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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숨을 거뒀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죽자, 그의 장례식 날에 맞춰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 학생 이선호가 거리로 뛰어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선호가 만세를 선창하자 중앙고보 학생 이현상은 류면희, 임종업과 격문을 뿌리면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길가에 서 있던 중앙고보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은 주동자인 이선호와 이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것이 3.1 운동 이후 최대 항일독립운동인 '6.10 만세운동'이다.

6.10 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뜻깊은 저항'이라는 찬사부터 학생과 민중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쓰라린 패배'라는 비판까지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잇는 역할을 했다.

박봉석과 이현상, 중앙고보 동문의 엇갈린 운명
 
청년 박봉석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봉석의 청년 시절.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다닐 때 찍은 사진이다.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봉석은 1927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밀양군 표충공립보통학교에서 1년 동안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그만둔 박봉석은 1929년 5월 중앙불교전수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 청년 박봉석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봉석의 청년 시절.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다닐 때 찍은 사진이다.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봉석은 1927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밀양군 표충공립보통학교에서 1년 동안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그만둔 박봉석은 1929년 5월 중앙불교전수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 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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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검사국으로 넘어간 학생은 중앙고보가 60명, 연희전문이 36명, 경성제대 예과생이 1명이었다. 중앙고보 학생이 6.10 만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6.10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하다가 3일 전에 검거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도 중앙고보 출신이다.

6.10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중앙고보 학생 중에 박봉석이 있다.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격문을 뿌리며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현상은 1905년생으로 박봉석과 같은 해 태어났다. 중앙고보 동문인 두 사람은 6.10 만세운동 참여 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박봉석은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졸업 후 1931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가 해방 때까지 일했다.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한 사람은 '문사'(文士)의 길을, 한 사람은 '투사'(鬪士)의 길을 걸었다.

박봉석이 책을 함께 나누는 '공서주의자'(共書主義者)로 살았다면, 이현상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의 삶을 살았다. 박봉석이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근무한 기간은 14년이다. 일제 강점기 이현상은 감옥에서 살다시피 했다. 감옥에 투옥된 기간만 13년이었다.

해방 후 박봉석은 국립도서관 개관을 이끌며 도서관 분야에서 주축 역할을 했다. 이현상은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로동당에서 중요한 인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박봉석은 자신이 20년 가까이 일한 국립도서관에서 '납북'되었다.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싸웠다.

1950년 7월 납북된 이후 박봉석의 행적은 분명치 않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되었다. 박봉석은 책의 세계를 수호하는 일에 생을 바쳤고, 이현상은 책을 통해 접한 사회주의 사상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평생을 '도서관인'으로 살았던 박봉석은 '도서관'에서 자신의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현상은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했다.

박봉석은 행적 뿐 아니라 생사 자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남녘 지리산에서 죽은 이현상의 묘는 북녘 평양 근처 혁명열사릉에 만들어졌다. 그의 묘비에는 "남조선혁명가 리현상 동지"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중앙고보 졸업 후 엇갈린 삶의 길을 걸어간 두 동문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랫동안 잊혔다가 수십 년만에 다시 기억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고, 이현상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려진 비운의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
 
나주역사 나주역사는 1913년 7월 1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지은 건물이다. 1970년 공사를 통해 일부 변화가 있긴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은 골조와 목재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촉발된 역사적 장소다.
▲ 나주역사 나주역사는 1913년 7월 1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지은 건물이다. 1970년 공사를 통해 일부 변화가 있긴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은 골조와 목재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촉발된 역사적 장소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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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 3년 후 식민지 조선에서 또다른 저항이 움트기 시작했다. 원산은 1883년 인천과 함께 개항한 곳이다.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개항했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원산은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1929년 원산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월부터 4월까지 90일 넘게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원산 인구의 1/3이 참여한 이 파업에 경찰뿐 아니라 일본군 19사단 함흥연대까지 투입해서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주요 노동운동이자 민족해방운동으로 꼽히는 '원산총파업'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 노동자 파업은 왜 원산에서 일어났을까? 역사학자 전우용에 따르면 ▲ 1880년대 개항을 통해 일찍부터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 조직이 성장했고 ▲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됐고 ▲ 임금 폭락과 대량 해고 상황이 겹치면서 원산에서 사상 초유의 파업이 일어났다.

원산총파업이 일어난 그 해, 남녘 땅 나주에서 또다른 사건이 터졌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나주역에서 후쿠다 쇼조(福田修三)를 비롯한 광주중학교 학생이 광주여고보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 이금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박준채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2학년 학생이었다. 

희롱도 희롱이었지만 나주 읍내와 영산포 상권을 장악하고 나주평야의 쌀을 반출해가는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또 다른 이유였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10월 31일과 11월 1일 광주고보에 다니는 조선 학생과 광주중학 일본 학생의 충돌이 패싸움으로 번졌다. 일본 학생이 싸움의 원인을 제공했음에도 경찰은 일본 학생 편을 들어 조선 학생을 구타했다.

11월 3일 일요일, 조선총독부는 메이지 천황을 기념하는 명치절(明治節) 기념식에 학생을 동원했다. 명치절은 일본의 4대 명절의 하나였다. 1929년 11월 3일은 개천절이자 일요일이었다. 구동공원(지금의 광주공원)에서 열린 '남의 나라 기념식'에 동원된 조선 학생은 기미가요 제창 때 침묵으로 저항했다. 신사 참배도 거부했다. 행사가 끝난 후 거리로 나온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천 주변에서 일본 중학생과 충돌했다. 

충돌은 광주역 앞(지금의 광주 동부소방서 자리)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 학생의 집단 난투극으로 이어졌다. 광주경찰서가 경찰과 기마순찰대를 동원하자, 조선 학생들은 광주고보로 돌아갔다. 강당에 모인 광주고보 학생들이 시위를 결정하고 시내로 진출하자,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 학생이 여기에 가세했다. 조선 학생 시위대는 계림동 광주중학교(지금의 광주고등학교) 방향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일부 학생은 사건을 편파보도한 광주일보사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고, 광주중학 일본 학생과 충돌했다. 당시 <광주일보>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신문사로 일제의 기관지나 다름 없었다. 학생 시위가 거세지자 광주고보 측은 휴교령을 내렸고, 일제는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70여 명을 검거했다.

전국으로 확대된 광주학생독립운동
 
금남로 공원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장재성은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빵집’을 운영했다. ‘장재성 빵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금남로 공원 자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1km 정도 거리다. ‘금남로’는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항쟁의 무대가 된 역사적 거리다.
▲ 금남로 공원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장재성은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빵집’을 운영했다. ‘장재성 빵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금남로 공원 자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1km 정도 거리다. ‘금남로’는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항쟁의 무대가 된 역사적 거리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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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조직인 성진회를 이끌던 장재성은 독서회원을 중심으로 2차 궐기를 준비했다. 장재성은 독서회 활동을 위해 빵집을 운영했다. 장재성은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중형을 선고받았다. 독립유공자인 그는 5.16 쿠데타 이후 좌익 활동을 이유로 서훈이 취소되었다. 그가 운영했던 '장재성 빵집'은 지금의 금남로 공원 자리에 있었다.

11월 3일 시위로부터 9일 후인 11월 12일 광주 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전남사범 학생이 참여한 대규모 2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을 통해 언론·출판·집회·시위·결사의 자유 보장,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같은 9개 항목을 요구했다. 2차 시위가 터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고, 260여 명의 학생과 다수의 사회단체 간부가 검거되었다.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지역 학생 비밀결사를 모태로 만들어진 독서회와 신간회, 조선청년동맹이 개입하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주에서 시작한 학생 시위는 나주와 목포로 번졌고, 경성을 포함한 조선 땅 전체로 확산되었다. 

12월 5일 경성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경성제1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중동·경신·보성·중앙·휘문·배재·이화가 동맹휴교에 돌입했다. 시위가 경성의 주요 학교로 확산된 것이다.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학생의 거리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 중 1400 명 이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로 번져, 1930년 3월까지 거리 시위와 동맹휴교 형태로 계속 이어졌다. 일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을 194개교, 5만 4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중등학교 학생의 60%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으로 1642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582명이 퇴학당했다. 2330명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은 학생은 광주에서만 180여 명에 달했다.

한편 나주역에서 일본 학생과 충돌했던 박준채는 감옥에 3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출소했다. 박준채의 형 박준삼도 중앙고보 시절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박준삼은 해방 정국에서 나주 건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박준채의 사촌 박기옥은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한 서태석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양정고보로 학교를 옮긴 박준채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해방 후 조선대학교 교수가 된 박준채는 10년 동안 대학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박준채는 2001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일제 강점기 3대 독립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1953년 5월 1일 기념탑 건립 제안으로 전국적인 모금이 시작되었고, 8개월의 공사 끝에 1954년 6월 10일 제막식을 가졌다. 옛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기념탑과 나란히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이 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1953년 5월 1일 기념탑 건립 제안으로 전국적인 모금이 시작되었고, 8개월의 공사 끝에 1954년 6월 10일 제막식을 가졌다. 옛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기념탑과 나란히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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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3.1 운동과 6.10 만세운동에도 학생이 참여했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전 독립운동과 차이점이 있다.

우선 학생이 '개별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학교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학교 안팎에 만들어진 조직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다. '조직적'이었기 때문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라는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이 가능했다.

누군가의 '죽음'과 상관없이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송우혜와 강준만이 지적한 것처럼, 근대 이후 한국의 대규모 시위엔 누군가의 죽음이 '계기'가 된 경우가 많다. 고종의 죽음과 3.1 운동, 순종의 죽음과 6.10 만세운동, 김주열의 죽음과 4.19 혁명, 광주 시민 학살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박종철·이한열의 죽음과 6월 항쟁, 신효순·심미선의 죽음과 촛불시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어떤 이의 죽음이 계기가 되지 않고 항쟁이 일어난 점에서 부마민주항쟁과 같지만,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된 점에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의 촛불 항쟁과 비슷하다.

'독서회'가 중심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깨닫고 항일운동 전개하는 과정에서 책과 독서모임이 매개가 된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광주제일고등학교에는 독립 건물 형태의 도서관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부터 반세기 후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제일고등학교 도서관 앞 운동장에서 조선대학교 의대 동문 체육대회가 열렸다. 체육대회장에 뛰어든 공수부대의 습격으로 중상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광주일고 근처 양동시장은 5.18 당시 시장 상인이 돈을 모아 시민군에게 빵과 우유를 건네고 밥을 지어 건넨 곳이다. 

광주중학교의 후신인 광주고등학교에도 '세종관'이라 불리는 학교도서관이 있다. 광주고등학교는 5.18 당시 계엄군이 최초로 총을 쏜 곳이기도 하다. 광주고등학교 세종관 앞에는 '광주사월혁명발상기념탑'이 서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광주의 시위가 광주고등학교 학생의 교문 돌파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광주고등학교 정문 근처에는 '4.19민주혁명역사관'이 있다. 광주에 도로명 '4.19로'와 노선번호 '419번 버스'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광주에는 5.18 사적지를 운행하는 노선번호 518번 버스와 대구 2.28 학생의거를 기념하는 228번 버스도 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고등학교 근처에서 시민군과 20사단의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과정에서 광주고등학교 수위 양동선 씨가 학교 옥상에서 총을 맞고 숨졌다. 광주고등학교는 금남로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과 4.19 혁명, 5.18 광주민주항쟁에 관련된 공간이다. 

항일운동에도 우리는 왜 독립하지 못했을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1967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동구 황금동에서 문을 열었다. 도서관은 이듬해인 1968년 문을 열었다. 광주에서 현존하는 도서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2014년 9월 2일 서구 화정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21만 권 이상의 장서와 1,400석이 넘는 좌석을 갖추고 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1967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동구 황금동에서 문을 열었다. 도서관은 이듬해인 1968년 문을 열었다. 광주에서 현존하는 도서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2014년 9월 2일 서구 화정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21만 권 이상의 장서와 1,400석이 넘는 좌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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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같은 항일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음에도 우리는 왜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 신복룡 교수는 뼈아픈 지적을 한 바 있다.

"일제 치하에서 2천만 동포가 일제를 거부했다고 하지만, 죽음은커녕 체형(體刑)을 받을 정도도 아니었던 3.1 운동의 비폭력 항쟁에서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전체 인구 1천678만 8천400명 중 2.76%인 46만 3천86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할 당시의 5년 동안인 1907년의 정미의병(丁未義兵)에서부터 합병 1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 1천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항일참전율(抗日參戰率)은 1.1%가 된다.

임진왜란의 경우를 보면 그 당시의 인구는 483만 명 정도였는데, 7년 동안의 전투에 참가한 총인원은 정규군과 의병을 합쳐 17만 명 정도였으니까 이 당시의 항일참전율은 약 3.5%가 된다. 이와 같은 통계를 고려할 때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후의 대일참전율이 1.1%였다면 이 정도의 항쟁으로써 민족이 살아남기를 바랐다는 것 자체가 요행을 바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한국의 대일항전은 그 강인성이나 강도의 면에서 일본의 침략성에 비해 너무 나약했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국제 사회의 도덕률이라든가 무저항 비폭력 투쟁이 얼마나 환상적이며 이상주의적이었던가를 알았어야 한다. 세이뇨보(C. Seignobos)의 말처럼 약소 민족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본래부터 희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멸망기의 항일 투쟁과 3.1 운동은 무장투쟁의 형식을 취했어야만 했으며, 이 점에서 신채호의 주장은 옳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민족 정기의 문제이지 성패의 문제가 아니다."


1959년 개봉한 김강윤 감독의 <이름없는 별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광주학생독립운동 30주년을 맞아 11월 2일 광주에서 시사회를 갖고, 11월 3일 전국에서 개봉했다. 

80주년이었던 2009년, 문순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 <알 수 없는 내일>을 출간했다. 5.18 당시 <전남매일신문> 편집부국장이었던 문순태는 전남고 교사 김준태 시인에게 청탁해 6월 2일자 지면에 한 편의 시를 실었다. 그 시가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다.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한 것은 1953년부터다. 바로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폐지'되기도 했다. 당시 유신 정권은 53개에 달하던 각종 기념일을 26개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학생의 날'을 없애고 '성년의 날'을 신설했다.

유신 시대 학생의 날을 맞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이어지자 학생의 날을 폐지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4년 부활한 학생의 날은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주광역시와 나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유적이 여럿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다. 당시 광주고보 본관 터에는 1997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이 세워졌다. 그 옆에는 1954년 세워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나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촉발된 '나주역사'가 남아 있고, 나주역사 옆에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함께 있다.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유일한 도서관
 
광주중앙도서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학교 중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전남사범)가 있다. 1925년 문을 연 전남사범은 광주중앙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전남사범은 1931년 폐교되지만, 전남사범은 광주교육대학교로 이어졌다. 20만 권 이상의 장서와 450여 석의 좌석을 갖춘 광주중앙도서관은 1991년 문을 열었다.
▲ 광주중앙도서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학교 중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전남사범)가 있다. 1925년 문을 연 전남사범은 광주중앙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전남사범은 1931년 폐교되지만, 전남사범은 광주교육대학교로 이어졌다. 20만 권 이상의 장서와 450여 석의 좌석을 갖춘 광주중앙도서관은 1991년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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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1967년 11월 동구 황금동에서 문을 열었다. 이듬해인 1968년 7월 1일 부속 도서관이 개관했다. 한국전쟁 이후 광주에서 처음 문을 연 도서관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에는 서구 화정동으로 옮겨 도서관과 기념관, 기념탑을 새롭게 건립했다.

화정동에 새로 문을 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의 공간 구성은 여느 도서관과 다를 바 없지만, 식민지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도서관으로는 유일한 곳이다.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개관 50년을 넘겼다.

2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고, 1411석의 좌석을 갖췄다. 광주광역시 도서관 중 가장 많은 좌석을 갖춘 도서관이다. 113개의 계단이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근처에 있다. 113개의 계단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의미한다. 

광주는 1896년 전국을 8도에서 13도로 나눌 때 전라남도 관찰부가 자리하면서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라남도 일대의 행정 중심지는 나주였다. 광주는 1931년 광주읍, 1935년 광주부를 거쳐, 1949년 광주시가 되었다.

1940년 이후 광주와 여수를 잇는 광려선 개통과 일제의 육성 정책을 통해 호남 제1의 도시로 성장했다. 1988년 광주시는 광산군을 편입해서 직할시가 되었고, 1995년 광역시가 되었다. 

광주에 '근대도서관'이 생긴 건 언제부터일까? 광주광역시 동구청이 펴낸 <동구의 인물 1>에 따르면, 1917년 최한영을 비롯한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석초등학교) 출신이 모여 '신문잡지종람소'를 열었다. 신문과 잡지를 함께 읽고, 공부와 강연, 소식을 주고 받는 장이었다. 3.1 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운동을 조직한 공간이었다. 

신문잡지종람소는 흥학관과 함께 광주시민사회 운동의 원조로 꼽히고 있다. 신문잡지종람소는 옛 측량학교, 즉 지금의 광주적십자병원 자리에 있었다. 광주적십자병원은 5.18 당시 전남대학교 부속병원, 광주기독병원과 함께 시민을 정성으로 돌본 병원이다. 피가 부족하자 유흥업소 여성까지 헌혈에 나서 시민 공동체 정신을 보여준 공간이다. 

1919년 4월에는 오츠카 타다에(大塚忠衛)가 사립 도서관인 '광주도서관'을 열었다. 1920년 10월에는 전라남도가 도립도서관으로 '광주도서관'을 개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주도서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규모와 위치가 확실치 않다.

1920년에 문을 연 '전남문고'도 광주군에 있었다. 1931년 시점에 전남문고의 장서량은 2,441권이었다. 1929년에는 광주군 항교가 '광주도서관'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책 권수는 수백 권 남짓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광주중앙도서관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 있는 공간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학교 중 전라남도립사범학교(전남사범학교)가 있다. 전남사범학교는 지금의 광주교육대학교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전남사범학교는 지금의 광주중앙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일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남사범을 폐교시키기도 했다. 1991년 7월 2일 개관한 광주중앙도서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남사범학교의 터에 세웠다. 식민지 독립운동 유적지에 지은 흔치 않은 도서관인 셈이다. 광주에는 일제 잔재 위에 지은 도서관도 있다. 1990년 문을 연 송정도서관은 송정신사 자리에 지었다. 송정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송정신사 때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는 성균관 유생으로부터 가까이는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학생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학생이 배움의 공간을 박차고 거리로 나서야 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하지만 깨어 있는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역사는 시대의 어둠을 뚫고 조금씩 전진해왔다. 광주제일고등학교(옛 광주고보) 교정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시대도 풍경도 달라졌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 사적지를 찾노라면, 90여 년 전 암울한 식민지 조선에서 차별과 압제에 저항하며 울려 퍼진 학생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서울의 봄'과 춘래불사춘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1967년 11월 동구 황금동에서 문을 열었고, 다음해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학생회관 건물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서구 화정동으로 옮겨간 후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로 쓰이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시위대가 이곳을 지키던 경찰 차량과 진압도구를 부수면서 시위의 기폭제를 만들어낸 곳이다. 5.18 당시 ‘도서관’으로 쓰였다.
▲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은 1967년 11월 동구 황금동에서 문을 열었고, 다음해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학생회관 건물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서구 화정동으로 옮겨간 후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로 쓰이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시위대가 이곳을 지키던 경찰 차량과 진압도구를 부수면서 시위의 기폭제를 만들어낸 곳이다. 5.18 당시 ‘도서관’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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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의 배경이 된 도서관 이야기를 다루면서 '3산 3주'를 거론한 적 있다. '3산 三山'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의 저항이 분출한 원산·마산·부산을 지칭한다. '3산'의 으뜸으로는 마산을 꼽은 바 있다.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이 모두 마산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민중이 처절하게 패배한 공주·제주·광주는 '3주 三州'로 꼽았다. '3산 3주' 중에 으뜸으로 꼽힐 곳은 어디일까? 바로 '빛고을' 광주다. 광주는 일제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광주학생독립운동과 5.18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4.19 혁명 때도 앞장 선 도시다. '의향'(義鄕)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곳이 광주다. 

광주와 5.18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최정운 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5.18을 이렇게 표현했다.

"5.18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되돌아보게 한다. 5.18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단적으로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 5.18은 우리의 몸에서 출발하여 영혼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은 광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광주민주항쟁을 꼽을 것이다. 광주 이후의 삶은 광주 이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운동가 오창익의 말이다.

"1980년 이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5월 18일이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진 1979년 10월 26일부터 신군부의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1980년 5월 17일까지를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18년 동안 이어진 박정희 철권 통치로 억눌려있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터져나온 시기였다.

1980년 4월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의 통합을 추진하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서로에 대한 양김의 불신, 박정희 사후 정국을 자신이 주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군부에 대한 오판(誤判)도 협상 결렬의 이유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양김의 분열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유리한 정치 환경을 제공했다.

대학가에서는 학생회 부활, 학원 민주화와 병영집체 훈련 거부, 계엄 해제 같은 민주화의 바람이 크게 일었다. 교내 시위를 이어가던 학생들은 5월 13일과 14일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오후에는 서울역 앞에 30개 대학 10만여 명의 학생이 모여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5월 15일 서울역 대규모 집회 후 학생운동 지도부는 거리에서 시위를 중단하고 교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回軍)이다. '회군'한 학생과 달리, 신군부는 '진군'했다. 12.12 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권' 탈취를 위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였다. 신군부는 12.12로부터 5.17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이 '다단계 쿠데타' 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쿠데타'라고 불리는 이유다.

1980년 5월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18일 새벽부터 정치 활동과 집회 시위가 금지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신군부는 사전에 블랙리스트로 작성해두었던 8백여 명에 대해 수배령을 내리고 이중 6백여 명을 체포했다.

김대중을 비롯한 문익환, 고은, 이문영, 김상현, 이해찬, 송건호, 이호철, 한승헌, 한완상 등 37명은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신군부는 이 사건을 '김대중내란 음모사건'으로 조작해서 발표했다. 야당 정치인과 수많은 민주인사 뿐 아니라 심지어 김종필, 이후락 같은 박정희 시대 핵심 인사도 부정축재자로 잡혀 갔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체포되지 않고 가택 연금되었다.

김영삼 제명이 부마민주항쟁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 된 것처럼, 김대중 체포가 불러올 호남 지역의 반발에 대해 신군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반발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권좌에 오른다는 시나리오를 신군부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해 '서울의 봄'은 봄이되, '오지 않은 봄'이었다.

금남로, 계엄군의 학살
 
전남대학교 도서관 별관 지금은 ‘도서관 별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이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이었다. 외벽 색깔이 흰색이어서 ‘백도’라고 불린다. 도서관 별관 앞쪽 붉은 벽돌 건물이 지금의 중앙도서관이다. ‘홍도’라고 불리는 중앙도서관 옆으로 ‘디지털도서관’을 새롭게 건립 중이다.
▲ 전남대학교 도서관 별관 지금은 ‘도서관 별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이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이었다. 외벽 색깔이 흰색이어서 ‘백도’라고 불린다. 도서관 별관 앞쪽 붉은 벽돌 건물이 지금의 중앙도서관이다. ‘홍도’라고 불리는 중앙도서관 옆으로 ‘디지털도서관’을 새롭게 건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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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광주에서는 1980년 5월 14일 전남대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 진압으로 전남대 학생들은 중앙도서관 앞까지 밀려났다. 도서관 앞까지 후퇴한 1만여 시위대는 이후 경찰 저지선을 뚫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시내로 진출한 시위대는 전남도청 앞 광장을 장악하고 '민족 민주화 성회'를 개최했다.

다음날인 5월 15일에도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생 1만 6천여 명의 학생이 도청 분수대 주변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서는 5월 15일 서울역 회군 후 시위가 이어지지 않았으나 5월 16일 밤 8시 광주 금남로에서는 3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모인 '횃불 대행진'이 열렸다.

18년 동안 이어진 박정희 독재 시대를 횃불로 밝히겠다는 의지였다. 이 날은 5.16 쿠데타 19주년이었다.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에도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안병하 전남도경국장과 사전에 협의된 평화시위였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대학가에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유시민의 지적처럼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5월 17일 밤 신군부는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했다. 휴교령과 계엄군 투입에도 유일하게 시위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만 '약속'을 지킨 대가로 광주가 치른 '희생'은 너무나 컸다.

1980년 5월 17일 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배치된 제7공수여단은 학생을 강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원은 도서관을 비롯한 전남대 곳곳에 남아 있던 학생을 폭행한 뒤 끌고 갔다. 이날 전남대에서 69명, 조선대에서 43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이전부터 집회가 자주 열린 공간이다. 1980년 4월 11일에는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 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1980년 4월 17일에는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주관한 민주화 대회가 중앙도서관 앞에서 열렸다. 같은 해 4월 25일 4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어용교수 퇴진을 위한 비상 학생총회를 개최한 것도 중앙도서관 앞이다.

4월 26일부터 5월 1일까지는 중앙도서관 2층 열람실에서 어용 교수 퇴진과 상담지도관실 폐쇄를 요구하는 철야 농성이 이어졌다. 도서관 철야 농성이 이어지던 4월 28일과 5월 1일, 중앙도서관 앞에서 어용교수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5월 3일 오후 1시부터는 총학생회가 주최한 '반민족 반민주 장례식'이 도서관 앞에서 열렸다. 도서관 앞에 모인 3천여 명의 학생은 대학본부(지금의 5.18기념관)까지 교내 행진을 이어갔다. 5월 14일 신군부에 의해 '휴교령이 내려지면 오전 10시까지 교문 앞으로, 교문 앞 집결이 불가능하면 낮 12시까지 도청 앞으로 모이라'는 대자보가 나붙은 곳도 중앙도서관 앞 게시판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지금의 도서관 별관이다. 외벽이 흰색이라 '백도'(白圖)라 불리는 도서관 별관은 1975년 5월 준공된 건물이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 건물로, 광주시민회관을 작업한 임영배와 이수가 설계했다. 임영배는 5.18기념관 옆에 있는 전남대학교 대강당도 설계한 건축가다. 

전남대학교 도서관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9월 학동 캠퍼스에 있는 의과대학 본관 2층 강의실에서 출발했다. 1955년 '금호각'을 신축해서 도서관으로 사용하다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백도' 시대를 거쳤다. 전남대학교는 1990년 11월 새로운 도서관을 신축해서 본관으로 삼았다. 붉은색 벽돌로 외관을 꾸민 도서관 본관은 '홍도'(紅圖)라고 불린다. 전남대는 홍도 옆에 디지털 도서관을 새롭게 건립하고 있다.

전남대학교 곳곳에는 민주화 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5.18 민주화운동 사적 1호인 전남대 정문, 박관현 열사의 언덕길, 윤상원의 숲, 윤한봉 기념정원, 김남주의 길, 교육지표마당, 광주민중항쟁도 벽화마당, 민주열사 기념정원, 용봉열사 기념정원, 박승희 정원, 민주광장까지. 전남대는 학교 안 민주화 운동 사적지를 '민주길'이라는 탐방길로 조성했다.

시민이 총을 든 최초의 '무장항쟁'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옛 가톨릭센터를 리모델링한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이다.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은 이곳 기록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상설 전시가 이뤄지며, 4층에는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옛 가톨릭센터를 리모델링한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이다.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은 이곳 기록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상설 전시가 이뤄지며, 4층에는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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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장 주변을 장갑차와 군인으로 에워쌌다. 국무회의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하고 8분만에 끝났다. 5월 18일 새벽 1시 신군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계엄군과 장갑차를 투입했다.

일요일이었던 5월 18일 아침 10시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계엄 해제와 계엄군 철수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이 흩어지지 않자 공수부대원이 곤봉을 휘두르며 난폭하게 진압했다. 어느새 진압 병력은 김남주의 시처럼 '경찰'과 '전투경찰'을 거쳐 '군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이 광주 가톨릭센터 근처 시내로 이동해서 시위를 이어가자, 공수특전단은 곤봉과 대검을 사용해서 잔인하게 진압했다. 18일 오후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는 다음날 새벽 숨졌다. 첫 사망자였다. 5월 18일 하루 동안만 400여 명이 넘는 시민이 연행되었다. 5월 18일 오후 신군부는 특전사 11공수여단 258명을 추가로 투입했다. 18일에 이어 19일에도 학생과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폭행과 공격, 연행이 이어졌다.

계엄군이 잔인하게 진압하자, 시민도 보도블럭을 깨서 돌을 던지고 각목을 들기 시작했다. 5월 19일 오후 4시 30분경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장갑차가 시민에게 둘러싸이자 계엄군은 '발포'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3학년 학생 김영찬이 중상을 입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시위 군중을 향한 발포는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발포는 4.19 혁명 과정에서, 두 번째 발포는 광주 5.18 때 일어났다. 4.19 혁명 때의 발포는 군이 아닌 경찰의 발포였다. 시위하는 시민에게 군이 발포한 건 5.18 당시 계엄군의 발포가 처음이었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불린 계엄군의 광주 진압은 대한민국 군대의 가장 '추악한 작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와 뮤지컬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계엄군이 총을 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의 시위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5월 19일 자정 특전사 11여단 1146명이 광주에 추가 투입되었고, 20일 새벽엔 특전사 3공수여단이 병력을 증파해서 3405명으로 늘어났다. 3공수여단은 부마항쟁 때 동아대에 진주하며 진압을 했던 부대로, 12.12 쿠데타 때 특전사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할 때 투입된 부대다. 5월 27일 도청에 투입되어 시민군을 최종 진압한 것도 3공수였다. 

장교 284명, 사병 4482명으로 구성된 20사단 최정예 부대도 투입되었다. 20사단의 이동이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다.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광주 시위 진압, 나아가 학살을 방조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5.18 직전인 1980년 5월 16일 존 위컴(John A. Wickham) 한미연합사령관은 신군부의 20사단 작전통제권 해제 신청을 '승인'했다. 또한 위컴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은 신군부가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문의했을 때 미국 정부 고위 관리들과 협의 후 '동의'했다. 미국의 동의와 묵인 하에 광주민주항쟁이 끝난 1980년 8월, 존 위컴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들쥐떼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로 나서도 따를 것이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치 않다."

브루스 커밍스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에서 "광주의 비극은 서울과 워싱턴의 합작품"이라는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웨딩 사진이 영정이 된 '오월의 신부'
 
오월의 신부 최미애 씨는 5월 21일 전남대 부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는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 그녀가 총을 맞은 후 꿈틀대던 태아도 살리지 못했다. 망월동 구 묘역에 있던 그녀의 무덤은 국립 5.18민주묘역이 조성되면서 옮겨 왔다. 묘지 번호는 1-60이다.
▲ 오월의 신부 최미애 씨는 5월 21일 전남대 부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는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 그녀가 총을 맞은 후 꿈틀대던 태아도 살리지 못했다. 망월동 구 묘역에 있던 그녀의 무덤은 국립 5.18민주묘역이 조성되면서 옮겨 왔다. 묘지 번호는 1-6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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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저녁 7시 대형 버스를 앞세워 영업용 택시 200여 대가 무등경기장에 모였다. 이렇게 모인 차량은 금남로를 향해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행진했다. 생계 수단인 버스와 택시를 앞세운 대규모 차량 시위는 생업에 종사하던 광주 시민의 분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민을 '진압'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했고 이는 '학살'로 이어졌다. 적으로부터 시민을 지키기 위해 만든 군대가 시민을 학살한 것이다. 그 시절 광주에서 '적'은 누구였을까. 당시 광주를 취재한 AP통신의 테리 앤더슨(Terry A. Anderson) 기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5.18은 사실상 군인들의 폭동이었다."

1980년 광주에서 '폭도'는 시민이 아닌 계엄군이었다. 폭도인 계엄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은 총을 들었고, 스스로 '시민군'이 되었다.

5월 20일 밤 광주에 대한 허위방송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MBC에 불을 질렀다. 광주KBS는 다음날 새벽 불탔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는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며 집단 사직서를 냈다. 방송국뿐 아니라 세무서를 불태운 것은 시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된 군대가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5월 20일 밤 광주역 앞에서 시민을 향한 집단 발포가 있었고, 공수부대와 시민군 사이에 사실상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밤 '광주역 전투'에서 시민 5명이 숨지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수부대원은 1명이 사망했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금남로에 모인 10만 명이 넘는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는 다시 '집단 발포'를 했다. 비무장 시민을 향한 '조준 사격'이었다. 이 발포로 최소 54명이 죽고 500명 이상이 다쳤다. 5월 21일 하루 동안 계엄군은 48만4천484발의 총알을 시민을 향해 발사했다. 당시 광주시 인구는 80만 명이었다. 광주시민의 60%를 살상할 수 있는 탄환을 하루 동안 쏴댄 것이다.

수많은 시민이 집단 발포로 숨졌음에도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다. 쏜 사람과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많은데, 쏘라고 명령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의 특성상 '발포 명령 없이' 조준 사격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5월 21일 정오 무렵 전남대 앞 평화시장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최미애씨도 계엄군이 정조준한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최미애씨는 임신 8개월이었다. 최미애씨와 함께 그녀의 아기도 숨졌다. 스물 넷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영정사진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묘비에 이런 글을 새겼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시민이 시내와 광주 외곽의 무기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구해 '시민군'으로 무장한 것도 이 때부터다. '무장항쟁'의 시작이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쏜 것도 초유의 사태였지만, 시민이 군에 맞서 총을 들고 무장항쟁을 벌인 것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세월호 침몰 34년 전 광주 땅에서 먼저 울려 퍼졌다.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던 5월 21일, 신군부는 헬기를 동원해서 기총 사격을 했다. 광주 전일빌딩 옥상에 설치된 경기관총을 향해 신군부의 헬기는 총탄을 퍼부었다.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전남여상 3학년 박금희는 헬기 총격으로 사망했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이야기는 연극 <금희의 오월>의 소재가 되었다. 금희의 학교 후배들은 매년 5월 그녀를 기리며 헌혈에 참여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광주민주항쟁 과정에서 숨진 청소년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열 여덟 명이다.

헬기 사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는 신군부의 잔인한 진압에 대해 이런 법정 진술을 남겼다.

"내가 비록 성직자이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빛고을 광주의 도서관'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빛고을 광주의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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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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