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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에 처음 인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여행기는 지난해 2019년 8월, 인도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기자말]
갠지스 강이 불어 가트가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
▲ 한여름의 바라나시 갠지스 강이 불어 가트가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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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에 머무는 일주일 중 사흘을 앓아누웠다. 설사병을 동반한 물갈이로 숙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또, 잠을 잘 때는 마치 빈대에 물린 것과 같은 환각에 시달렸다. 인도에 오면 한 번쯤은 겪는 증상이고, 외려 여행 초반에 배앓이를 하는 게 감사하기도 했지만 밖에 나가는 게 꺼려졌다. 지금 나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끼니를 해결하는 일만큼 어려운 게 없었고,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앞으로 남은 두 달간의 여정은 부담으로 돌아왔다. 언제 라다크까지 갈 것이며, 언제 또 파키스탄 훈자까지 가겠는가. 그대로 현지 설사약을 먹고 나니 셋째 날부터는 퍽 괜찮아졌다. 현지에서 걸린 병은 현지 약으로 낫는다는 말이 과연 사실인 모양이다. 덕분에 현지인들만 가는 로컬 식당은 못 가더라도 한국 음식을 먹거나 그나마 깔끔해 보이는 식당 정도는 갈 수 있게 되었다.

물갈이에서 벗어나니 이제야 바라나시가 눈에 들어왔다. 힌두교의 성지이면서 여행자들의 성지. 인도에선 가장 성스럽고 보수적인 도시이지만, 여행자들에겐 가장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이곳.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 없이 가트라고 불리는 강가 옆 돌계단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하염없이 멍을 때리고 밀크티를 마시던 풍경.

하지만 그런 공동체적 이상향을 지향하던 바라나시는 한여름엔 존재하지 않았다. 강물이 불어 가트는 이미 잠겨버린 지 오래. 겨울만큼이나 사람도 없고, 사람들이 쉽게 모일만한 공간도 없는 8월의 바라나시에선 사람들을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혹시 한국분이시면..." 누군가 말을 걸었다
 
여름과 달리 강물이 빠져 가트가 모두 드러난 모습. 2015년 12월 2일 촬영.
▲ 한겨울의 바라나시 여름과 달리 강물이 빠져 가트가 모두 드러난 모습. 2015년 12월 2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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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밀집되어 있는 바라나시의 골목
 숙소가 밀집되어 있는 바라나시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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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한국 분이시면 같이 흡연하러 가실래요?"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식당에서 처음 말을 걸었던 그는 내가 여기 바라나시에서 본 첫 번째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게 한국인이 많이 간다는 숙소에도, 식당이나 여행사, 상점이 모여있는 거리에도 한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겨울 같은 성수기가 아니고서야 그저 그림이나 다름없을, 한국어가 적힌 간판은 외려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그는 내 앞에 놓인 담뱃갑과 라이터를 보았을 테고, 두 번째로는 내가 한국 사람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외형적인 면에서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인 게 티가 났거나, 아니면 한국 사람이 아니면 가지고 있지 않을 물건을 가지고 있었거나. 여느 여행자들이 다 그렇듯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여행을 주제로 흘러갔다. 그동안 여행 중에 다녔던 곳이라던가, '이후엔 파키스탄 훈자에 간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흔하디흔한 대화 주제들이었다.

델리로 처음 들어와 인도 여행을 시작한 지 나흘 정도 되었다는 그의 표정과 말투는 어딘가 순박해 보였다. 여행자 거리인 빠하르간즈에서 여행자를 대상으로 호객하는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재밌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인도 여행이 처음이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또 한편으론, 누군가 먼저 다가와도 여유를 느낄 줄 아는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4년 전 처음 인도 여행을 떠났던 내 모습도 그랬던 것 같았다. 모든 게 새로웠다. 인도인에게 먼저 말도 걸고, 사진을 찍어도 되냐면서 다가갔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흥미를 잃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어떤 패턴으로 흘러갈지 선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저 형식적으로 지나쳐야 할 도시인 바라나시가 그에게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여행자들이 오지 않아 한산한 레스토랑의 모습
 여행자들이 오지 않아 한산한 레스토랑의 모습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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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대화를 하다가, 겨울에 내 이름으로 된 여행 에세이가 출간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내게 다소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어떨 때 행복하다는 감정이 생기냐'고. 어떤 대답을 할까 고민했다. '사람들은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클로버만 좇다 행복을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는다'는 표현을 꽤 맹신하는 편이라,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지금 설사병이 멈췄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며, 우연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요소에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 과연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내 마음의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당장 생각나는 답변은 그거 하나였다.

그와는 식당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그다음 날 델리로 떠났고, 그는 다른 여행지로 갔겠지. 여행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에게 인도는 어떤 인상으로 남아 있을지 궁금하다. 과연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그때와 다름없이, 한결같을까.

가트 없는 바라나시란
 
여행자들이 없는 바라나시 역에는 인도인들의 일상만 있을 뿐이다.
 여행자들이 없는 바라나시 역에는 인도인들의 일상만 있을 뿐이다.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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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바라나시엔 이야깃거리가 없다. 강물이 불어 보트를 타고 나갈 수도, 강물에 띄워 소원을 비는 꽃접시인 디아를 파는 아이들도 없었다. 바라나시는 곧 가트라는 걸, 나는 여름에 와서야 알았다. 마찬가지로 가트가 없는 바라나시엔 여행자도 없어 무미건조했다. 한시라도 빨리 델리로 간 다음 북쪽으로 올라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그:#인도여행, #바라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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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마음에 품고 현실을 바라봅니다. 열아홉 살의 인도와 스무 살의 세계일주를 지나 여전히 표류 중에 있습니다. 대학 대신 여행을 택한 20대의 현실적인 여행 에세이 <우리는 수평선상에 놓인 수직일 뿐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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