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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서울시장 영결식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영결식에서 공동장례위원장인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사를 하고 있다.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영결식이 열렸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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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갑자기 운명하였다는 소식이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어떤 기자는 장례식장에 조문 온 여당 중진에게 시장의 성 추문과 관련된 여당의 입장을 물었다가 욕을 얻어먹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그를 영웅시하는 것은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점잖게' 꾸짖는다. 무슨 영웅을 말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또한 박원순 시장의 시체를 이미 발견하고도 정부가 음모를 꾸미기 위해 숨기고 있었다는 이른바 지라시가 소셜미디어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어떤 여성 단체는 서울특별시장(葬)과 조문소 설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긴급히 발표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아예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반대하는 '탄원'이 올라와 50만 명 넘는 동의를 이끌어 낸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야당을 대표하는 여든 살의 '어른'이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공개적으로 논한다. 아직 장례도 안 치른 상황에서 말이다. 모든 이들이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져서 각자 자기 이해타산만 내세운다. 물론 그러면서도 모두 당당한 근거를 내세운다. 기자는 국민의 알권리, 여성단체는 여성의 인권, 비상대책위원장은 비상한 당의 쇄신을 내세운다.

게다가 강용석 변호사는 자기 유튜브 방송에서 망자를 조롱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법원에 서울특별시장 집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다. 법에 없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당 대변인은 뜬금없이 시장 아들의 병역 문제를 물고 늘어진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기자, 여권운동가, 정치가, 변호사 이전에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인권이 있듯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예의범절이 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에서는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의 깊은 사정은 관심이 없고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시대정신이 지배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경주마 장구에 '차안대'(遮眼帶)라는 것이 있다. 경주마 눈에 착용하는 컵 모양의 장구로 다른 말이 가까이 다가와도 안 보여 심리적 불안감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경주마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민감하여 흥분을 잘하는 일반 말에도 사용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차안대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아왔다. 옆을 보지 말고 오로지 명문대만 바라보고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면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듣고 자라온 것이다. 옆을 보고 주변에 관심을 두면 도태된다는 협박까지 받는다. 다름 아닌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여 공부 잘해서 명문대 졸업하고 출세한 고위 공직자,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기업 임원이 된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모든 한국 사람이 목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보고 배운 것이 주변에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자기 목표에만 몰두하는 이른바 '차안대 정신' 밖에 없는 사람들이 출세하는 세상에서는 명문대를 못 가고 출세도 못 한 사람조차 그러한 집단의식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이 되었다. 그래서 말 없는 관중들조차 자신의 호기심 충족 이외에는 근본적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영어권에서는 이 차안대 곧 블라인더(blinder)가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 말할 때 자주 사용된다. 말 그대로 눈이 가려져 자기 생각과 자기 관점에만 몰두하여 옆을 못 보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이성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말만 '배설한다.'

'성추행'은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이성적 대화가 필요한 중요한 사회적 의제이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되는 사회에서는 이 의제가 각자의 이해타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그 수단이 더 이상 효용이 없어지면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유명 인사가 결부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 개인적 호기심과 집단적 이해타산에만 몰두하는 이들이 먹잇감이 된다.

그 문제가 이전에도 동일한 사회적 의제가 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관중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하이에나가 되어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고 물어뜯기에 바쁘다. 그러다가 호기심과 이기적 탐욕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다시 어슬렁대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다음 먹잇감을 기다리는 좀비처럼 말이다.

구조적 폭력의 가시화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쓸쓸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는 차안대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집단의식과 더불어 또 다른 그리고 좀 더 깊은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다.

한국에서 아직은 낯선 개념인 '구조적 폭력'은 갈퉁(Johan Galtung, 1930-)이 오슬로의 평화연구소(Institutt for fredsforskning)에서 근무하던 시절인 1969년에 쓴 논문 '폭력과 평화 그리고 평화연구'(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에서 처음 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구조적 폭력은 사회적으로 불의(social injustice)가 판치는 상황과 직결된다. 또한 (유교 사회와 같은 계급주의의) 정적 사회에서는 개인적 폭력이 쉽게 드러나지만 (민주화된 현대의) 역동적 사회에서는 구조적 폭력이 가시화된다. 후자가 사회의 역동적 흐름을 막기 때문이다.

구조적 폭력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불의이다. 그리고 이번 박원순 시장의 경우처럼 사망 등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이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살아 있는 여성에 대한 성추행만이 아니라 망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일도 구조적 폭력에 포함된다. 정치가들은 정당이라는 제도에 의지하여, 단체는 결사의 자유라는 제도에 의지하여, 유튜버들을 포함한 언론은 표현의 자유라는 제도를 빙자하여 구조적 폭력을 행사한다.

현재 한국은 정적 사회에서 동적 사회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제도적 폭력이 비로소 가시화되기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폭력의 가시화는 이미 동적 사회에 들어선 서방 세계에서 좀 더 명료하게 이루어진다. 최근 미국과 독일에서는 구조적 폭력에 관한 대표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미국의 영화업자인 하비 와인스타인(Harvy Weinstein)은 30년 가까이 성추행을 저질러오다가 2018년 5월 기소되어 2020년 2월에 23년 형을 언도받고 현재 웬드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하고 있다. 그의 범죄는 2017년 10월 5일 자 <뉴욕타임스> 특집 기사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후 와인스타인은 탐정까지 고용하여 그의 범죄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아보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2018년 5월 뉴욕 경찰에 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마침내 올해 초에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이른바 '미투(me too)' 운동이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미투' 운동은 '젠더 평등을 위한 소녀들'(Girls for Gender Equity)의 대표인 인권 운동가 버크(Tarana Burke, 1973-)에 의해 이미 2006년에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반응이 지지부진하다가 와인스타인의 성 추문과 그 여파를 계기로 페미니즘의 강력한 구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와인스타인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영화 산업계에서 영향력뿐만 아니라 클린턴 부부와 같은 거물 정치가들과 유수의 언론사 기자들과의 끈끈한 인맥으로 자신의 성 추문을 오랫동안 덮어왔다. 실제로 그는 영화 출연을 미끼로 많은 여성들을 유혹하여 성적 노리개로 삼았고 그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여성들을 대상으로도 끈질긴 추행을 일삼았다.

그런데도 그가 30년 동안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영화산업계, 정치계, 언론계라는 제도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관행이었다. 그는 2018년 7월 영국의 <스펙테이터>라는 잡지와의 회견에서 자신이 여러 여성 배우를 영화에 출연시키는 조건으로 성관계를 맺었는데 사실 (영화계에서는) 누구나 그러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을 부인했고 대담을 나눈 기자도 그를 두둔하였다.

2017년 10월에 <뉴욕타임스>가 와인스타인의 추행을 만천하에 밝혔음에도 그는 이처럼 뻔뻔한 언행을 지속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끈끈한 인맥으로 연결된 제도라는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를 방패막이로 삼아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단독으로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반드시 협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역동적 사회에서 반드시 가시화되는 구조적 폭력의 원흉이 되고 만 것이다.

독일 법의 심판

지난 6월에는 구 동독의 도시인 에어푸르트(Erfurt)에서 근무하던 23살과 28살의 두 경찰이 한 폴란드 출신 여성을 성폭행한 죄로 각각 2년과 3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판결이 내려질 때 이들을 고소한 여성은 자리에 없었다. 32세의 이 여성은 공문서위조 등으로 경찰이 수배 중이다. 당초 이 여성은 이 두 명의 경찰을 심각한 강간으로 고소하였으나 이는 기각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직위 남용과 뇌물수수였다.

이들은 2019년 9월 28일 다른 2명의 경찰과 함께 거리를 순찰하다가 문제의 폴란드 여성과 그의 친구를 불심검문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폴란드 여성은 위조된 증명서를 내민 혐의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문제의 경찰들은 신분 확인을 위하여 여성의 집으로 가서 수색을 벌였다.

그런데 법원에 제출된 문서에 따르면 이 수색 과정에서 여성이 먼저 23세의 경찰에게 접근하여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어서 들어온 또 다른 28세의 경찰도 마찬가지로 성관계를 맺었다. 그러고 나서 집안에서 아무런 서류가 발견되지 않자 이들은 다시 차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

그 과정에서 그 폴란드 여성은 성폭행을 당한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다음날 두 경찰을 강간죄로 고소했다. 그러면서 경찰이 성관계를 강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판사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한 폴란드 여성이 먼저 성관계를 주도했을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경찰들에게 절박한 상황에 놓인 폴란드 여성의 약점을 잘 알고 악용하였으며 그를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으로 여긴 죄를 물었다.

판결문에서 판사는 "이 사건은 그 전체를 놓고 볼 때 경악스럽고 매우 당황스러운 것으로 경찰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라고 일갈하였다. 독일의 법 제도에서는 설사 피해자의 사익 추구가 개입되었다고 하여도 구조적 폭력의 불의를 단죄하는 것이 우선시 되고 있다. 이 성폭력 사건에서는 갈퉁(Galtung)이 말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비한 전통적인 의미의 개인적 폭력의 요소를 가해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여성의 암묵적인 동의마저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두 독일 경찰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피해자가 비가시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구조적 폭력의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독일과 같은 역동적 사회에서 구조적 폭력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그것을 드러내고 단죄하는 법과 제도와 더불어 이를 용납하지 않는 공론의 장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론의 장

다시 박원순 시장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이 문제를 단순히 시장과 비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인적 관계에서 나오는 개인 윤리적 갈등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이끌어 내는 데에 어려움이 많아지게 된다. 구체적으로 성추행이라는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개인의 성도덕, 성인지 감수성 차원에서 접근하고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 그리고 합의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 그 불의한 구조 자체를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 폭력의 근절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이성적 대화가 가능한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곧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가 말하는 대화적 합리성(kommunikativen Rationalität)을 갖춘 사회 구성원들이 구조적 폭력을 공론의 장(Öffentlichkeit)으로 이끌어 내어 그 모순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박원순 시장과 관련된 문제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현상은 그러한 이성적 사유가 철저히 배제된 채로 각자의 이해타산만이 개입된 개인감정의 배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역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서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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