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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수
 박창수
ⓒ 의문사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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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는 1960년 출생으로 필자와 동갑내기다. 그는 29년 전인 지난 1991년 5월 6일 새벽 4시 40분경, 사랑하는 아내, 6살 된 아들과 4살 된 딸을 두고 의문사 했다. 당시 그의 죽음을 놓고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 요원의 개입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타살 여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왜 불과 31세의 나이에 처자를 남겨두고 저세상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1981년 8월 박창수는 부산의 대한조선공사(1990년 한진중공업으로 변경)에 배관공으로 입사했다. 노조 개혁과 노동조건 개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입사 5년 후인 1986년부터 대한조선공사 내 어용노조 퇴진과 노조위원장 직선제를 내용으로 한 노조 개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에 참여했다.

1987년 7월 25일 노조위원장 직선제가 도입되자 그때부터 박창수는 직선제로 선출된 노조위원장 집행부에서 활동했고 1990년 7월 노조위원장 선거에서는 위원장으로 당선했다.

그는 노조위원장뿐만 아니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아래 전노협) 산하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했고, 1990년 12월 9일 발족한 대기업 연대회의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상황
 

한편 회사 측은 단체협상 거부 의사를 밝히며 전노협과 대기업 연대회의에서 탈퇴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사측은 안기부와 정보를 공유했다. 안기부 요원 홍아무개는 한진중공업 노조 관계 정보를 수집했다. 부산영도경찰서 형사들과 안기부 요원 홍아무개는 박창수와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들의 동향을 탐지하는 한편 이들을 만나 전노협 탈퇴를 회유했다.

한편 박창수는 1991년 2월 대기업 연대회의 회원 단체인 대우조선의 파업을 지원하는 문제를 논의하려고 대표자 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이날 회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파업 지원을 실행한 사실이 없이 단순히 논의한 것만으로 이들을 구속했는데 이는 대기업 연대회의를 무력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박창수는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고 1991년 2월 12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노조위원장인 박창수가 구속되자 연대 기구 탈퇴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경찰과 안기부 요원들은 노조 간부들에게 연대회의 탈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면 박창수를 석방하겠다는 회유를 했고 심지어 노조 간부들을 매수하려 했다.

한편 박창수는 가족이 걱정돼 서울구치소로 면회하러 온 아내에게 당시 살고 있던 부산에서 부모가 기거하고 있는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아내가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것을 거절하자 그의 가족 걱정은 더 커졌고 변호인과 접견할 때 초조해 하면서 빨리 석방될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고민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자던 박창수는 1991년 5월 4일 오전 10시 15분경 서울구치소 운동장에서 운동 도중 자해하려고 자신의 이마를 벽 모서리에 부딪혀 두개골 골절과 함몰골절상을 입었다. 그는 오전 11시 50분경 안양병원 응급실로 호송되어 봉합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노조 간부들은 5월 4~5일 안양병원에서 박창수를 면회했다. 박창수의 아내는 4일 밤 11시 30분경부터 병원에서 박창수를 간호했다. 박창수의 동생과 노조 간부들은 5일 오전 11시경부터 안양병원 중환자실 옆 휴게실 또는 인근 여관에 머물러 있었다. 박창수의 부모는 5일 오후 아들을 문병하고 밤에 떠났다.

노조 간부들은 5일 오후 2시경 담당 교도관으로부터 박창수의 상태가 양호해 다음 날(5월 6일) 서울구치소로 이송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날 오후 5시경 박창수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다. 이에 박창수는 "무조건 구치소로 들어가면 안 된다. 여기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안기부 요원 홍아무개 하고는 얘기가 잘 되니 전화 한번 해 봐라"라고 부탁했다.

이에 노조 간부는 5일 오후 6시경 병원 전화로 부산에 있는 안기부 요원 홍아무개에게 박창수가 병원에서 계속 치료받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홍아무개는 "내일 오전 10시까지 답변을 주겠다"고 대답했다.

사건 당일
 

한편 박창수의 부모와 동생은 1991년 5월 5일 안기부 요원이 안양병원에 와서 박창수를 면회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또 6일 새벽 1시경부터 중환자실 근무를 서던 교도관도 안기부 요원이 안양병원에 온 적이 있다는 얘기를 확실히 들은 바 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그래서 의문사위는 안기부 요원이 박창수 의문사 직전에 함께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자료요청 거부로 이 안기부 요원의 인적사항은 파악하지 못했다.

한편 2명의 교도관은 6일 새벽 1시부터 중환자실 밖 벤치에 앉아 박창수를 감시했다. 박창수의 동생은 이날 새벽 3시 30분에서 4시경 박창수를 15분 정도 면회한 후 중환자실 옆 휴게실에서 잠을 잤다. 새벽 3시경부터 2명의 교도관은 중환자실 밖 의자와 옆 휴게실에서 졸았다. 박창수의 아내는 중환자실 보조 침대에서 잠을 잤다.

간호사 홍아무개는 6일 새벽 4시 40분경 박창수가 왼손에 링거병을 든 채 혼자 중환자실을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병원 3층에서 근무했던 병원 직원은 새벽 3시경에서 5시경 얼굴이 부어 보이는 30대 초반 정도의 남자 환자 1명이 팔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링거병을 든 보호자로 보이는 듯한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 정도의 남자 1명과 함께 계단을 통해 2층 중환자실 병실 쪽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 직원은 그 환자가 박창수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당시 안양병원 5층 병실 환자 두 명은 박창수가 의문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6일 새벽 4시 40분경 6층 옥상에서 "아~아"하는 고함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들었고, 그런 소리를 들은 지 3분 정도 지난 후 1층 바닥에서 "퍽" 하고 쌀가마니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병원 직원 강아무개와 옥상에서 근무했던 전화교환수 송아무개도 위와 같은 시각에 1층 콘크리트 바닥에서 "퍽" 하면서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으나 비명은 못 들었다고 진술했다. 반면 당시 1층 수위실에서 근무하던 오아무개는 위와 같은 소리를 전혀 들은 바 없다고 진술했다.

교도관 최아무개는 박창수가 사망하던 날 새벽 4시 40분경 졸다가 깨어나 박창수가 중환자실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중환자실 밖 긴 의자에서 자고 있던 교도관 유아무개를 깨워 화장실 등을 찾아보았으나 박창수가 보이지 않았다. 최아무개는 병원 정문 경비원이 박창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2층 중환자실로 올라오다가 교도관 유아무개와 박창수 동생을 만나 박창수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간호사 홍아무개 등은 그날 새벽 4시 40분경 중환자실을 나간 박창수가 10분 정도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중 교도관 1명이 와서 그에게 이 사실을 얘기해 주자 교도관이 급히 찾으러 나갔다고 했다.

간호사 홍아무개는 중환자실을 거쳐 3층 화장실에 가서 1층을 내려다보다가 박창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홍 간호사는 1층으로 내려와 병원 입구에서 교도관과 박창수 동생을 만난 뒤 경비원이 열어준 문을 나가서 박창수의 사체를 확인했고,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와 서울대 법의학 교실 재감정 소견은 박창수의 우폐가 파열되었고 좌우 양 폐 내에 출혈이 있었으며 심장·간·비장 등의 내부 장기가 파열된 것으로 볼 때 사인은 심폐파열 및 내출혈이고, 이와 같은 광범위한 내부 장기 손상과 발꿈치뼈, 발바닥뼈에 분쇄 골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창수가 높은 곳에서 추락하면서 체중에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 양발이 먼저 바닥에 닿는 입위(立位)추락사 한 것으로 감정했다.

반면 일본의 법의학자 카미야마 시게다로는 "박창수 주검에 나타난 목 뒷덜미 부분의 조직 출혈은 추락사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것으로 구타 등 외력 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양다리의 골절도 구타에 의해 나타나는 형태를 보이며 손목 상처는 수갑 같은 것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의문사위에 제시했다.

의문사위는 박창수가 1991년 5월 6일 새벽 4시 40분경 혼자 안양병원을 나간 점, 그 시각에 옥상에서 비명이 들리고 3분 후쯤 1층 콘크리트 바닥에서 "퍽" 하면서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난 점 등에 비추어 박창수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을 개연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타살 가능성
 

하지만 의문사위는 당시 1층 경비실에 있던 경비원이 아무 소리를 들은 바 없다고 진술한 점과 박창수 안기부 담당관이 홍아무개 외에도 또 다른 요원이 있을 수 있다는 안기부 요원 최아무개의 진술, 그리고 박창수 사체의 후경부(목 뒤쪽) 조직 내 출혈이 추락에 의해 발생하기 어려운 손상이라는 일본 법의학자 소견을 고려할 때 타살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망 직전 정체불명의 동행인이 그를 부축해 병원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고 10분 후 '쿵' 하는 소리가 난 점 등으로 볼 때 자살로만 볼 수 없다고 의문사위는 추정했다. 의문사위는 또한 박창수 의문사 전날에도 안기부 직원이 그를 면회했으며, 특히 사망 직전 그의 동행인은 키 170㎝ 정도로 머리가 짧은 군인 생김새였다는 목격자의 진술로 볼 때 이 동행인이 안기부 직원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박창수의 부친도 "숨지기 전날 밤 화장실로 가는 도중 창수가 '저 사람이 안기부 직원'이라며 누군가를 지목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증언했다. 또 당시 병원 간호사 강아무개는 "박씨가 숨지기 직전인 1991년 5월 6일 새벽 3~4시께 누군가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봤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더욱이 박창수가 의문사하기 전 안기부 요원으로 의심되는 신원 불명의 남자들이 그의 병실을 드나들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또 쇠창살과 자물쇠로 봉쇄돼 있던 6층 옥상에 박창수가 어떻게 올라갔으며, 자살하려고 했다면 왜 굳이 링거 바늘을 달고 옥상에 올라갔었는지도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다.

의문사위는 박창수의 사인을 밝히려고 지난 2003년 12월 10일 스턴트맨을 동원해 추락 실험을 했다. 스턴트맨 2명이 19.7m 높이의 훈련탑에서 한 차례씩 자유 낙하 한 결과 수평 거리는 각각 2.5m와 3m로 측정됐다. 당시 스턴트맨은 "무릎에 약간의 반동을 줘서 뛰어내렸다. 만일 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힘을 줘도 3m를 넘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창수의 사체는 수평거리 3.8m에서 발견됐다.

박창수 사건을 조사하던 우필호 조사관은 "실험 결과가 박창수의 시신이 발견된 3.8m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당시 검찰이 정확하게 수사한 것인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박창수 사체는 수원지검 강력부가 맡았다. 사체 부검과 관련해 검사 박아무개와 유족 측은 1991년 5월 6일 정오경 안양병원에서 유족 측이 요구하는 의사와 변호사가 입회해 부검하기로 합의한 후 시신을 영안실로 옮겼다.

그러나 박아무개 검사는 유족 측 노조원들이 그날 오후 1시경 위 합의를 어기고 부검을 하지 못하도록 일방적으로 영안실을 점거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유족 측은 당시 노조원들이 많이 올라와 빈소를 영안실에 차려놓고 문상을 했고, 노조원들이 영안실에 다 못 들어가다보니 영안실 밖에 모여 있었던 것이며 오히려 경찰들이 안양병원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시신 탈취 후 강제 부검
 
 1991년 5월 7일 박창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백골단이 영안실벽을 뚫고 난입하고 있다.
 1991년 5월 7일 박창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백골단이 영안실벽을 뚫고 난입하고 있다.
ⓒ 의문사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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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은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가 시신을 탈취하고 강제 부검을 집행했다.
 검찰은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가 시신을 탈취하고 강제 부검을 집행했다.
ⓒ 의문사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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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검찰은 1991년 5월 7일 새벽 5시경부터 오후 1시 30분경까지 사복경찰인 '백골단'을 동원해 해머로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가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 2시 30분경 영안실에서 유족 측이 요구하는 의사와 변호사가 입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박창수의 부검을 강제로 집행했다.

박창수 유족 측과 한진중공업 노조원 등은 강력히 항의했다. 그 후 한진중공업 노조, 전노협 등은 박창수 의문사와 관련해 사인 규명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며 파업을 했다. 이에 대해 회사와 노태우 정권은 파업 주동자를 해고하고 구속했다. 이렇게 부검 이후 강제 부검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구속되자 노동계 관계자들은 '박창수 사인 규명',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지난 2003년 의문사위는 국정원에 박창수 사건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박창수 관련 자료를 공개할 수 없거나 자료가 없다고 회신했다. 국정원은 대통령소속인 의문사위의 국정원에 대한 현지 실지조사조차도 거부했다.

여기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약 국정원이 박창수의 죽음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면 왜 의문사위의 자료 요청과 현지 실지조사를 거부했을까? 자신이 정말 결백하다면 관련 자료를 전부 공개하고 "언제든지 와서 마음대로 보세요"라고 큰소리치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

의문사위는 지난 2004년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첩보업무 등을 수행하는 안기부(국정원)가 개별 기업의 노사관계 등 노동관계에 구체적으로 개입한 것은 위법부당한 행위로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사위는 관련 자료 부족으로 박창수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실규명불능'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 (박창수) 사망 현장에 같이 있었을 (안기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동행인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자·타살 여부 및 그 진상을 확인할 수 없다.

2. 본 사건에 안기부 요원의 개입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국가정보원은 대기업 연대회의와 전노협 관련 대책, 동행인 관련 안기부 관련 부서의 20~30대 직원의 인적사항 등 (의문사위) 관련자료 요청에 협조하지 않았다.

3. 이와 함께 당시 안양병원 수위 오아무개가 제기한 타살 후 시체유기 가능성, (1991년) 5월 5일 안양병원을 방문한 안기부 직원의 인적사항 확인 및 경위 조사, 그리고 추락 시에 생긴 것이 아닌 것으로 감정된 박창수의 후경부(목 뒤쪽)조직 내 출혈 등에 대한 법의학 사항 등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필자와 동갑 내기인 박창수의 의문사는 29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자·타살 여부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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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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