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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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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단은 항소를 서둘렀다.

1심 때까지 국선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12월 29일 육군교도소로 가서 김재규를 접견할 때, 이제부터는 사선변호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국선변호인으로서 사심없이 변론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했던 터이다.

안 변호사가 10ㆍ26 이후 충격으로 쓰러져 입원 중이던 부인 김영희 씨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제일보고 싶다. 건강에 주의해 달라. 어머니를 잘 돌봐주세요. 동요하지 말고, 의연한 자세로 혁명가 집안답게 살아가세요. 궁색하거나 목숨 구걸하는 추한 꼴을 보이지 말길 바랍니다. 앞으로 더욱더 절약해서 살아 주시오." (주석 3) 라고 부인에게 전해주길 당부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는 또 서빙고분실에서 고문을 받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작성했던 재산 포기서에 포함되었던 딸의 피아노를 제외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이 피아노는 오래 전 외동딸의 생일선물로 사 준것이었다는 것이다.

불교 신자인 김재규는 옥중에서 산복숭아씨로 만든 단주를 만지며 묵상으로 심신을 달래었다. 그리고 접견 온 강신옥 변호사에게 "이 재판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 말고 제 뜻을 이해하고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 변호인을 선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안동일 변호사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제형ㆍ이돈명ㆍ강신옥ㆍ조준희ㆍ홍성우ㆍ황인철ㆍ안동일 등 7명이 항소심 사설변호인단으로 구성되었다.

변호인단은 마감일에 맞춰 항소이유서를 준비하였다. 검찰측이 초고속으로 밀어붙이는 재판 일정을 다소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항소이유서가 법원에 제출되기도 전에 공판기일통지서가 송달되었다. 관례는커녕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는 억지였다. 변호인단은 밤을 세워 122쪽에 달하는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 다음은 그 한 대목이다.

평소 피고인의 성격은 무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가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아호로 지어놓은 것이 '수리(水理)'였던 것처럼, 그는 물 흐르는 이치와 같이 순리적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기를 좋아하였고, 심지어 군인이면서도 살생을 금기로 삼아왔을 정도였습니다. 부하에게 지시할 때도 무리하거나 강경한 자세보다는 설득과 이해의 방법을 택해왔습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한 때는 교편을 잡았고, 시와 서예를 좋아하여 천품은 문관적인 성격이면서도 마음 속에 타고 있는 불덩이 하나 '정의감' 만은 누구보다도 강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10ㆍ26 민주회복 국민혁명을 그만이 결행할 수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이 나라를 구하는 길에 10ㆍ26 혁명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이 있다면 제시해보라, 만약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입을 다물고 죽겠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조용히 산복숭아씨로 만든 단주를 왼손에 쥐고 관세음보살을 음미하면서 성불(成佛)의 경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직 이 나라 이 민족의 먼 장래를 가늠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꽃이 피고 열매 맺기를 기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을 안은 채 그 자신 희생되어도 영생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주석 4)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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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자신의 거사가 권력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주회복에 있었음을 알리고자 했다. 1979년 11월 30일 변호인 접견 때 "10ㆍ26 민주회복 국민혁명지도자 김재규"의 이름으로 「나와 자유」란 시를 지어 어머니에게 전해 달라고 한 데서도 '민주회복'의 의도가 담겼다.

       나와 자유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나 내 목숨 하나 바쳐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나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민주주의 회복하였네
 나 사랑하는 3,700만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 주었네 만세만세 만만세
 10ㆍ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10ㆍ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10ㆍ26 민주회복 국민혁명 지도자 김재규. (주석 5)


주석
3> 안동일, 앞의 책, 318쪽.
4> 문영심,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266~267쪽, 재인용, 시사인북, 2013.
5>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장군 명예획복 추진위원회,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200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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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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