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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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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에 대한 군사재판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시점에 전두환 세력은 정권탈취를 기도하고, 외형상으로는 12월 6일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독 입후보하여 제10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무리 과도정부라 할지라도 최규하 정부가 순탄할 리 없었다. 유신체제의 구심이 사라진 마당이어서 공화당이나 유정희는 정치적 기능이 상실된 '불임정당'일 뿐이고, 최규하가 당선된 지 1주일도 안 돼 12ㆍ12 군하극상 사태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권력의 실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서 최규하는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과도정부의 기간을 예상보다 훨씬 늘려 잡았다. 최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3김'을 비롯한 여야 정당과 제야인사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최규하는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했다.

재야 세력과 일부 정치인들은 1979년 11월 24일 명동 YMCA에서 '통일주체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최규하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했으며, 신민당도 과도정부의 정치일정에 반발하고 나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도정부가 정부 주도의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자체의 정치기반 없이 신군부의 등에 업힌 꼴인 최규하 대통령으로서는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제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들은 정치 일정의 단축과 유신잔재 청산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로 대표되는 정치 집단에서는 각기 이해가 엇갈린 상태에서 마찰을 빚어 정국은 날로 혼란이 확산되었다.  
 
 1979년 11월7일 밧줄에 묶인 김 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1979년 11월7일 밧줄에 묶인 김 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 80보도사진연감<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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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세력은 이런 분위기를 연출 또는 조장하면서 김재규 재판을 서둘렀다. 10ㆍ26거사로 '서울의 봄'을 맞은 여야 정당은 막상 유신체제의 핵을 제거한 당사자의 재판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차기집권에 대해서만 동분서주하는 형국이였다. 재야세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10ㆍ26거사의 마지막 심판인 상고심을 1980년 5월 20일 열기로 하였다. 이 날짜는 정략적으로 잡혀진 것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새벽 쿠데타를 일으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 선포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ㆍ출판ㆍ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조치를 취했다.

이에 앞서 김대중ㆍ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합동수사본부가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하는 등 일대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 국회도 계엄군이 동원되어 봉쇄하였다. 18일 오전 광주에서는 전남대생들이 계엄해제와 전두환 구속 등을 요구하며 계엄군에 맞섰다. 광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신군부가 예비한 시나리오대로 쿠데타 3일 뒤, 2심선고 113일 만에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김재규 등의 상고심 재판이 열렸다. 내외의 관심은 쿠데타 실세들이 연출한 계엄령 전국확대라는 정치드라마에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 주심 유태흥ㆍ주재황ㆍ양병호ㆍ임항준ㆍ안병수ㆍ김윤행ㆍ이일규ㆍ김용철ㆍ정태원ㆍ서윤홍 대법원판사였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원판사 중 민문기ㆍ한환진ㆍ나길조는 해외 출장으로 선고 공판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사들은 하나 같이 유신정권에서 임명된 대법관들이다. 8명의 피고인 중 박흥수는 현역신분이어서 단심으로 사형이 확정되고, 7명만이 상고심을 받게 되었다.

선고공판은 김재규 등 7명의 피고인은 출정시키지 않고, 피고인의 가족 11명과 보도진, 기관원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오 10시 8분,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의 개정선언으로 막이 올랐다.

재판장은 판결 주문을 말하기 전에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이 제출한 「상고이유서」의 주장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에 앞서 이돈명 변호사가 골격을 쓰고 변호인단이 수 차례에 걸쳐 다듬은 173쪽의 「상고이유서」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상고심에서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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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심의 「상고이유서」중 공판 절차상의 위법과 양형의 부당성 관련을 집필했던 안동일 변호사가 정리한 '머리말'을 소개한다.

머리말

1) 무릇 한 나라 한 민족의 흥망성쇠의 계기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대소사건의 진실한 모습과 참된 원인을 밝혀내고 그 사건 결과로 파급되는 모든 현상을 바르게 파악하여 그 사건에 내리는 올바른 가치 판단을 발전적 계기로 삼는 역량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인류사, 민족사뿐 아니라 나라 안의 입법, 사법 등 각 분야별로 좁혀보아도 타당하고, 작게는 한 개인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임에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그런데 현행 헌정 체제 아래서 국가 권력의 핵을 맡고 있는 현직 대통령을 현직 중앙정보부장이 살해한 이 사건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정치사에서도 몇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중대한 도전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도전에 대응하는 응전으로서의 이 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이 나라의 사법사와 이 겨레의 발전사에 미치는 영향의 파고(波高)와 진폭은 매우 큰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3)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 임했던 우리 변호인들은 제1심 개정 벽두에 모두발언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러한 취지로 공정한 결론과 적법한 절차의 준수를 힘주어 당부하면서 다 같이 영광스러운 역사의 주인이 되자고 한 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변호인들의 이러한 소망은 불행하게도 아홉 가지 상고이유의 점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절차나 내용이나 결론 할것 없이 비참하리만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대법원에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분야가 혼미하고 불투명하여 진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민족의 위험스러운 현실 타개에 보탬이 될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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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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