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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 <소문의 벽>의 주인공은 소설가 박준이다. 그는 '전짓불'과 관련한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6.25가 터지고 나서 그의 고향 마을에는 남한의 경찰과 북한의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찾아들었다.

어느 날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갑자기 방문이 열어젖히며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이 들이닥쳤다. 정체 모를 그들은 전짓불을 얼굴에 비추며 어머니에게 누구 편이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인지 공비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박준은 전짓불 뒤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와,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절망적인 순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 깊은 강박감이 되어버렸다.

출판사 리뷰는 <소문의 벽>이 사회적 통념이 가진 폭력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매우 커다란 힘을 가지고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말이다.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정권도 바뀌었다. 작가 이청준조차 세상을 떠났지만, 유감스럽게도 '전짓불' 뒤에서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모든 맥락은 거세되고 오직 '누구의 편'만이 기준이 되는 세상. 그 세상이 지금 너는 '윤미향의 편이냐?', '이용수의 편이냐?'를 묻고 있다.

'편 가르는 세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5월 7일 대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미향 국회의원의 기부금 횡령 의혹을 제기하며 수요집회 불참을 선언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5월 7일 대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미향 국회의원의 기부금 횡령 의혹을 제기하며 수요집회 불참을 선언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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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편'이 불편한 것은, '편'을 넘어서는 사고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 사고'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기 편의 누군가가 다른 편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 이 폐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공금 유용 의혹 등 일련의 사태는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을 또 한 번 재현하고 있다. 객관적 사고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검찰이 기소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 신문에 났으나 사실이 아닌 것을 그렇게 무수히 보고도 이번에도 또 그러고 있는 걸 보면, 우리의 학습 능력은 정말 형편없는 것 같다. 각 진영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기사만 골라 확증편향하는 양상도 변함이 없다.

사실이야 어떠하든 누구의 편이 되고 싶은 이들의 확대해석과 과대유추가 난무한다. 미안하게도 이것은 윤미향 전 대표에 대해서나 이용수 할머니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다.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유추도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한 진리다. 그 의혹과 유추가 마음에 들어 침소봉대하고 싶더라도, 자신의 눈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면 잠시 멈추고 확증을 유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검찰 혹은 언론에 '처형'할 권리를 마음대로 쥐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처형의 공범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들의 권력은 우리가 준 것이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그들이 제기한 의혹과 유추에 동조함으로, 스스로 그들의 도구가 됨으로써 말이다.

잊지 말자. 이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자성 없이는 검찰과 언론의 개혁은 언감생심 요원할 뿐이다. 또한 그러한 자성 없이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 전짓불의 공포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사태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의제는 '윤미향 전 대표가 정당하냐?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이 정당하냐?'에 있지 않다. 개개 사실에 대한 깨알 같은 의혹들은 이미 매체의 선정적인 가십거리로 전락했다. 수사가 시작되었으니 범법적 부정이 있다면 그것은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지적한 대로 '위안부 운동의 방향성'이다. 아마도 오늘의 사태는 이 운동의 변곡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나는 어느 편에선가 이런 어려운 시기에 정의연에 비판을 더하지 말라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운동 조직은 이런 시기가 아니고서는 비판이 외부화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상황을 모르고, 안에서는 비판이 있었어도 다 묻혀왔다고 본다. 그러니 이 사태를 더 생산적인 운동의 계기로 만들려면 이유 있는 비판들이 겸허하게 수렴되어야 한다.
   
'피해자 중심' 아닌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쪽으로 움직여야 옳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앞에서 '제1442차 일본군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정의기억연대 주최로 열렸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앞에서 "제1442차 일본군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정의기억연대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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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의연이 지향해온 위안부 운동을 지지한다. 이용수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해서 수요집회가 폐지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정의연의 이전 활동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위안부의 인권과 일본의 책임을 묻는 운동이 부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위안부 인권 운동을 당사자에 국한된 성폭력 피해 사건과 동일시하여 '피해자 중심주의', '당사자주의'로만 보는 것을 반대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참혹한 고통과 기나긴 트라우마의 시간을 이해하고, 운동의 일선에 나서준 그분들의 용기와 의지에 감사하며, 그분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 그 '의견대로' 단체가 운영되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늘 일치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 단체의 운동은 피해당사자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 운동이 지닌 역사적 성격과 범인류적 지향성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물론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설득과 운동 속에 그들을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단체의 몫이다.

우리는 일본에 사적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과거 범죄행위를 명백히 밝힘으로써, 미래에도 지구상의 어떤 지역에서도 통용되어야 할 가치 규범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전쟁 시 성폭력은 범죄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므로 30년 동안 진상규명, 사과,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후에도 요구되어야 한다. 범죄 당사자가 범죄를 인정할 때까지 이 요구는 유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 운동은 여성 인권운동일 수밖에 없으며, 전 세계 여성과 소통하고 연대하고 확장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일각에서 말하듯, 정의연의 운동이 '이용수 할머니의 뜻에 맞았느냐?' 라는 단순한 잣대로 평가를 하는 것은 실로 곤란하다. 운동 자체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며, 이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그 위에서 새로운 미래가 도모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 운동의 과제는 대중이 변해가는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인이 5월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활동 기간 기부금 유용 등 회계 부정 의혹 등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 해명 나선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인이 5월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활동 기간 기부금 유용 등 회계 부정 의혹 등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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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시민사회단체의 현역 활동가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것을 반대한다. 시민사회단체의 역할과 정당인의 역할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사자가 정치적 역량이 있니 없니 하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 없다. 단지 시민사회운동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고유의 목소리로 정치권을 압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보정권이 들어서면서 특히 곤혹스러워지는 문제다. 진보정당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는 분명 '어제의 동지'였으나 그것이 영원한 관계가 될 수는 없다. 정권의 길과 시민운동의 길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시민사회단체의 대표들이 특정한 정당에 영입되어 정치 일선에 계속 진출한다면 그 단체가 그 정치진영과 유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정치가 단체의 독자성을 구속할까 두려운 것이다. 역으로 해당 시민사회단체의 운동에 우호적인 정권이라면 안 그래도 활발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인데 왜 꼭 단체원이 정치에 직접 나서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정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민사회단체 대표란 적당한 유명세도 있고, 명분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성도 있어서 선거 때마다 빼먹고 싶은 꼬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의 입장에서는 목소리의 항상성을 잃어버릴까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돈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남산 기억의 터에 새겨진 247명의 위안부 할머니들 명단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와 반목한 몇몇 할머니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명단을 제공한 것이 정대협(정의연의 전신)이었다고 하니, 이 사실에 고의성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의연은 이와 관련해 '당시 정대협은 상징적인 위안부 명단만을 제공했을 뿐 해당 사업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편집자 주)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이는 기림터가 세워지던 2004년 이미, 운동의 도덕성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정대협이 그 상징자본으로 스스로 권력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확신에 기초한 권력은 자기중심주의로 경직되기 쉽고, 이 경직성이 늘 대상을 도구화한다. 그렇다. 권력화의 유혹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여기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후지이 다케시는 지난 2일 '뉴스 이제 그만 봅시다'라는 제목의 <한겨레> 기고글에서 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이 직면한 환경적 배경을 직시하면서도, 그래서 힘들었겠다고 납득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민사회 운동의 과제는 '대중들에게 호소하면서 바로 그 대중이 변해가는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전짓불을 들이대는 짓은 그만하고, 의혹도 유추도 그만하고, 이제 위안부 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부터 변화해야 할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동의를 받아 싣습니다.


소문의 벽 (반양장)

이청준 (지은이), 문학과지성사(2011)


태그:#정의기억연대, #정의연, #윤미향, #이용수,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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