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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이다. 당시에는 비중이 커 좀처럼 잊지 못할 것 같던 일들도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에 관한 대부분은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다. 팔십 대 중반의 친정엄마나 내 친구들도 출산에 대해 그리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내는 것을 보면 다른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임신 혹은 출산이 여성의 삶을 통틀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은 출산의 그 순간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지레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출산 그 순간은? 우리의 아기들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첫 숨을 쉴까? 또한 다른 여성들은 어떻게 출산할까? 그리고 여성들에게 출산은 어떤 의미와 비중을 가질까.

<힘주세요!>(현암사 펴냄)는 많은 여성이 겪는 당사자이지만 정작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혹은 일어났는지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는 출산, 그 순간들을 한 조산사가 기록한 것이다.
 
'아기는 준비가 되면 나온다'는 소박한 지혜는 거짓말이다. 아기는 준비가 되면 나오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도 나온다. 이런 상황이 괜찮을 때도 있지만 정말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 105쪽

아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산모가 내는 소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내거나 들을 필요가 전혀 없지만, 조산사들은 이를 아주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 소리는 인간의 소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입이 벌어지지만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이 소리만 있을 뿐이다. - 311쪽

저자 리어 해저드는 영국 국민 보건 서비스(NHS, 영국의 공공 보건 서비스로, 전 국민이 치과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 소속 한 조산사.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달 덕분에 가능한, 한 레즈비언 부부의 드라마틱한 출산을 시작으로 23주 3일이라는 미묘한 시기에 출산의 조짐을 보인 열다섯 살 소녀의 출산, 단순한 독감처럼 보이나 실은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치명적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의 출산, 등 여러 상황의 출산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힘주세요!> 책표지.
 <힘주세요!> 책표지.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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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쓸 수 있는 그런 소재가 아니다. 이런 점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할 것 같다. 그동안 막연히 궁금했던 누군가의 분만, 분만실 이야기들이다.

이 책이 지닌 이런 사실만으로 호기심과 흥미로움이 앞섰다. 첫 번째 사례가 레즈비언 부부의 출산이라 더더욱 흥미롭게 읽힌 것 같다. 이런 책이 안타까움이나 측은, 동지애와 같은 감정들이 더해져 읽히기 시작한 것은 올리비아의 사례를 접하면서다.

일부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금 결혼 혹은 출산과 맞물리는 80~90년생들은 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고 자란 세대다.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다보니 출산과 육아처럼 극도로 힘든 상황에 이상 증상을 보이기 쉽단다. 그 증상이 산후우울증이나 육아우울증. 몸이 힘들다고 보내는 신호라는 것이다.

모유 수유를 힘들어하는 산모들이 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중 하나. 몸이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스스로 살길을 찾아 젖을 줄이는 등 원활하게 분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유가 보편화된 지 오래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 아기를 먹여 살릴 대체음식(분유)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 몸과 마음이 힘들면 젖 분비를 아예 차단해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체음식이 변변치 않았던 옛날 산모들처럼 출산한 산모는 무조건 젖이 나온다거나 자주 물리는 그만큼 많이 나올 것이라고 간주, 모유 수유를 강요하다 불행한 지경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모유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모유 수유를 강요하거나 맹신하는 이유. 모유 수유의 우여곡절을 겪는 올리비아의 사정이 우리와 같아 흘려 읽히지 않았다.

과학과 문명, 의료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눈에 보이는 빤한 어리석음을 맹신할까? 하와의 사례에선 종교와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강요되고 자행되는 여성 할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느낄 수 있다. 인신매매 피해자인 페이 쉬안의 이야기는 아프고 안타깝게, 그리고 분노스럽게 읽힌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상처를 소독할 때마다 이것이 애정을 확인시켜주는 행동임을 잊지 않는다. 모든 상처에는 사연이 담겨 있고, 모든 치료는 이 사연을 인정하는 행위다.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조산사만의 방식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을 믿어요.' - 258쪽

이것이 전부였다. 위안의 말도, 어마어마하게 불안정한 순간을 치유해줄 연고도 없었다. 나는 '5번 방'에 누가 있었는지, 또는 그 산모가 이날 밤 왜 이렇게 작은 존재를 낳았는지, 내가 들고 있던 통에 결국 누군가가 라벨을 부착해서 병리학 부서에 보냈는지 끝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와 왜는 모두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나는 이날 밤에 분만 병동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를 배웠다. 바로 죽음이 삶의 쌍둥이 형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산사는 이 둘을 모두 받아낸다. - 304쪽

책은 이처럼 다양한 여성들의 출산 사례를 통해 출산 당사자나 알 수 있거나 지레짐작했던 것들을 알려준다. 어쩌면 출산 과정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아기에 대한 끝없는 걱정으로 가장 약해지는 동시에 가장 강한 존재가 되는 여성들. 그들의 슬프거나 안타까운 한편 경이로우며 감동적인 출산의 순간들을 들려준다. 아울러 여성들에게 삶의 큰 전환점인 출산과 원만한 육아를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산사들이 있는 분만 현장을 진지하지만 때론 유머스럽게 들려준다.

저자가 조산사가 된 것은 두 딸을 낳으며 여성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건강에 관심 가지면서다. 2013년부터 다양한 출산 현장에서 수많은 여성의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책에는 출산을 이미 경험한 여성인 동시에 조산사로서 수많은 출산 현장에서 얻은 관련 지식들을 자신의 시각으로 받아들여 발효한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영국 여성들의 출산 현장이다. 우리와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것들은 물론 분만 여건이 많이 다르다. 그런데 모유에 대한 집착으로 우여곡절을 겪는 올리비아의 경우처럼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곤 했다.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다.

의료 에세이다. 그런데 단편 드라마를 보듯 흥미로움과 묵직한 감동, 메시지를 담고 있다. 출산 관련 다큐멘터리 혹은 르포에서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이며 날것 그대로의 내용에 감동을 느낀 책이다.

힘주세요! - 탄생과 죽음이 오가는 분만실의 기록

리어 해저드 (지은이), 김수민 (옮긴이), 현암사(2020)


태그:#힘주세요!, #영국국민보건서비스(NHS), #분만실, #조산사, #임신과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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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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