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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있었던 연화광산.(1965년) 영풍이 인수하여 개발하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납·아연 광산으로 성장했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있었던 연화광산.(1965년) 영풍이 인수하여 개발하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납·아연 광산으로 성장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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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그룹은 1949년에 설립된 영풍기업사로부터 출발했다. 황해도 출신의 동향인이었던 고 최기호, 고 장병희 두 창업주가 설립한 영풍기업사는 철광석과 농산물을 수출하는 무역회사였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영풍해운(1952년), 영풍상사(1962년)로 상호가 바뀌는 가운데 성장을 거듭했고, 1963년에는 수출상사 실적 5위를 차지했다(이후 영풍상사는 1970년 석포제련소를 설립하고 1978년 ㈜영풍으로 상호를 변경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역상사로 성공을 거둔 영풍은 광업으로 진출해 1959년 칠성광업을 설립했다. 이듬해 국유광업권 공매를 통해 연화광산을 인수하여 개발에 착수했고, 1962년 월 3천 톤 처리 규모의 선광장을 준공해 납과 아연 정광(精鑛)을 생산하기 시작했다(원광석을 선광 처리하여 광물 함유량을 50% 내외로 높인 광석을 정광이라 한다. 연화광산 원광석에는 납과 아연이 평균 10% 내외 또는 그 이하로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다).

1963년 칠성광업이 영풍광업으로 바뀌고 연화광산의 개발 속도는 빨라졌다. 탐광과 시추를 통해 발견된 광맥을 따라 대규모 굴진이 행해지면서 광석 채굴량이 급증했다. 선광장 시설이 1965년 월 1만 톤 처리 규모로 늘어났고 1977년에는 월 6만 톤 처리 규모로 최대에 이르렀다(일제강점기 미쓰비시가 연화광산을 개발할 당시 월 100톤을 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쓰비시는 별도의 선광시설 없이 함유율이 높은 노천광 상태의 아연을 채굴한 것으로 추측된다).
  
연화광산, 한국 최대 납·아연 광산으로 성장하다
 
 납·아연 누적 생산량 순위. 연화광산이 납과 아연 생산량 모두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납·아연 누적 생산량 순위. 연화광산이 납과 아연 생산량 모두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 한국광업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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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이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연화광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납·아연 광산으로 성장했다. 납·아연 누적생산량 순위를 보면 연화광산이 1위인데, 납 생산량은 약 50만 톤으로 전체의 57.1%, 아연 생산량은 97만여 톤으로 전체의 42.6%를 차지했다. 영풍이 개발한 제2연화광산(삼척시 가곡면 풍곡리)도 아연 생산량 2위, 납 생산량 5위를 차지했는데, 두 광산의 생산량을 합하면 납과 아연 모두 점유율이 70% 내외가 된다.

연화, 제2연화를 중심으로 한 광산개발을 통해 영풍은 엄청난 이윤을 얻었다. 한 예로 1972년 영풍광업은 광업계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남겼는데, 당기순이익이 약 4억 86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무려 300%나 증가했다. 1960~1970년대 광산개발을 통해 영풍은 굴지의 광산업체가 되었다.
  
연화광산에서 생산된 아연 정광은 초기에는 전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국내에 아연제련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5년 동신화학의 아연제련소가 설립되면서 연화광산의 아연 정광 일부가 동신화학에 공급되었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70년 석포에 아연제련소를 설립하면서 영풍은 채광→선광→제련으로 이어지는 아연괴 완제품 생산을 위한 일련의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후 계속된 채굴량 증가를 기반으로 또 하나의 아연제련소인 고려아연을 설립했다.

연화광산에서 생산된 아연 정광을 영풍이 자체 제련하게 되면서 아연 정광을 공급받기 어렵게 된 동신화학 아연제련소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문을 닫았다. 국내 아연 시장을 독점하게 된 영풍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93년 연화광산이 휴광하면서 석포제련소와 고려아연은 대부분의 아연 정광을 외국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이후 두 업체는 제련시설을 확대하고 연화광산 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아연 정광을 수입했다. 현재 영풍그룹은 아연 매출 세계 1위(10%)를 차지하고 있다.

연화광산에서 생산된 납 정광 역시 초기에는 전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구리제련소로 출발한 장항제련소(충남 서천군 장항읍)가 1965년 납 제련을 시작하면서 연화광산의 납 정광 일부가 장항제련소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장항제련소는 1936년 설립되어 1989년까지 용광로를 가동하여 구리·납·주석을 제련했는데, 주변 농경지가 비소, 카드뮴, 납 등의 중금속에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현재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정화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십)억 년 세월 동안 봉화군 석포면 연화산에 잠들어 있던 광물이 근대화의 미명 하에 장항으로 쫓겨가 농토를 병들게 하는 오염원이 된 셈이다.

일본 기술자, 연화광산 개발에 참여하다
 
 연화광산 갱내에서 광부가 착암기를 사용하여 바위에 구멍을 뚫고 있다.(1965년) 구멍에 폭약을 넣고 폭파한 후 부서진 광석을 광차에 싣고 갱 밖으로 운반한다. 연화광산 개발 초기 착암기 등 대부분의 장비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고 한다. 이후 영풍은 영풍빗트공업(영풍기계공업)을 설립하여 일본 고하(古河)광업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착암기를 생산했고 한국형 착암기도 개발했다.
 연화광산 갱내에서 광부가 착암기를 사용하여 바위에 구멍을 뚫고 있다.(1965년) 구멍에 폭약을 넣고 폭파한 후 부서진 광석을 광차에 싣고 갱 밖으로 운반한다. 연화광산 개발 초기 착암기 등 대부분의 장비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었다고 한다. 이후 영풍은 영풍빗트공업(영풍기계공업)을 설립하여 일본 고하(古河)광업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착암기를 생산했고 한국형 착암기도 개발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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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광산 개발 과정에는 일본 기술자도 참여했다. 개발 초기부터 참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65년 한일기본협약 체결 이후 일본의 기술자들이 영풍의 초청으로 입국해서 연화광산 조사에 참여하는 등의 지원을 한 것은 확인된다.

언론에 보도된 외국인 입국 동향을 보면, 1966년 일본광업협회 소속 11명의 광업시찰단이 대한광업회 초청으로 입국해 2주일간 체류했는데, 명단에는 도호아연(東邦亞鉛) 기술자 니시하라 모토오(西原元男)가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해 일본 기술자 하나사키 카즈오(鼻崎和夫)가 영풍광업 초청으로 입국해 150일간 체류했다.

이듬해에도 사사쿠라 마사오(笹倉正夫)가 입국해 6개월간 체류했으며, 그 외에도 시다 마사아키(紫田昌明), 오오히가시 모리히데오(大東森秀夫), 코바야시 세이노스케(小林誠之助) 등의 일본 기술자가 영풍광업 초청으로 입국해 약 한 달간 체류했다.

일본 기술자들은 한국의 광산을 시찰하고 정보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도호아연의 니시하라 모토오는 영풍광업 기술자와 함께 연화광산을 세밀하게 조사했으며 연화광산의 광상과 구조에 관한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니시하라 모토오의 논문(1970)에는 1967년 입국해 6개월간 체류한 사사쿠라 마사오가 영풍광업의 고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풍은 영풍해운(영풍상사)을 통해 철광석과 연화광산의 납·아연 등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광산·제련 회사와 연결되었고 특히 도호아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호아연은 이후 영풍 석포제련소 건설 과정에서 기술을 지원했다.

연화산이 고향인 이상식 영풍제련소봉화군대책위원회(봉화군대책위) 대표가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미쓰비시는 연화산에 아연이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서도 채굴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8.15해방 후 일본으로 쫓겨 가면서 50년 뒤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미쓰비시의 바람처럼 역사가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구식민지 체제가 끝나고 20여 년 만에,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조국 근대화' 구호 아래 도호아연 기술자들이 연화광산을 조사하고 개발하는 데 참여했고 석포제련소 건설 과정에서도 기술 지도를 하게 되었다.
  
영풍이 재벌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축적된 광산·제련 기술이 큰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기술자들이 전해준 기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화광산과 석포제련소 운영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영풍 자본의 성장과 석포 자연의 파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수평갱과 수직갱, 거미줄처럼 파고들다
 
 1968년 말의 연화광산 갱내 평단도. 수평갱과 수직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일본 도호아연의 기사 니시하라 모토오의 1969년 논문 “연화광산의 광상과 성인에 대하여”에 실려 있다.
 1968년 말의 연화광산 갱내 평단도. 수평갱과 수직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일본 도호아연의 기사 니시하라 모토오의 1969년 논문 “연화광산의 광상과 성인에 대하여”에 실려 있다.
ⓒ 니시하라 모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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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광산 개발은 수평갱에서 시작하여 광맥을 따라 더 멀리, 더 깊이 파고들어 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풍은 연화산 중턱에 대절갱(1963년)과 중앙갱(1968년)이라 이름 붙인 두 개의 수평갱을 만들었고, 두 갱을 기점으로 갱도를 연장하고 수직갱(수갱)도 만들었다. 맨 먼저 만들어진 대절갱은 '0번갱'으로도 불리었다.
  
니시하라 모토오의 논문(1969)에 따르면, 1968년 말 당시 연화산(해발 1053m)의 갱도는 대절갱(해발 637m)을 기준(0m)으로 해서 상부는 265m까지 하부는 -180m까지 만들어졌다. 하부의 수평갱은 60m 간격으로 되어 있는데 심도가 점점 깊어져 1970년대 후반에는 -600m까지 내려갔다.
 
 연화광산은 세 지구로 나뉘어 개발되었다. 연화산에 있는 본산지구가 먼저 개발되었고 이어서 동점지구와 태백지구가 차례로 개발되었다.
 연화광산은 세 지구로 나뉘어 개발되었다. 연화산에 있는 본산지구가 먼저 개발되었고 이어서 동점지구와 태백지구가 차례로 개발되었다.
ⓒ 구글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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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광산 운반계통도. 남산수갱(1969), 중앙수갱(1975), B.C(벨트 컨베이어) 사갱(1977), 동점수갱(1982), 태백수갱(1987) 순으로 준공되었다.
 연화광산 운반계통도. 남산수갱(1969), 중앙수갱(1975), B.C(벨트 컨베이어) 사갱(1977), 동점수갱(1982), 태백수갱(1987) 순으로 준공되었다.
ⓒ 한국광업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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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광산은 본산지구(연화산), 동점지구(태백시 동점동), 태백지구(태백시 장성동) 세 지구로 나뉘어 개발되었다. 본산지구가 먼저 개발되었고 규모도 가장 컸는데, -600m 레벨에서 광맥의 하한이 드러나면서 광량이 크게 줄어들자 동점지구와 태백지구 개발로 이어졌다.

광석 운반은 초기에는 수갱을 통해 권양기(hoist)로 지상으로 끌어올린 후 축전차나 디젤 기관차로 선광장까지 옮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7년 벨트 컨베이어 사갱(2720m)이 완공된 후에는 -600m 레벨에 광석을 모아서 파쇄한 후 벨트 컨베이어를 이용해 바로 선광장으로 옮겼다.

재해 일어나면 폐갱 붕괴될 수 있어
 
 연화광산이 있었던 연화산 중턱. 현재 일대는 사유지로 되어 있고 경작과 동물사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표면 아래에는 연화광산의 폐갱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연화광산이 있었던 연화산 중턱. 현재 일대는 사유지로 되어 있고 경작과 동물사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표면 아래에는 연화광산의 폐갱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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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이 30여 년 동안 연화광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연화산은 무분별하게 파헤쳐졌다. 봉화문화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연화봉 산록에는 호랑이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약 500m 길이의 평천(坪川)동굴이 있었는데, 연화광산 개발로 동굴이 파손되어 200m 정도만 남았으며 그나마 길이 험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1998년 연화광산이 폐광된 후 땅 위의 광산 건물은 일부만 남고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하지만 몇 겹으로 엉킨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만들어진 땅속의 갱도는 길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미로의 상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연화광산이 있었던 연화산 중턱의 땅 일부가 현재 종교단체의 소유로 되어 있고 그곳에서 경작과 동물사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땅을 파고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대절갱 높이(해발 637m)보다 아래에 있는 폐갱도에 지하수가 차면서 대절갱과 중앙갱 입구를 통해 갱내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대절갱 높이보다 위쪽에 있는 폐갱도는 비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지진이나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동공(洞空) 상태의 폐갱도가 붕괴될 수도 있다.

'갱내 현황도'만이 붕괴 예방 할 수 있어
 
 봉화군대책위 이상식 대표가 어렵게 구했다는 연화광산 갱내 개략도. 가운데 해마 모양을 한 부분이 연화산의 아연 광체이다.
 봉화군대책위 이상식 대표가 어렵게 구했다는 연화광산 갱내 개략도. 가운데 해마 모양을 한 부분이 연화산의 아연 광체이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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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식 봉화군대책위 대표는 현재 진행되는 영풍 석포제련소의 환경오염 문제도 중요하지만 연화광산으로 인한 환경오염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군의원 시절(2014~2018) 연화광산 갱내 현황도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구할 수 없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전혀 없어요. 이건 '연화 갱내 개략도'잖아요. '갱내 현황도'가 필요해요. 현황도에는 몇 미터 들어가서 어디로 커브가 틀고 어디가 수직갱이고 어디에 얼마만큼의 뭐가 있고, 이런 것들은 실제 (현황도가) 있어야 파악을 하고 대비를 할 수 있는데 전혀 없어요."

이상식 대표는 폐갱으로 인해 연화산이 붕괴되는 것을 막으려면 갱내 구조를 자세히 기록한 현황도가 필요한데 관련 행정기관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영풍은 연화광산을 개발해 엄청난 이윤을 남겼지만, 개발가치가 사라지자 파괴한 자연을 복구하기 위한 근거도 남기지 않은 채 철수했다.
  
연화산의 속을 채우고 있던 수백만 톤의 광물이 착암기와 폭약에 의해 파헤쳐져, 납과 아연은 산업화의 원소이자 영풍 자본의 영양소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폐석과 폐광미가 되어 일부는 강에 버려졌고 나머지는 계곡에 묻혔다.

연화광산이 문을 닫은 지 20년이 넘었다. 연꽃봉오리를 닮은 연화산은 알맹이를 파먹히고 허깨비가 된 채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봉화군 석포면에 있는 연화산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연재 글은 ‘⑨ 연화광산 갱내수와 선광장 오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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