건노선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예컨대 78년 12ㆍ12총선에선 야당인 신민당이 집권당인 공화당에 비해 득표율에서 1.1%를 앞섰다. 이때 그는 "유정회가 있는데 굳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건의, 이 선거에서 행정기관은 공화당에서 매정하게 생각할 정도로 중립을 지켰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79년 신민당 5ㆍ30 전당대회 때도 '중도통합론'의 이철승 씨 대신 '선명야당론'의 김영삼 씨를 측면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5월 29일 밤 당시 연금중인 김대중 씨의 활동을 방임, 그가 김영삼 측 단합대회에 참석케 함으로써 김영삼 열풍을 일으켜 그 이튿날 전당대회장으로 연결시켰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김재규는 체제의 변화를 위해 박정희에게 간언을 거듭했다고 한다. 예컨대 77년 6월 박정희에게 "직선제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셔도 당선될 수 있습니다"며 직선제를 건의했고, 79년 7월과 8월 "긴급조치 9호는 칼이 너무 녹슬고 무디어졌습니다. 시퍼런 칼을 주십시오"라는 말로 9호의 독소조항을 없애고 규제범위를 훨씬 줄인 10호를 건의했으나 박정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가 보고를 한 다음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은 꾸지람을 듣게 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김재규의 보고는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주석 2)


독재자에게 온건론은 '불충'으로, '강경 = 유능 = 충성'으로 받아들인다. 이승만 곁에서 김창룡이 설쳤듯이 박정희 주변에는 차지철이 2인자 행세를 톡톡히 하고 있었다.

총선에서 신민당의 1.1% 승리는 정국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우선 야당 의원들이 긴급조치의 오랜 무력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5월 30일로 예정된 신민당의 정기전당대회는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동안 박정희는 이철승 신민당 체제를 비호해왔다.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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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와 학생들은 어용야당, 사쿠라 당수라고 야유하고, 당내에서도 선명노선을 바라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뒷날 드러나게 되었지만 차지철은 이철승을 밀었지만, 중정은 과거와는 달리 야당의 전당대회를 방치한 것이다. 그래선지 이변이 일어났다.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었다.

신민당의 김영삼체제 출범은 정계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체제가 등장하자 새로운 공작을 개시했다. 그 하나가 김영삼이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6월 11일의 외신기자클럽 초청연설에서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위해 '김일성과 면담용의'를 표명한 데 대해, 북한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환영담화를 낸 것을 빌미로 삼았다.

김영삼의 이 발언과 관련하여 상이군경과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마포 신민당 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을 폭행하는가 하면, 여당에서도 발언취소를 요구하는 등 이 사건은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다른 하나는 신민당의 일부 비주류 측이 몇 사람의 당원자격에 대한 유권해석을 질의한 데 대해 중앙선관위가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는 자는 정당의 당원이 될 자격이 없고, 선거법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된 후 6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는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다고 유권 해석하여 정계에 새로운 불씨가 되었다.


주석
1>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189쪽, 역사비평사, 2008.
2> 천호영, 「10ㆍ26과 김재규의 진실」, 『말』, 1993년 11월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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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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