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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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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師'를 '스스ᇰ ᄉᆞ', 곧 '스승 사'라고 풀이합니다. 이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 중에는 불교의 사승師僧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수행자가 존경하는 승려를 가리킨다는 것인데요. 이는 불교라는 종교색을 지우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스승'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지식을 파는 노동자를 넘어,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미래 권력'인 양녕에게 스승이란 없었던 모양입니다. 책상머리 공부를 즐기지 않는 양녕의 마음에 들려니, 선생님이 심지어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세자시강원의)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인 김주金稠를 파면하였다......"김주는......강의할 때 아부하고 아첨해서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세자께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꼭 칭찬하여 교만한 태도를 길러주고......세자께서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날마다 50여 편을 외우니, 김주가 '그 뜻을 알면 한 번만 읽더라도 괜찮습니다. 어찌 이처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며 말렸습니다." (태종실록 7년 2월 3일)

세자빈객 이내李來와 변계량卞季良을 경연청經筵聽(임금을 위한 강습 기관)에 호출해,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을 내렸다......"서연의 어리석은 선비들이 '(양녕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쓴말을 하지 못하고, 대간臺諫(현 검찰·감사원·언론기관)도 그렇다. 그대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감히 바른 길로 (세자를) 인도하지 못하는가?"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사헌부司憲府(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에서 상소하였다......"세자빈객 조용趙庸, 변계량......등이 바른 마음씨와 밝은 학문으로써 강의하지 않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무조건 '예 예' 하고, 따라서 세자가 도리가 아닌 길에 빠지게 했습니다." (태종실록 18년 6월 4일)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는 황상黃裳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일이 그야말로 '삶을 바꾼 만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존재의 무게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며 떠나온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를 만나게 된 일이 정약용에게도 '삶을 바꾼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선생님들은 '팔자를 바꾼 만남'을 기대한 모양입니다. 15년간 공고했던 세자라는 양녕의 지위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의 후광을 받아, 그의 맏아들에게서도 공고한 권력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태조-정종-태종에 이를 때까지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임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치 논리로 인해 여러 차례 혈육이 제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태종은 피의 역사를 끊기 위해, 적장자를 세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계자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리라 추측 가능합니다.

양녕의 방탕함 고치고 싶었던 태종의 초강수

하지만 태종의 바람과 달리, 선생님들에게 미래 권력을 훈육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동생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이러한 양상이 양녕의 선생님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양녕 또한 충녕의 지적 우위를 의식하고 때때로 질투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실록 14년 10월 26일)

(충녕과 시 짓기를 주고받으며) 임금이 기뻐서 "세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세자가 예전에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학문과 무예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설령 용맹하지 못하더라도, 큰일에 직면했을 때 큰 의문점을 분별해내는 데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이때에 충녕대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니, 세자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시기하여 여러 번 서연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함으로써 세자를 분발시키고자 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충녕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무슨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태종실록 16년 9월 7일)


선생님들은 충녕의 학습 수준과 태도를 칭찬하며 양녕의 경쟁심을 부추겨 봅니다. 그러나 이 충격요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체로 경쟁자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나의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깎아내려서 위안을 얻는 일명 '정신승리'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충녕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점을 부친 앞에서 불쑥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심지어 선생님이 양녕의 반성문까지 대신 써줍니다. 자기소개서 대필, 수행평가 대행 등을 해주는 요즘의 일부 학원·과외 선생님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세자가 종묘에 아뢰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아뢴 뒤 (개과천선하겠다는)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또 주상께 글을 올렸는데......"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에 올린 맹세와 주상께 올린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고 이미 하늘에 맹세까지 한 바 있건만, 양녕의 비행은 반복됩니다. 여성 스캔들이 잦았던 양녕이 이번에는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성을 궁궐로 몰래 데려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폐세자가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요.
태종은 이번 기회에 양녕의 방탕함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양녕을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내고, 궁중에서 지급하던 양식을 끊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를 둡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집에서 쫓아내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과 비슷할까요?

임금은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

태종의 의중을 파악한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양녕에게, 종묘에 모신 조상들께 반성문을 올림으로써 아버지에게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작성을 양녕은 선생님에게 떠넘깁니다. 양녕도 선생님도 '이번만 무사히 넘기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던 양녕은 또 다시 여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를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세자가 환관 박지생을 보내 직접 쓴 손 편지를 (태종께)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귀중하게 여겨 받아들이십니까?"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고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싶구나."......"이 아이는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 그 말의 기세를 본다면 양녕이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지 복이 될 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서연관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고, 서연에 나오게 하여 잘 성장시켜야 마땅하겠다.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례에 따라 처리하겠다." (태종실록 18년 6월 1일)

의정부議政府(조선 최고 행정기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부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모든 군사를 관할하는 기관), 한양 모든 관청의 관리들이 글을 올려, 세자를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태종실록 18년 6월 2일)


양녕은 '아버지도 여성 편력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만 탓하느냐'고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사안에 대한 이의제기나 불평을 넘어, 현재 권력에 대한 미래 권력의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입니다. 설령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 파급은 국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종이 사사롭게는 양녕에게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 2인자로 정치적 존재가 되어버린 세자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권력을 남용해 국가의 공적 조직이나 조직원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거나, 국정에 개입하려는 사사로운 무리를 방조하여 '비선 실세'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양녕대군,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태종은 후계자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再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1·2차 왕자의 난, 처가인 여흥 민씨 일가의 처단 등과 같은 사건을 통해, 한때 동지였던 혈족 및 친인척을 정치적 혹은 생물적 사망에 이르게 한 바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도 정치적 맥락에서 재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물론, 나라의 여론도 양녕의 편이 아닙니다. 국정 운영에 관여하는 상급·하급 공무원들이 세자의 파면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양녕의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들도 세자 교체를 요청하는 여론에 합류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정과 도리는 비정한 정치 논리와 공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녕의 세자빈객 곧 선생님이었던 변계량은 두 달 후, 세종의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자리를 옮깁니다. 지경연사는 임금이 고전과 동시에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정2품 관직입니다. 세자의 선생님에서 임금의 선생님이 되었으니, 영전榮轉을 한 셈입니다. 그 후 변계량은 약 20년간 국가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형文衡'으로서, 세종의 주요 국정운영 동반자가 됩니다.


양녕대군은 이카로스Īkaros처럼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권력을 재추대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양녕이 왕이 됐으면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불충한 말을 한 향리들, 양녕이 군사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군인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세종이 보호해주어 양녕은 세종보다 장수하지만, 통상적으로 '폐세자=사망'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따르던 제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안연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동양 고전의 교과서 격인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이 사망하자 통곡합니다. 어찌나 비통해 하는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양녕의 선생님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자를 위해 진정 통곡했는지 의문입니다. 정치 논리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제 관계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는 학부모 태종의 학습 방침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녕에 대한 태종의 교육법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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