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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방촌 옆으로 이미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모습이다.
 쪽방촌 옆으로 이미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모습이다.
ⓒ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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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 쪽방촌의 선풍기는 무더위를 내쫓기엔 역부족이었다. 퇴거 명령 이후 몇 안 남은 세입자들이 무더위를 피해 쪽방촌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쪽방촌은 대구시 동구 신암4동 뉴타운 주택재건축 정비사업 부지의 A여관이었다. 쪽방촌 옆으로는 이미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주변 공사장의 굉음 소리에도 그들은 노상에 걸터앉아 아랑곳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편의점에서 사온 막걸리와 소주 각각 한 병과 안주는 단팥빵이었다.

6월 25일. 그날은 관리인에 의해 퇴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지 딱 3주가 되는 날이었다. A여관에서 그들의 짐을 빼야하는 사실상 '최후통첩의 날'이었다. 3주 전만 해도 19명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젠 남은 사람들은 9명뿐이다.

#1.

계단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는 이아무개(67)씨 옆에는 구부러진 지팡이가 있었다. 10년 전 교통사고로 그의 양다리에는 철심이 박혀있다. 스스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그에게 오늘은 2년 동안 살았던 A여관에서 짐을 빼는 날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그는 칠성시장 어물전에서 자전거로 배달 일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기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전거로 배달을 나갔다가 택시에 부딪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택시는 없었다. 뺑소니였다. 병원에 가보니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다. 제대로 걷기는커녕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만 했다. 자연스레 배달 일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일을 그만두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는 수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거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월세가 저렴한 쪽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처음 정착한 곳이 평리동의 B여관이었다.

쪽방에서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다리가 불편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때부터 일상적으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하루 중 취해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그럴수록 여관 관리자와 옆 방 세입자와 부딪히는 날이 많았다. 보다 못한 그의 여동생이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다 2년 전 여동생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매제가 그를 퇴원시켰다.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환영해주는 가족도 없었다. 수중에 돈도 없었다. 보증금이 없고, 월세가 저렴한 주거지를 찾아야만 했다. 월세 17만 원에 동대구역 인근의 쪽방촌인 A여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년이 지나고 어느새 그가 있던 A여관이 재건축 부지에 포함됐다. 이사를 가야했지만 모아 놓은 돈이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막상 집을 구하더라도 다리가 불편해 혼자 짐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에겐 이사를 도와줄 차량을 빌리거나, 인부를 고용할 돈도 없었다. 매달 기초생활수급비와 노인연금을 합한 55만 원 정도의 돈으로 월세를 내고 나면 생활비 충당하기에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는 이사비를 받았다. 하지만 이씨의 새로운 터전은 A여관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그 구역에서 재개발 되지 않는 C여관의 쪽방이었다. A여관과 다른 점은 월세 정도였다. C여관 월세는 30만 원이었다. 월세가 크게 올랐지만 그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원래 쪽방촌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임대주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는 보증금 문제가 가장 컸다. 100만~200만 원 정도의 돈이지만 그들에겐 목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4월 국토교통부는 '노후고시원에 3개월 이상 거주한 무주택 세대주'를 대상으로 보증금 5천만 원 이하 주택에 전세를 얻을 때 보증금 전액을 1.8%의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정책을 마련했다. 가장 큰 걸림돌인 보증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었다.

하지만 대구쪽방상담소 장민철 소장은 정책에서 쪽방촌 사람들의 생활권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가지고 있는 물량에 들어가는 '매입임대'의 경우 대부분은 달서구, 달성군, 남구 앞산 밑, 동구 아양교 등 도심 외곽지역에 있어 (쪽방촌 사람들의) 기존 생활반경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씨가 A여관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도 장 소장의 말과 맞닿아 있었다. 이씨는 '쪽방에 3개월 이상 거주'해 보증금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게 되면 그가 이제껏 인근 복지관에서 받아왔던 무료 반찬, 무료 급식 등 여러 가지 혜택들도 사라졌다.

다리를 다쳐 일을 할 수 없는 이씨 외에, 쪽방촌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겐 일자리 문제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장 소장은 "일 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용역 사무실의 위치가 도심 한가운데 있는데, 외곽 지역으로 가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파지를 줍는 분들은 본인들이 다니는 코스나 패턴이 있다"고 말했다. 쪽방촌 사람들에게 전세대출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A여관 인근에는 여전히 ‘달세방’을 받고 있는 여관들이 즐비해있다.
 A여관 인근에는 여전히 ‘달세방’을 받고 있는 여관들이 즐비해있다.
ⓒ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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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여관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권아무개(49)씨 역시 젊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 20년가량 이 쪽방촌을 맴돌고 있었다.

20대 시절의 그는 죽전 네거리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 씀씀이가 컸던 2호선 지하철 공사 야간 인부들의 퇴근시간에 맞춰 새벽 6시까지 영업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우연찮게 휘말린 싸움으로 인해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사람을 때렸고 징역을 살아야만 했다.

출소 후 사회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징역을 다녀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막일밖에 없었다. 집 내부를 수리하거나, 천장을 보수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일마저 꾸준히 할 순 없었다. 고질적인 허리디스크와 피부병 때문이었다. 일을 그만두니 생계가 막막해졌다. 1999년, 20대의 젊은 나이인 그는 동구 신암동의 쪽방촌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권씨는 2년 전 A여관에 입주하면서 월세 대신 총무역할을 도맡았다. 월세를 수금하거나, 떠나거나 들어올 이들을 위해 방을 정리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권씨는 "여기 와서 시체만 3구 치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죽음으로 비워진 공간 역시 '다른 사람으로 금방 채워졌다'고 했다. 싼 방값 때문이었다.

권씨는 공공임대 주택 이주를 희망하고 있었다. 문제는 재개발 이후 치솟은 집값으로 인해. 이 근방에서 공공임대 주택 보증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장 소장은 "현재 A여관에서 5명이 (전세대출을) 신청한 상태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동네 시세가 많이 올라 그 자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매물을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권씨 역시 20년 이상 살아온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전세 매물을 구하지 못하게 될 경우, 권씨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또다시 근처 쪽방일 수밖에 없었다.

빈곤하여 쪽방촌을 맴돌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정부의 복지 정책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부 정책이 '집주면 됐지'식의 관점에 매몰돼 정책효과가 반감된다는 점에 있었다. 이는 결과로도 나타났다. 3주 전 A여관에 남아있던 19명의 사람들 중 5명만 전세대출을 신청했을 뿐, 나머지는 인근의 쪽방촌을 선택했다. 이들에겐 좋은 집에 살고 싶다는 욕구보다 자신의 생활반경을 벗어나기 싫다는 욕구가 더욱 중요했다.

장 소장은 이와 관련해, 이젠 정책을 좀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휴먼시아 같은 일정한 돈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임대주택의 경우에는, 학군이나 입지 등을 고려해서 짓는다"며 "쪽방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임대주택의 경우에도 물량 위주의 공급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상황을 반영한 위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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