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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존재다. ‘이음과 매개, 변화와 극복’은 자기희생 없인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다리부터, 최신 초 장대교량까지 발달되어온 순서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공학기술은 물론 인문적 인식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기자말]
흥정천에 징검다리와 섶다리를 이어서 놓은 풍경
▲ 흥정천에 놓인 다리 풍경 흥정천에 징검다리와 섶다리를 이어서 놓은 풍경
ⓒ 네이버블로그/arumdaunj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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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봉평 흥정천에도 섶다리가 있다. 이 마을에서는 소설가 이효석을 테마로, 해마다 '메밀꽃 문화축제'를 개최,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봉평 장터에서 이효석 생가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남북으로 흐르는 흥정천을 건너야 한다.

냇가엔 여러 갈래 징검다리와 섶다리를 예쁘게 꾸며 놓았다. 이 섶다리는 축제와 방문객을 위해서 만든 다리로 보인다. 예전부터 흥정천에 징검다리 등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섶다리가 있었을 개연성은 낮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정천에 마련된 여러 모습의 다리들은 서로 조화로워 아름답기만 하다.

우리네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강가 풍경이 연출된다. 이효석 작품 대부분이 향토적인 서정을 그리고 있다. 주로 암울하던 1930년대를 전후한 잊힌 우리네 풍경들이다.

그러하듯 이 마을 곳곳에 기억에 남아 있는, 아련한 정서를 자극하는 소품들이 널려 있다. 또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묘사하는 드넓은 메밀밭과 장터, 물레방앗간 등을 재현해 연출하고 있다. 아울러 인형으로 만든 등장인물이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 곳곳에 자리해 있기도 하다.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이 지났을 곳
 
초가을 메밀꽃 문화축제를 찾은 사람들이 섶다리를 건너는 풍경
▲ 흥정천 봉평 섶다리 초가을 메밀꽃 문화축제를 찾은 사람들이 섶다리를 건너는 풍경
ⓒ 네이버블로그/arumdaunj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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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에서 대화까지는 산 넘고 물 건너 칠십 리 길이다. 장돌뱅이들은 무거운 짐을 등에 메고, 나귀에 싣고, 이 길을 걸어 다녔다. 소설에서는 '개울을 하나 건너고'라고 묘사 했으나, 실제로는 네댓 번 물길을 건너야 대화 장터에 당도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허 생원과 조 선달, 동이 일행이 봉평을 떠나 대화로 가면서 섶다리를 건넜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메밀꽃이 절정인 시기는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초·중순이다. 따라서 '흔붓이 흘리는 달빛에 소금을 뿌린 듯 피었을 메밀꽃'이 펼치는 장관은, 여름 홍수기를 한참 지난 시기이다. 또한 가을 태풍이 잦은 계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일행이 흥정천과 덕개수천, 그 지류들을 지나면서 섶다리를 건넜을 확률은 낮다는 것이다. 여름 홍수에 떠내려갔을 개연성이 높다. 너무 멋없고 매정한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네들은 당나귀를 끌고, 다른 방법으로 냇물을 건넜으리라.
 
허 생원이 살아 온 이야기를 하던 물레방앗간을 재현해 놓은 모습
▲ 물레방앗간 모형 허 생원이 살아 온 이야기를 하던 물레방앗간을 재현해 놓은 모습
ⓒ 스마트 강원관광 DB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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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봉평에서 대화장터로 향하는 세 사람을 형상화한 인형
▲ 대화장터로 가는 허 생원과 동이 소설 속 봉평에서 대화장터로 향하는 세 사람을 형상화한 인형
ⓒ 스마트 강원관광 DB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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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상상을 자극하는 여러 장치에도 불구하고, 허 생원과 동이가 굳이 부자관계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쩌면 동이라는 아이는, 허 생원 인생에서 무지개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허 생원은 하룻밤 풋 사랑을 나눈 여인을 그리워한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을 거란 희망으로 살아간다. 그 여인을 다시 만나려고 늘 같은 길을 걷는다. 조 선달은 허 생원이 하는 그 얘기를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듣고 살았다.

허 생원은 동이가 당나귀를 몰 때 왼손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다. 그러고선 자신을 꼭 빼닮은, 자기 아들이라고 혼자 규정짓는다. 무지개를 좇는 순수함과 애잔함이 묻어난다. 동이는 그런 허 생원의 의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소설 속 상상의 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 훨씬 아련하고 더 운치 있어 보인다.

봉평에 가거들랑 섶다리 몇 개는 부디 건너보시길

이렇게 멋진 관계가 현실 세계로 들어와 이어짐과 끊김이 반복되면서 나빠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어짐과 끊김에는, 같은 핏줄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어짐을 지켜내고 간직하지 못한다면, 다른 핏줄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 우린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비일비재하게 겪거나 보고 있지 않은가?

둘이서 제천까지 가면서, 멋진 섶다리 몇 개를 부디 건너기를 바란다. 부자관계가 아니어도, 새롭게 만들어진 이어짐을 굳건하게 지켜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혈연으로 맺어지진 않았어도, 끊김이 없는 애틋함을 지켜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 사이에 진정한 '이어짐'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처럼, 달 밝은 밤에 피어있는 메밀밭 풍경
▲ 메밀꽃 피어있는 저녁 풍경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처럼, 달 밝은 밤에 피어있는 메밀밭 풍경
ⓒ 스마트 강원관광 DB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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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대목은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흔붓이 흐르는 달빛'과 '하얀 소금을 뿌린 듯 숨 막히게 피어나는 메밀꽃'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소설에 묘사된 이 풍경 덕분으로, 봉평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건 사실인 것 같다.

이런 현상이, 과연 문학이 갖는 힘일까?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셋이서 밤길을 걷는 모습이다. 허 생원이 동이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여인을 만난, 그 밤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대목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 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다가오는 가을에는 봉평 흥정천 섶다리에 서서 흐붓한 달빛 아래 소금을 뿌린 듯 숨 막히게 피어나는 메밀꽃을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태그:#메밀꽃 필 무렵, #흥정천 섶다리, #허 생원과 동이, #이효석, #메밀꽃 문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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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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