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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법)' 개정안이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0년 임기만료로 해산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포함한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사법이 통과되기 한 달 전 부산시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첫 공식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부산시는 2019년 7월 남찬섭 동아대 산학협력단 교수(동아대 사회복지학과)의 책임하에 '형제복지원 피해자 실태조사 연구용역'을 진행했고, 2020년 4월 24일 최종 보고회를 열었다. 남찬섭 교수를 만나 형제복지원 문제의 실태와 과거사법 이후 남은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인권유린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대표(오른쪽 노란색 상의)와 곽정례 한국전쟁유족회 여성위원회 부위원장(가운데) 등이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통과되자 기뻐하고 있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대표(오른쪽 노란색 상의)와 곽정례 한국전쟁유족회 여성위원회 부위원장(가운데) 등이 5월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통과되자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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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건가?
"대다수 사람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1980년대에 벌어진 인권유린 사건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 문제의 근원은 1960년부터이다. 당시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부산 피난민 문제 등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고아원과 부랑인 시설들이 부산에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가해자인 박인근 원장의 장인이 1960년에 형제복지원의 전신인 형제육아원을 설립했는데, 이 시설의 운영에 박 원장도 관여했다. 당시 고아원 시설 운영자들이 외국 원조를 착복하는 범죄가 잦았던 시절인데, 박인근 원장 역시 외국원조 물자를 빼돌려 국제시장에 팔다가 걸려서 1960년대에 감옥에 간 적도 있다. 구술 인터뷰한 자료들을 보면 형제육아원 시절부터 시설 내 구타나 인권유린 문제가 심했다.

1975년에 부산시와 부랑인 위탁계약을 맺으면서 형제복지원(당시 형제원)은 부랑인 수용시설이 되었다. 오비이락인지, 그해 12월에 박정희 정부가 부랑아 단속을 명분으로 '내무부훈령 410호'를 발표했다. 내무부훈령 410호에는 길거리를 목적 없이 배회하거나 물건을 강매하고 행인을 괴롭히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경찰이나 공무원들이 단속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내무부훈령 410호 발표 이전에도 부랑인을 잡아들이고 있었지만, 내무부훈령은 형제복지원이 부랑인 수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아무나 잡아들이는 데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문제가 가속화된 것은 내무부훈령이 발표된 1975년이지만, 이곳의 인권유린은 내무부훈령 발표 훨씬 전인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제라고 봐야 한다."

- 어떻게 국가가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을 관리·감독하기는커녕 인권침해적 운영을 부추기게 되었나?
"한국사회가 전쟁 이후 증가한 고아, 부랑인을 사회질서를 해치는 통제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1960년대에 생긴 많은 고아원은 부랑인 통제정책의 연장선에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60년대부터 잉태된 것이다. 그리고 형제복지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박인근이 없었더라도 제2, 제3의 박인근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구조다. 부산에 1950년대에 세워진 '영화숙'이라는 고아원이 있었는데 성폭력, 구타 문제 등 인권유린 문제가 형제육아원만큼이나 심했다고 한다. 다만 영화숙은 1970년대 중반에 시설이 폐쇄되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영화숙이 폐쇄돼지 않았다면 형제복지원 사건 이상의 문제가 터졌을 거다."

- 당시 수용시설에 만연한 인권침해가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가?
"1987년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가 주말에 산행하다가 울주군(현 울산시)에서 우연히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했다.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김 검사가 내사를 시작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체 일부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날 김 검사가 목격한 것은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이 울주군에 파견되어 작업하는 모습이었다. 김용원 검사는 곧 수사팀을 꾸려 울주 작업장을 덮친 것과 동시에 부산의 형제복지원 본원에도 무술경관을 데리고 들어가서 박인근 원장을 체포해 구속했다."

- 처음 사건이 불거진 1987년 이후 30년이 넘게 걸렸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
"사건이 터진 후 부산시장,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박인근 원장을 석방하고 수사를 축소하라는 압박을 넣는다. 당시 김용원 검사는 수사를 통해 박 원장의 국고지원금 횡령 액수가 11억 원대임을 파악했다. 법률상 횡령 액수가 10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찰 상부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공소장의 횡령 액수를 6억 원대로 크게 낮춰야 했다. 박 원장의 첫 재판에서 김 검사는 특수감금죄, 횡령 등으로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기소 이후 1심 재판 중에 검찰이 김 검사를 미국으로 연수 보내면서 담당검사가 바뀌었다. 결국 1심 선고에서 박인근 원장에 대해 징역 10년과 벌금 6억8천만 원이 나왔다.

이후 재판에서 최대 쟁점은 '특수감금죄'였다. 1심과 2심에서 특수감금죄 유죄가 나왔지만 대법원에서 특수감금죄는 무죄를 받았다. 1975년 내무부 훈령에 의한 행동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사건을 특수감금죄 무죄로 파기 환송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파기 환송된 이후 진행된 고등법원 재판에서 특수감금죄가 다시 유죄라고 결정된 것이다. 사건은 또다시 대법원에 올라갔고, 대법원은 재차 특수감금죄를 무죄로 판단하고 파기 환송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두 번째 파기 환송 이후에서야 고등법원은 특수감금죄를 무죄로 확정했지만, 대법원 결정을 고등법원이 뒤집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참고로 당시 대법에서 사건이 두 번째 파기 환송될 때 주심 대법관은 박근혜 정부 당시 제일 처음 국무총리로 지명됐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 소장이었다. 결국 86년 7월 박인근은 2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파기 환송 등 재판과정이 2년 6개월에 달했던지라 박인근은 형이 확정되고 2주 만에 출소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사회통제 관점에서 부랑인을 격리하는 부랑인 대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러다 보니 부랑인 수용 시설에서 빈번하게 발생했을 인권침해와 가혹행위, 국고보조금 횡령 문제 등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정권 차원에서 큰 부담이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복지원 사건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당하게 취득한 수백억 원, 자녀들이 물려받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한종선씨는 국회 앞에서 과거사법 개정안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927일 간 노숙 농성을 벌여왔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한종선씨는 국회 앞에서 과거사법 개정안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927일 간 노숙 농성을 벌여왔다.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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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 사건이 드러난 이후 피해생존자들과 가해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후에, 형제복지원 수용자 3천 명 정도가 다른 시설로 가거나 퇴소했다. 그들 중 각종 내부 비리로 큰 논란이 됐던 사회복지법인 '구덕원'에 간 사람도 있었다. 구덕원은 국고보조금 횡령 등 문제로 2012년에 해산했는데 구덕원이 해산되면서 구덕원에 있던 수용자 중 일부가 청도 대남병원으로 갔다.

이번 코로나 집단 확진으로 문제가 됐던 그 대남병원이다. 청도 대남병원의 코로나 사망자 중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나 큰 비극이다. 과거사법이 통과되면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정황도 자세하게 조사해나가야 한다. 형제복지원에서 다른 시설로 전원된 피해자들을 전수 조사하는 등 적극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형제복지원 말고도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부랑인을 강제수용하고 인권을 유린한 시설은 전국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역사와 사례를 국가차원에서 조사하고 진상규명해가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고 난 뒤 형제복지원 시설은 폐쇄되지 않았다. 법인도 폐쇄되지 않았다. 법인 해체는 2016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그동안 형제복지원은 재육원, 욥의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 느헤미야 등으로 이름을 계속 바꾸면서 운영을 이어왔다. 2014년에 부산시는 법인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해산 명령이 내려지기 직전 박인근 원장이 시설을 적자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법인을 넘겼다. 박 원장에게서 시설을 매수한 사람은 해산 명령이 부당하다며 소송했지만 2016년 대법원은 부산시의 손을 들어주었고 결국 법인은 해산되었다. 하지만 박 원장이 법인을 적자로 만들고 넘겼기 때문에 재산 귀속은 못 하게 됐다. 2016년 6월에 박인근은 죽었지만,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며 부당하게 취득한 수백억 원은 그대로 그의 자녀들이 물려받았다.

심층 면접에서 여러 피해자는 박인근의 처벌과 재산 환수를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박 원장의 여러 혐의는 대부분 이미 시효가 끝났고, 재산환수 또한 당시 재산이 불법으로 조성됐다는 걸 밝혀야 하는데 심증은 많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87년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도 외부 압박으로 담당 검사가 상당히 축소된 6억 원만 겨우 기소할 수 있었고, 이미 2년 6개월 형도 살고 나왔다. 그 이후의 재산 형성 과정은 추적할 수 있지만 본인이 사망했고, 자식들의 재산을 환수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피해자들의 심정은 너무나 이해하나 쉬운 문제가 아니다. 과거사법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제대로 밝히고,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별도로 만들어서 시효를 연장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이번 연구조사는 행정기관 차원의 첫 공식조사였다. 연구조사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형제복지원 실태조사를 위해 형제복지원 대책위에 등록한 사람, 부산시가 만든 형제복지원 피해신고센터 뚜벅뚜벅에 신고한 사람, 피해자 모임에 회원 등록한 사람의 명단을 확보하니 450명 정도 되었다. 그들 중 연락이 닿고 실태조사에 동의하는 사람을 추려 모두 149명의 설문조사와 30명의 심층면담을 진행했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관련 총 수용인원이 몇 명인지 사망자는 몇 명인지 자료가 부족했다. 75년부터 87년까지 형제복지원 사망자가 513명인데, 사망자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로 사망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연도는 1985, 1986년 두 해밖에 없다. 형제복지원이 펴낸 <새마음>이라는 기관지에 실린 사망자 명단과 부산시에 보고된 사망자 명단도 다르다. 2014년에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의 매장처리부에서 형제복지원 무연고 시신 명단이 나왔는데, 이 중 38명의 주소가 형제복지원인 것이 확인되었다.

1987년 당시에 김용원 검사 수사로 밝혀진 513명의 사망자와 2014년에 우연히 발견한 38명의 사망자 수를 합치면 모두 551명이다. 이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고, 형제복지원 관련 사망자가 얼마나 더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번 연구용역에서 다루지 못한 아쉬운 지점들도 많다."

- 6월에 실태보고 자료가 나오는데 후속 과제는?
"나 스스로도 반성을 많이 했는데 그동안 사회복지학자들이 제도를 만드는 데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정작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수용된 사람의 관점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그동안은 시설을 만들면 제도의, 사회복지의 확대라고만 봤었는데, 그렇게만 봐왔던 시각에서 벗어나 제도와 현장을 재해석해야 한다. 형제복지원만이 아니라 영화숙을 포함해서 전쟁 이후 정부의 부랑인 정책 등으로 일어난 인권침해를 사회복지 역사에 포함해서 사회복지 역사를 재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본 인터뷰는 월간 <복지동향> 2020년 6월호 '복지톡' 코너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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