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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대회(1985. 1. 18.)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대회(198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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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김영삼 총재에 대한 총재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폭거는 국내외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그 여파는 일파만파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부산과 마산에서 대학생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박 정권은 그해(1979년)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시위는 확산돼 사태가 전차 심각해질 즈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쏘는 10.26사태로 유신 정권은 그 막을 내렸다. 

김재규의 총탄으로 유신 정권은 조종을 울렸다. 하지만 대한민국 권력은 여전히 군부가 쥐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유신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11월 10일 시국 수습 특별단화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현행(유신) 헌법에 따라 10대 대통령을 뽑고, 거기서 뽑은 대통령이 새 헌법을 마련한 뒤에 새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요지였다.

김영삼은 11월 22일 최규하를 만나 시간을 끌다가 사회 혼란을 불러온다는 항의를 했다. 이에 최규하는 별 다른 조치 없이 꾸물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회원의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5.17 비상계엄 확대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당시 정계 거물들을 교도소에 가두거나 가택연금으로 묶었다. 이에 광주시민들이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전두환 신군부를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해 8월 21일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했다.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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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산악회

그해 8월 27일 통일주체대의원에서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김영삼은 전두환 정권의 강요로 그해 10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듬해(1981년) 5월 가택연금이 풀리자 야당 동지들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조직했다.

1981년 6월 9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민주산악회가 결성됐다. 이민우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민주산악회는 겉으로는 등산모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단체였다. 산을 오른 김영삼의 말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올 때 저는 인생을 생각합니다.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어요. 권력이나 정권도, 운명도 이 법칙을 어길 수 없습니다."

1982년 4월 12일자 <뉴욕타임스>는 민주산악회의 산행 모습을 "정치 활동이 금지된 한국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로 알렸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은 이 기사를 꼬투리로 잡아 그를 다시 자택에 연금시켰다.
  
 김영삼 단식 장면
 김영삼 단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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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간의 단식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단식에 들어가기 전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지금 상도동에 있는 내 집 울타리 안에 연금되어 있습니다. ... 당국이 파견한 경찰들이 물샐 틈 없이 내 집을 포위하고 집 안에서의 내 동태까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내 집은 창살이 없을 뿐, 나를 가두고 있는 감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국민 여러분께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성명은 원고지 70매 분량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그는 이 성명에서 첫째 구속인사의 전원 석방과 전면 해금, 둘째 해직교수 및 근로자·제적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셋째 언론자유 보장, 넷째 개헌 및 국보위 제정 법률의 개폐 등을 요구했다.
  
 평생 동지요,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평생 동지요,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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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단식을 계기로 전 신민당과 통일당 소속의원 23명과 원외 인사 등이 민주국민협의회를 조직해 시국상황을 대처해 나갔다. 이 민주국민협의회가 민주화추진협의회의 모태가 됐다.

그해 6월 10일 김영삼의 23일간 단식투쟁이 끝냈다. 그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반정부투쟁을 효율적인 투쟁 방안으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민주화투쟁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는 부제가 달린 '김대중-김영삼 8.15 공동선언>을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신민당 헌법개정추진위원회 부산시지부 현판식(왼쪽부터 김영삼, 이민우, 이기택, 문정수)
 신민당 헌법개정추진위원회 부산시지부 현판식(왼쪽부터 김영삼, 이민우, 이기택, 문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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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돌풍
 
"… 1980년 봄, 온 국민이 한결같이 열망하던 민주회의 길에서 우리는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서 하나로 되는 데 실패함으로써 수백수천의 민주 국민이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고, 계속 국민의 다수 수난이 연속됨은 물론, 민주화의 길을 더욱 멀게 한 사태를 막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면할 길 없습니다.

이제 국민 앞에서 자책과 참회의 뜻에서, 그리고 온 국민 앞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은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하나가 되어 손잡고 우리 민족사의 지상과제를 향하여 함께 아나가려 합니다. …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 워싱턴에서 김대중, 서울에서 김영삼"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 2권 148쪽에서 

이러한 공동선언을 기반으로 민추협이 발족되고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됐다. 신민당 총재는 이민우였다. 하지만 실질적 오너(소유주)는 고문을 맡은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 야당 돌풍으로 청중들이 구름처럼 모려들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 야당 돌풍으로 청중들이 구름처럼 모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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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후 바로 실시된 1985년 2월 12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지역구 50명, 전국구 17명 등 67명의 당선자를 내는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당시 관제야당이었던 민한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신민당에 입당해 103명에 이르는 거대야당이 됐다. 

이후 야권은 국민들의 지지에 힘을 얻어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과 격렬하게 대립케 됐다.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이른바, 4.13호헌 조치로 "88서울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개헌 논의를 일체 금지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때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양김씨와 배치되는 내각제 개헌 수용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양김 세력은 이에 반발 집단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김영삼은 총재, 김대중은 고문이 됐다.  
 
 통일민주당 현판식(1987. 5.)
 통일민주당 현판식(198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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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이광복 지음 <인간 김영삼> /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들>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 실록>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동시대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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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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