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 08:03최종 업데이트 20.07.1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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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모렌슈트라쎄(Mohrenstraße). 모렌이라는 단어가 지워져 있다. ⓒ 이유진

 
모렌슈트라쎄(Mohrenstraße).

독일 베를린 시내 고풍스럽게 재건된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늘어서있는 거리의 이름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지하철 역도 있다. 모렌슈트라쎄 바로 옆에 있는 대형 쇼핑몰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그래서일까. 거리의 이름을 눈여겨 본 적이 없었다. 모-렌, 발음까지 우아하니 그저 어떤 유럽인의 이름이거니 생각했다. 


지금 베를린 모렌슈트라쎄 표지판은 앞단어가 지워진 채 서 있다. 스프레이 범벅으로 사라진 단어, '모렌'의 뜻은 흑인이고 모렌슈트라쎄는 '흑인 거리'라는 말이다. '모렌'은 독일어로 북아프리카 지역 무슬림을 가리키는 말로, 흑인을 비하하는 뜻이 담겨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추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곳에 흑인이 살았을 것이다. 더 명확히 표현하면 흑인 노예들이 살았을 것이다. 독일 식민주의의 흔적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어떤 거리 이름이 '조센징 거리'라고 붙여진 것과 같다. '흑인 거리'는 공식적으로 제국주의가 종료된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흑인 거리'의 유래

모렌슈트라쎄의 이름은 1707년 정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프로이센은 오늘날 가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흑인 노예들이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구해온' 흑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즉위식에 맞추어 '고용된' 흑인들이 한 건물에 숙박했다는 설도 있다. 
 

프로이센 화가 파울 카를 라이게베(Paul Carl Leygebe)가 그린 작품 '프리드리히 1세의 흡연클럽(Tabakskollegium of Frederick I)'. 당시 베를린에서 흑인들이 노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Web Gallery of Ar

 
독일 역사학자 울리히 판 데어 헤이덴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는 2014년 7월 <노이에스 도이칠란드(Neues Deutschland)> 기고문을 통해서 당시 아프리카에서 '초청된' 흑인 사절단이 베를린에 머물며 체류지와 왕궁 사이를 걸어다녔던 길이라고 주장했다.

흑인 노예가 아닌 흑인 사절단의 방문을 기념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긍정적으로 포장하든 맥락은 바뀌지 않는다. 이 이름은 식민주의의 결과다. 

청산된 나치의 이름
청산되지 못한 제국주의의 이름


독일의 거리 이름에는 그곳의 역사가 담긴다.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살았거나, 지나갔거나 혹은 거리가 향하는 목적지의 이름을 딴다. 나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 거리'는 기록된 것만 170여 개에 이른다. 히틀러 광장에서 히틀러 다리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다.

2020년, 독일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는 없다. 역사 청산을 위해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흑인 거리'는 지금도 그대로다.

베를린에서는 1990년대부터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개명 논의가 있어왔다. 

독일 흑인 이니셔티브(ISD)는 2016년 성명서를 통해서 "독일의 역사책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17세기 말 독일은 식민지를 통해 인류 역사에 큰 범죄를 저질렀으며, 짧은 기간 동안 2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 아이, 여성, 남성들을 강제로 끌고와 노예로 팔았다"면서 "자유롭지 못했던 아프리카인들과 그 후손들은 모렌슈트라쎄가 그 당시 흑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은 모렌슈트라쎄를 'M-거리'라고 부른다. 흑인 비하 용어 '니거(Nigger)'를 금기시하며 'N-Word(엔 워드)'로 부르듯이 '모렌'도 그에 준하는 비하 단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아프리카계 독일 철학자였던 '안톤 빌헬름 아모'나 '넬슨 만델라' 거리로 개명을 요구하고 있다.
 

독일 흑인 이니셔티브 활동가가 모렌슈트라쎄 이름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안톤 빌헬름 아모는 아프리카계 독일 철학자다. ⓒ ISD

 
하지만 이 주장은 주류의 관심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녹색당이나 사회민주당 등 일부가 개명 논의에 찬성했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기독민주당 측은 "모렌이라는 단어는 인종주의가 아니라 북아프리카 무슬림을 의미하는 가치중립적 단어"라고 주장했다. 

인종주의를 인정하면서도 이름을 유지하고 역사적 담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불편한 식민주의 역사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자는 차원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렌슈트라쎄를 유지하자는 주장은 모두 독일인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모렌슈트라쎄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모렌'은 어디에도 없다. 

BLM이 촉발한 식민주의 논쟁

미국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으로 촉발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묻혀 있던 모렌슈트라쎄 문제를 다시 꺼냈다. 시위자들은 모렌슈트라쎄 간판을 스프레이로 지웠다. 조지 플로이드의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베를린 시의회 녹색당 원내대표인 안체 카펙은 6월 22일 <타츠>와의 인터뷰에서 "이곳의 흑인 거주자들과 방문객들이 매일 식민주의가 스며든 단어와 마주쳐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모렌슈트라쎄 논쟁과 함께 독일어권 전역으로 수많은 모렌이 다시 드러났다. 
 

독일 바이에른주 도시 코부르크의 공식 문장. ⓒ Stadt Coburg

 
바이에른 주의 코부르그 시의 도시 문장(紋章)은 흑인의 옆모습을 하고 있다. 순교한 로마군 사령관인 성 모리스다. 독일어권에서 성 모리스 문장을 가진 도시가 여러 곳 있지만, 코부르그의 문장은 전형적인 흑인의 이미지로 해석되어 문장을 바꿔야 한다는 청원이 시작됐다.

오스트리아 맥주 양조장 '모렌브라우어라이(Mohrenbrauerei)'도 비판에 직면했다. 1784년부터 시작된 이 양조장의 이름은 설립자의 성이었던 모어(Mohr, 이 또한 모렌에서 파생된 성이다)에서 따왔지만, 흑인의 얼굴로 로고를 만들었다.

양조장 설립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SNS에서 분노와 비난이 쏟아졌다.
 

모렌브라우어라이 홈페이지와 로고 ⓒ Mohrenbrauerei

 
양조장 측은 6월 24일 입장문을 내고 "우리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며, 외국인 혐오를 가진 사람을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역에 사는 모든 문화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맥주를 만든다"면서도 "다양한 분야의 독립된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의 브랜드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차분하게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모렌슈트라쎄, 다른 이름 가질까

독일은 나치 역사를 비교적 잘 청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일 역사 청산 문제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모범 사례다. 하지만 독일이 청산해야 할 역사는 나치 범죄만이 아니다. 나치 범죄와 동독 독재, 아프리카 식민주의 역사를 모두 가지고 있다. 나치 청산 과제에 압도되어 식민주의 역사가 거의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독일 정부는 최근에야 식민주의 역사 청산을 주요 과제로 삼고, 약탈 문화재를 돌려주는 소소한(?) 정책을 홍보하고 있다.
 

2020년의 모렌슈트라쎄.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 이유진

 
독일의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그동안 독일 사회가 외면해왔던 스스로의 문제를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베를린대중교통공사(BVG)는 결국 지난 3일 모렌슈트라쎄 역을 인접한 도로 이름인 글린카슈트라쎄 역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BVG는 "열린 기업이자 베를린의 가장 큰 고용기업으로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인종주의와 차별을 거부한다"며 "역명 교체는 올해 안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곳곳에 숨겨져 있던 식민주의 흔적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곳곳에서 저항도 거세다. 역사적 맥락이 담긴 단어 사용 자체를 금지해야 하느냐는 비판부터, 비용절감을 위해 스펠링 위에 점 두개를 찍어 '뫼렌슈트라쎄(Möhrenstraße, 당근 거리)'로 바꾸라는 비아냥까지 들린다.

2020년, 베를린 '모렌슈트라쎄'는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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