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연화산 중턱에 있는 ‘한양조씨 태련공파 5위 제단비’와 제단. 위쪽 묘에는 한양조씨 10세 손 태련공 조신완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연화산이 고향인 이상식 영풍제련소봉화군대책위 대표가 안내하고 있다.
 연화산 중턱에 있는 ‘한양조씨 태련공파 5위 제단비’와 제단. 위쪽 묘에는 한양조씨 10세 손 태련공 조신완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연화산이 고향인 이상식 영풍제련소봉화군대책위 대표가 안내하고 있다.
ⓒ 손영호

관련사진보기

   
태백산 아래 산악지대에 자리한 봉화는 예부터 인적이 적은 고장이었다. 봉화의 주민은 "거의가 외지에서 산수비결(山水祕訣)에 따라 난을 두려워 피난해 온 입주자들"이었다.(<봉화군지>,1978)

영풍광업의 연화광산이 있었던 석포면 대현리 연화산에도 난을 피해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국정 개혁을 주장하다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자(1519년 기묘사화), 조광조의 사종(십촌) 조신완이 멸족의 화를 면하고자 부친·형제들과 함께 영주로 피신했다 다시 연화산에 은거했다.

후손이 세운 제단비에 따르면 조신완은 "구름도 쉬어가고 비조(飛鳥)도 날아들기 힘겨운 태산준령 험준한 산협"에 모옥(茅屋)을 짓고 둔거했다. 조신완과 자손들은 4대에 걸쳐 100년간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통한 그리고 굴절의 세월"을 보냈고 이후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로 옮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신완과 자손들이 숨어 살았던 곳은 '한티'라 불리는 연화산 골짜기였다. 본래 한티는 산으로 둘러싸여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요새 같은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미쓰비시가 연화광산 개발을 위해 산을 절개하고 신작로를 내면서 천혜의 방벽은 허물어졌다. 이후 영풍광업이 연화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한티는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연화산 골짜기를 광미적치장으로 만들어
 
 1968년 3월의 연화광산과 한티. 골짜기에 광미적치장을 만드는 작업이 1968년경부터 진행되었다고 한다.
 1968년 3월의 연화광산과 한티. 골짜기에 광미적치장을 만드는 작업이 1968년경부터 진행되었다고 한다.
ⓒ 국토지리정보원

관련사진보기

   
이상식 영풍제련소봉화군대책위원회(이하 봉화군대책위) 대표는 한티마을에서 태어나 11살이 되던 1968년 여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한티 사람들은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계곡에서 맨손으로 버들치를 잡았다고 한다.

1960년대 영풍광업이 연화광산을 개발하면서 수맥이 끊어져 샘물이 마르자 한티 주민들은 땅을 팔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30가구 정도의 원주민(광산노동자도 포함)이 쫓겨난 후 한티 골짜기는 광산폐기물인 폐석과 광미(광물찌꺼기)의 매립지가 되었다.

연화광산 개발 초기 광미는 송정리천에 버려졌다. 원광석에서 납과 아연을 분리하는 선광 과정에는 청산가리(시안화칼륨)와 같은 시약이 사용되었다. 맹독성의 시안이 섞인 광미가 송정리천에 흘러들면서 열목어를 비롯한 물고기가 절멸했다.

연화광산의 개발 규모가 커지고 폐석과 광미의 양이 늘어나자 영풍광업은 연화산 골짜기를 광미적치장으로 만들었다. 1968년경부터 배수관을 설치하고 계곡 입구를 폐석으로 막은 뒤 광미를 적치하기 시작했고 몇 년 사이에 계곡은 광미로 가득 찼다.
  
차수시설 없이 폐석·광미 묻어... 광미 유출사고 일어나기도
 
 1971년 11월의 연화광산과 대현리 광미적치장. 광미가 매립되면서 한티 골짜기는 저수지처럼 변했다.
 1971년 11월의 연화광산과 대현리 광미적치장. 광미가 매립되면서 한티 골짜기는 저수지처럼 변했다.
ⓒ 국토지리정보원

관련사진보기

   
광산 개발 과정에서 나오는 폐석(경석, 버럭)과 광미에는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중금속이 함유되어 있다. 폐석과 광미를 매립할 경우 빗물에 의해 중금속이 용출될 수 있다. 광미에 포함된 독성 화학물질도 녹아 나올 수 있다.

중금속과 독성 물질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려면 차수시설을 해야 한다. 보통 하부와 사면에 차수시설을 한 다음 폐석과 광미를 매립하고, 매립이 끝나면 상부에 차수시설을 하고 복토와 식재를 한다.

폐기물의 양이 많고 넓은 지역에 적치할 경우에는 하부 차수시설을 하지 않고 사면과 상부 차수시설만 하는 방법이 채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하부 지질구조가 단층이나 절리가 없는 곳이어야 하고, 사면 차수 하부가 불투수층 깊이까지 닿게 하여 침출수가 이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휴광 5년 전인 1988년 10월의 연화광산과 대현리 광미적치장. 광미가 가득 차면서 ‘V’자 모양이던 계곡이 평평해졌다.
 휴광 5년 전인 1988년 10월의 연화광산과 대현리 광미적치장. 광미가 가득 차면서 ‘V’자 모양이던 계곡이 평평해졌다.
ⓒ 국토지리정보원

관련사진보기

 
이상식 봉화군대책위 대표의 말에 따르면, 대현리 광미적치장의 경우 차수시설을 하지 않았다.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광미적치장 조성과정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위성사진으로는 하부와 사면 차수시설뿐만 아니라 상부 차수시설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광미는 물과 화학물질이 섞인 진흙 상태의 광물찌꺼기이다. 광미는 마르면 단단하게 굳지만 물기가 스며들면 다시 물렁해지기 때문에 비가 오면 재해 발생 요인이 된다. 특히 차수시설을 하지 않은 광미적치장은 더 위험하다.

실제로 대현리 광미적치장에서 광미유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1972년 8월, 집중호우로 영풍광업이 운영하던 연화광산과 제2연화광산(삼척시 가곡면)에서 1억여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구체적인 피해 현황은 확인되지 않지만, 복구를 위해 광업진흥공사가 5천여만 원의 융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매일경제 1972.9.22.)

정부와 지자체에서 복원사업 실시
 
 휴광 4년 후인 1997년 9월의 대현리 광미적치장. 우수배제시설이 설치되었고 적치장 앞쪽에는 복토와 식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휴광 4년 후인 1997년 9월의 대현리 광미적치장. 우수배제시설이 설치되었고 적치장 앞쪽에는 복토와 식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국토지리정보원

관련사진보기

 
1990년대 들어 휴·폐 광산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1995년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폐금속광산 복원사업을 했다. 연화광산에서도 우수배제시설 설치, 복토와 식재 등의 복원사업이 이루어졌다.

빗물이 광미에 스며드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광미적치장 상부 오른쪽에 우수배제시설(콘크리트 U형)이 설치되었다. 복토와 식재는 계곡 앞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광미적치장의 많은 부분이 숲으로 덮였다.
 
 폐광 20년 후인 2018년 10월의 대현리 광미적치장. 광미댐 아래 배수관으로 침출수가 흘러나와 송정리천에 유입된다.
 폐광 20년 후인 2018년 10월의 대현리 광미적치장. 광미댐 아래 배수관으로 침출수가 흘러나와 송정리천에 유입된다.
ⓒ 구글어스

관련사진보기

   
현재 대현리 광미적치장은 겉으로 봐서는 광미가 매립된 곳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숲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2000년 전후까지 30년 넘게 광미가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환경오염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빗물에 유실된 광미와 유해 침출수가 송정리천에 흘러들었을 것이다. 송정리천은 3km를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는 낙동강 최상류 지천이다. 연화광산의 광미와 침출수는 낙동강 생태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광미댐 하부 배수관에서 침출수 흘러나와
 
 2019년 4월의 대현리 광미댐. 계곡 앞쪽에 돌망태 옹벽이 설치되어 있고 아래 배수관을 통해 침출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2019년 4월의 대현리 광미댐. 계곡 앞쪽에 돌망태 옹벽이 설치되어 있고 아래 배수관을 통해 침출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 손영호

관련사진보기

 
현재 대현리 광미적치장에는 광미댐이 설치되어 있다. 폐석과 광미가 유실되지 않도록 돌망태를 계단모양으로 쌓아 옹벽을 만든 것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2002년 11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실시한 복구사업인데, 2억8100만 원의 예산이 들었다고 한다.(중앙일보 2005.02.27.)

하지만 2004년 환경부의 사후관리 실태조사 결과 옹벽붕괴로 폐광석이 하천으로 유실되었고 또 추가 유실 우려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듬해에 광해방지사업 예산이 편성되어 보강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2019년 4월 방문했을 때 광미댐 아래 배수관에서 침출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에서 화학물질 냄새가 났는데 이상식 봉화군대책위 대표는 어린 시절 선광장 부근에서 맡았던 냄새와 같다고 했다. 침출수 조사에 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오염 정도를 알 수는 없지만 유해물질이 섞여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오염자 부담 원칙'에 따라 영풍그룹에 책임 물어야
 
 연화광산 대현리 광미적치장. 오른쪽에 우수배제시설과 압기실(공기를 압축해서 갱내로 보내는 시설)로 사용되던 건물이 보인다.
 연화광산 대현리 광미적치장. 오른쪽에 우수배제시설과 압기실(공기를 압축해서 갱내로 보내는 시설)로 사용되던 건물이 보인다.
ⓒ 손영호

관련사진보기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연화광산에는 폐석 400만㎥, 광미 200만㎥가 매립되어 있다. 다른 폐금속광산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많은 양이며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이다. 연화광산이 우리나라 최대의 납·아연 광산이었던 만큼 폐석과 광미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6년 '광산피해의 방지 및 복구에 관한 법률(광산피해방지법)'이 시행됨에 따라 광해관리공단이 설립되어 광해방지사업이 실시되고 있다. 연화광산에서도 광해방지사업이 실시되고 있는데 2007년에서 2018년까지 광미유실방지, 오염수질개선, 토양개량복원에 약 96억 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되었다(같은 시기 제2연화광산에서는 281억9200만 원이 투입되었다).
 
 연화광산 광해방지사업. 세부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연화광산 광해방지사업. 세부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 2018년 한국광해관리공단 통계연보

관련사진보기

 
영풍은 연화광산을 개발해 남긴 이윤으로 석포제련소와 고려아연을 설립했고 오늘날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폐광 후 연화광산에서 발생되는 광해는 국민 세금으로 관리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광해방지사업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돌망태 옹벽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복구해야 할 것이고 침출수도 언제까지 흘러나올지 알 수 없다. 폐석과 광미가 연화산 골짜기에 묻혀 있는 한 사후관리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밖에 오염 갱내수 발생, 폐갱으로 인한 지반침하 등이 연화광산에서 진행되고 있거나 예상되는 광해이다.

이 모든 문제는 영풍이 재벌그룹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연 파괴의 결과이다. 연화광산이 폐광되고 영풍광업(영풍산업)이 소멸되면서 오염원인자가 사라진 듯이 여겨지고 있다. 재벌그룹이 남긴 환경오염 뒤처리에 국민 세금이 사용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연화광산으로 인한 광해는 오래 계속될 것이며, 그로 인한 피해는 석포와 영남 주민을 비롯해 낙동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돌아갈 것이다. '오염자 부담 원칙'을 적용해 영풍그룹에 사후 책임을 묻는 것이 국민 정서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연재는 [영풍과 환경오염 ⑪] 연화광산 태백 고수골 광미적치장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