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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날, 남편은 개성이 고향인 시아버지께 태블릿PC로 위성 지도를 찾아 현재 개성의 모습을 보여드렸다. "기차역은 지금도 그대로 쓰나 보네. 이쪽 냇가가 그때도 꽤 컸었지." 시아버지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살았던 동네를 자세히 기억했다.

한국전쟁 중에 남원까지 피난을 갔던 시아버지는 두 형과 뿔뿔이 헤어졌는데, 전쟁이 끝난 후 우연히 길에서 차례차례 다시 만났다. 삼 형제는 기적처럼 어머니와 다시 한자리에 모였지만 아버지와는 영영 만날 수 없었다. 통일되면 사시던 동네에 꼭 가보자는 남편의 말에 시아버지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 실향민이었던 친정아버지도 지금쯤 북녘 고향을 바라보고 있을까 싶었다. 아버지는 이북5도청에서 관리하는 실향민을 위한 동화경모공원 묫자리를 일찌감치 사놓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시고 가보니, 파주에 있는 그곳에서 멀리 한강과 임진강을 넘어 북한이 보였다.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죽은 고인들의 넋을 이렇게라도 달래주고 있구나 싶었다.
 
만화 <건너온 사람들>
 만화 <건너온 사람들>
ⓒ 책상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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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거제도에 도착한 사람들

두 분이 어릴 적 자유롭게 뛰놀던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이 다가오고 있다. 홍지흔의 다큐 픽션 만화 <건너온 사람들>은 그로부터 육개월 뒤, 1950년 12월에 있었던 연합군의 흥남 철수 작전을 배경으로 한다.

16살 소녀 '경주'는 10만 명에 가까운 피난민 행렬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지만, 가족 모두 마지막 민간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무사히 탑승한다. 12월 23일, 피난민 14000여 명을 태우고 흥남을 출항한 배는 사흘 뒤인 12월 25일, 남쪽 끝의 섬 거제도에 도착한다.

폭탄이 떨어지는 불바다 속에서도 "바다를 건너는 사흘 동안 아무도 죽지 않고, 다섯 명의 건강한 아이도 태어난 이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부른다"는 문장에서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

서울이 고향인 친정어머니 역시 한국전쟁 때 거제도로 피난을 갔다. 친정어머니는 종종 식탁 머리에서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당신의 전쟁 기억을 생생하게 나에게 들려준다. 집 밖에 전투기 소리만 나면 폭탄이 떨어질까봐 온 가족이 담요와 이불을 쌓아 올린 식탁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시 과학연구소에 납품하는 실험용 토끼와 쥐를 키우던 외할머니는 생물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피난을 미루었다. 하루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마당의 닭과 토끼를 모두 가져갔는데, 한 번에 총으로 쏴서 죽여 가마니에 넣고 끌고 간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군인들이 어깨에 멘 탄띠를 처음 보았고, 무시무시한 자동소총 소리를 난생처음 바로 옆에서 들었다고 한다.

부서진 과거를 수선해온 사람들의 목소리

친정어머니 가족은 1·4후퇴 때 친척이 사는 거제도로 서둘러 피난을 갔다. 피난 생활은 궁핍하고 힘겨웠다. 하지만 거제도에서 다시 초등학교에 다니고, 밤에 친구들과 수영을 하고, 한산도로 졸업 여행을 갔던 이야기를 할 때, <건너온 사람들>에서 무거운 흑백에서 컬러로 색채가 전환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경주네 가족이 처음 거제도에 내렸을 때 본 것은 초록으로 펼쳐진 청보리밭이었다. 눈이 어른 키만큼 쌓여 봄까지 그대로인 함경도 고향에선 보지 못했던 목련꽃 역시 아름답게 피어난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 소개를 보면, 홍지흔 작가는 "엄마와 이모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추억은 언제나 섬세하고 유쾌했다. 그것은 아마 숨은 자리에서 끊임없이 지나간 아픔을 헤아리고, 부서진 과거를 수선해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작가의 이 말은 2차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자 병사 200여 명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과도 통한다.
 
"여자들은 다른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기억하는 방식도 다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는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이 함께 한다."
  
<건너온 사람들>은 픽션 드라마이지만, 구술 전승(oral-tradition)이 더해진 작가의 내레이션은 70년 전 한국전쟁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나게 했다. 외부에서 기록한 전쟁의 현장만큼 전쟁을 겪고 목격한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과 목소리도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그들이 몸으로 건너온 것은 바다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그들이 건너온 전쟁의 시간들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건너온 사람들

홍지흔 (지은이), 책상통신(2019)


태그:#한국전쟁 , #625전쟁, #건너온 사람들, #홍지흔 ,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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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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