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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일전쟁을 묘사한 '조선안성도격전도' 다색판화
 청일전쟁을 묘사한 "조선안성도격전도" 다색판화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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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행운을 타고 났지만 불운한 시대였다.

그가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시대상황은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1894년 국내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국제적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의 본질은 조선의 종주권을 일본이 차지하고자 벌인 패권전쟁이었다.

이때 이시영은 중추원 부승지가 되어 정3품에 제수되고, 곧 승정원의 정3품 벼슬인 우승지에 올랐으며, 약원(藥院)과 상원(上院)의 부제조(副堤調) (정3품의 당상관)을 겸임하는 동시에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部事) 궁내부 수석참의(육조의 정3품)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26세 때이다.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1월 고종이 칙명을 내렸다. 이시영에게 관전사(觀戰使)의 책임을 맡겨 랴오뚱반도(遼東半島)와 뤼순ㆍ다렌 등의 전황을 시찰하고 오라는 칙명이었다. 고종이 그만큼 신뢰하고 그의 안목과 정세판단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약 3개월 동안 해당 지역을 돌아보고 귀국하여 상세히 복명하였다.

"당시 중국의 육해군은 그 수에 있어서나 장비와 무기가 일본에 비하여 우세하였으나, 명령 계통과 통솔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음을 보고 개탄하였다고 한다." (주석 1)

당시 중국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기이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신흥강국이어서 일사분란한 체제였다.

"이러한 결과는 그후 여러 연구에 의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곧 판명되었는데, 당시 시찰을 하면서 그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의 안목과 혜안이 아주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주석 2)

이시영은 1910년 형제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기 5년 전에 황제의 '관전사'의 자격으로 랴오뚱반도 등지를 시찰하고 전황을 살피게 된 것은 국제적 안목을 키워주었다. 일본의 군사력과 지휘체계를 지켜보면서 섬뜩한 전율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궐내의 사정이었다.

이러한 그의 혜안을 받아주고 앞으로의 문제에 대처하려 하는 자는 당시 궁중에 한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오히려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국정이 어수선해지자 온갖 추악한 일들이 관료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또한 국왕의 총명함이 그들의 농간에 의해 흐려지게 되자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모든 직책에서 사퇴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 해 6월에는 증정부인(贈貞夫人) 김씨를 잃게 되었고, 국가적으로는 8월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중전 민후(中殿閔后)가 화를 당하자 그의 심중은 더욱 난감하였다.

그러한 때 장인인 김홍집이 총리대신으로 나아가려 하자 그는 그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김홍집은 결국 왕의 명이 준엄하였던지라 어쩔 수 없이 이를 수락하여 제4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염려대로 이완용 등 매국노들의 모략에 의해 황제가 아관파천을 하는 사건까지 일어나 김홍집 내각은 곧 소멸하고 말았다. (주석 3)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국내는 일본의 내정개입이 본격화되었다. 을미사변 후 친일내각이 구성되고(1895년 8월), 단발령이 시행되었으며(11월), 유생들의 지도하에 충청도를 비롯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이다. (1896년 1월)

이시영은 나라의 걱정보다 시국의 변이에 따라 움직이면서 고종을 혼돈케하는, 궁내에 도사리고 있는 소인배들의 행태에 분개하면서 모든 관직을 떠났다. 18세에 남행가주서(南行假注書)로 근정전에 입시하여 승정원의 우승지에 이르기까지 10년 간의 관리직을 던지고 귀향하였다.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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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이 관직에서 물러날 즈음 국내정세는 하루가 멀다않고 급변하였다. 1896년 2월 이범진ㆍ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Weber. K. I)가 공모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시켰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2월 11일 새벽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친일 내각의 각료 모두를 체포ㆍ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시영의 장인 김홍집과 농산공부대신 정병하가 처형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이범진ㆍ이완용ㆍ윤치호를 비롯한 친러ㆍ친미파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격변기에 이시영은 조정에서 물러나 야인의 신분이 됨으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행운의 여신이 늘 그의 곁에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주석
1> 박창화, 앞의 책, 26쪽.
2> 이은우, 앞의 책, 28쪽.
3> 이은우, 앞의 책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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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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