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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청원
 지난 23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청원
ⓒ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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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철폐라는 공약이 앞으로 비정규직 전형을 없애 채용하겠다던지, 해당 직렬의 자회사 정규직인 줄 알았습니다. 현실은 더 하더라구요. 알바처럼 기간제 뽑던 직무도 정규직이 되고, 그 안에서 시위해서 기존 정규직과 동일한 임금 및 복지를 받고 있습니다. (…) 이곳을 들어가려고 스펙을 쌓고 공부하는 취준생들은 물론 현직자들은 무슨 죄입니까? 노력하는 이들의 자리를 뺏게 해주는게 평등입니까? (…) 이건 평등이 아닙니다. 역차별이고 청년들에게 더 큰 불행입니다."

지난 23일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화 그만해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의 일부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에 반대한다는 이 청원 글에는 29일 오전 8시 기준으로 26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또한 일부 언론이 이를 '공정'의 문제로 다루면서 정부의 비정규직 철폐를 비판하며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평등', '공정', '노력', '능력'은 존 롤스의 <정의론>(1971년)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 책을 들여다보면 청원인의 주장은 롤스가 말한 평등으로부터 거리가 먼 특권 논리에 가깝다는 게 금방 드러난다. 또한 일부 언론이 주장하는 '공정'이 얼마나 '불공정'인지 파악할 수 있다. 

미국의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공정성을 정의로 내세운 철학자이다. 그는 1958년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논문을 통해 '사회 정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절차적 구성'을 제시하며 유명해졌다. 한마디로 절차의 공정성을 강조한 것이다. 

롤스가 살던 미국은 지금보다는 더 평등하고 함께 풍요로운 시대였다. 오늘의 미국은 값비싼 의료비가 상징하는 의료민영화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중산층도 줄을 늘어선 푸드 뱅크로 통용되는 불평등이 훨씬 더 만연한 사회이다. 이는 미국이 '성장 지향의 공리주의적 윤리'와 '시장 만능의 자유 지상주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이다. 

롤스는 성장과 시장으로 대변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공정'(fairness)이라는 정의관을 내세운다. 성장 논리는 분배를 무시하고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의료 민영화는 사설 보험회사와 영리 병원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상당수 시민의 건강을 위협한다. 코로나19 시대에 시장 만능주의에 맡기면 제약회사와 마스크 상인들의 이익을 위해 약값과 마스크값이 폭등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무지의 베일과 선택

어떻게 하면 공정한 절차를 확보할 수 있을까? 모든 당사자가 똑같은 위치에 서서 '무지의 베일'을 덮어쓰고 계약한다면 어떨까? 자신의 능력이나 태도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상황에서는 자신이 가장 열악한 계층이 될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모든 사람, 적어도 사회의 최소 수혜자들(가장 열악한 계층)에게 이득이 되도록 원칙을 세우고 절차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평등한 민주 사회와 불평등한 신분제 사회를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있다면 취업준비생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신분제 사회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왕족으로 태어나기보다는 노비로 태어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왕족이나 귀족의 숫자는 평민이나 노예의 숫자보다 훨씬 적다.

같은 논리로 보면 대개의 시민은 미국식 의료 민영화 제도보다는 한국식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선택할 것이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나에게도 닥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장 논리로 의료 민영화를 적극 찬성한 사람들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일부 특권층의 돈보다 대다수 시민의 건강과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가상적 조건을 고안함으로써 공정성의 절차를 확보하게 된다. 롤스가 공정성을 위한 장치를 통해 구성한 '정의의 두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동등의 원칙'이다. 투표권처럼 각 개인은 기본적인 정치적, 법적 자유에 있어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차등의 원칙'이다. 여기서 사회적·경제적 차등, 즉 불평등은 다음의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가장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어야 하며, 그 같은 불평등은 기회균등의 원칙하에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책이나 지위와 결부된 것이어야 한다.

차등의 원칙으로 인해 결국 롤스는 노력과 능력을 절대시하고 시험 성적의 만능화를 외치는 능력 위주의 사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롤스는 사회적으로 강하고 유리한 사람들이 불리한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지우고 있다. 왜냐하면 유리하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주어진 우연한 로또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훌륭한 스펙을 쌓고 면접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는 데는 당사자의 몫도 있다. 하지만 동일한 사람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불리한 조건들을 만난다면 그 능력을 개발하고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우연의 몫도 분명히 있다. 

유명 축구 선수였던 박지성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대단한 실력을 보여줬지만, 만약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감독을 맡고 네덜란드 리그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일본 리그에서 이름 없이 전전했을지 모른다. 더구나 축구가 없던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인기와 부를 누릴 수 있었을까? 혹은 80년대의 축구 선수였다면 무명의 국내 선수로 보내지 않았을까?

능력에는 시대적 자산과 사회적 행운이 함께 깃들여 있다. 노력에도 생물학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능력주의와 이에 기반을 둔 시험 시스템도 롤스가 보기에는 불공정하다. 

약자 배려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것

우리는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지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기성 언론에서는 공정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롤스는 기회의 평등을 신분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운이 많이 작용한다고 본다. 신분제가 불합리한 이유는 출생이라는 우연이 분배의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도 '재벌의 자식'이냐, '노숙자의 자식'이냐 하는 출생의 우연이 많이 좌우한다. 그래서 기만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불공정하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롤스는 기회만이 아니라 결과에서도 보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약자의 불리함을 교정하려고 하는 차등 원칙은 자유 민주주의 제도에서 고안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한 원칙이다. 

지금의 비정규직 제도가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약자를 착취하고 죽음으로 몰아놓는 불평등의 극치이다. 비정규직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이 불공정이 아니라 어쩌면 청구인의 태도가 불평등을 옹호하는 특권 의식의 무의식적인 발로일 수 있다. 물론 청구인 자신은 이런 의도가 없을 거라고 믿는다. 그냥 열심히 노력하는 취업준비생의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구인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불평등한 일자리 시스템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불평등한데 그 시스템 안에서 공정한 경쟁을 외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가? '을'들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모는 시스템에 분노하는 것이 더 정의로운 대의이다. 

전혀 공정하지 않은 공정을 내세우는 궤변의 극치를 일부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이 보여주고 있다. 왜 공정을 이야기하면서 비정규직의 불공정은 외면하는가? 왜 위험의 외주화로 죽음에 내몰린 청년들은 외면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무슨 염치로 공정을 내세우는가? 

만약 '무지의 베일'을 덮어쓴다 해도 비정규직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하려 할까?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가 그 제도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에도 그러할까? 이것이 롤스가 말한 공정의 의미이다. 자신도 사회의 을이 될 수 있다는 것, 시험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비정규직이 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공정이란 이런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와 같은 기성세대는 취준생의 한탄과 울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고통스런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동참했거나 막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좁은 문을 넓은 문으로 만드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을의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을의 연대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일자리 시스템을 개선하고 바꾸는 것이 공정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공정은 최종 잣대가 아니라 연대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험에서 이기는 것은 과거로 출세한 조선 시대 사대부의 특권 논리의 일부일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기를!

태그:#정규직화, #공정, #정의, #능력주의, #존 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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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연구자로서 정치존재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장자와 푸코를, 지젝과 원효, 바디우와 나가르주나, 헤겔과 의상 등 동서양 정치존재론의 트랜스크리틱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전 상지대 교양대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인문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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