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5 13:53최종 업데이트 20.07.1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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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위기의 한국 보수세력 내부에는 노무현 같은 '인물'이 없다. 촛불 혁명 때 잃어버린 지지층을 도로 찾자면 보수의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하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마땅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종전에 내세웠던 '강력한 지도자 박정희'는 박근혜 정권 몰락과 함께 추락했다. <반일 종족주의> 대표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회장인 전광훈 목사 등이 그 대안으로 이승만을 띄우려고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마다 4월 19일이면 국민들이 이승만의 죄악을 되새기게 되므로 그들의 노력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되기 쉽다.
 
조선 시대 집권당들은 자기네 정권의 구심점이 될 만한 군주들을 종(宗)이 아닌 조(祖)로 격상하려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세종(世宗)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아버지와 똑같은 세(世)로 불리면서도 아버지보다 높은 조(祖)로 격상되는 어이없는 불효가 벌어진 것, 영종과 정종으로 불렸던 할아버지와 손자가 훗날 영조와 정조로 각각 격상된 것 등은 영웅이 될 만한 군주를 앞세워 입지를 굳히고자 했던 조선 시대의 정치 풍경을 반영한다.

보수 대통령 몰락에 장군급에서 영웅 찾아
 
한국 보수는 이승만·박정희에게 '조'의 위상을 부여하고 싶어 하지만 이런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군주'가 아닌 '장군' 급에서 영웅을 찾기 위한 시도가 고개를 들고 있다. 친일파이자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 그를 영웅화하려 했던 시도가 그것이다.
 
 

지난 14일 <조선일보>에 실린 유광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기고문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 ⓒ 조선일보

 
지난 14일 <조선일보>에 실린 유광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기고문 '백선엽은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다'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결론에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순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유광종 전 위원은 백선엽이 동작동에 안장되지 못하는 것은 "유감천만의 일"이라고 탄식했다.
 
유광종은 백선엽이 만주국 장교로 복무할 당시에는 간도(만주)에 독립군이 없었으며, 그가 일본 괴뢰국 장교로 일한 것은 "일본의 실재하던 힘에 주목하면서 그 바탕을 탐구하여 내 힘으로 앉혀 보려는 실사구시 정신이 컸다"고 주장한다. 실사구시를 실천하고자 백선엽이 만주국 장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백선엽은 달리 말하자면 '보통명사 이순신'의 대한민국 버전"이라고 치켜세웠다. 고유명사 백선엽이 대한민국의 구국영웅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돼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시도가 극우 논객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의 유튜브 방송에도 나타났다. 백선엽 사망 일주일 전인 지난 3일자 조갑제TV '백선엽과 간도특설대와 김일성에 대한 오해' 편에서, 조갑제는 <반일종족주의> 공동 저자인 정안기 전 서울대 경제연구소 연구원과의 대담을 통해 '백선엽은 이순신'이라는 논리를 강조했다.
 
그런데 성웅 이순신 이미지를 씌우자면, 백선엽이 받고 있는 혐의부터 없애줘야 한다. 항일군 소탕 부대인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한 사실부터 '무혐의 처리'해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조갑제·정안기는 '간도특설대가 독립군과 전투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군은 약탈·성폭행을 일삼는 마적단과 다를 바 없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독립군을 범죄자 집단으로 치부했던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의 논리를 차용해서 독립군을 비판하는 것이다.
 
독립군은 마적단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이들과 전투한 간도특설대는 나쁜 부대가 아니라는 것이 두 사람의 주장이다. 마적단 공격으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해주는 착한 부대였다는 것이다. 방송이 29분을 넘기는 대목에서 조갑제는 "그러니까 간도특설대의 주 임무는 말하자면 약탈당하는 조선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방송이 29분을 넘기는 대목에서 조갑제는 "그러니까 간도특설대의 주 임무는 말하자면 약탈당하는 조선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 조갑제tv

 
독립군을 마적단으로 격하시키려면 장애물 하나를 넘어야 한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비롯한 만주 지역 항일투쟁을 마적단 활동과 등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조갑제·정안기가 미리 제시한 논리가 있다. '김일성은 마적이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방송이 22분을 넘긴 대목에서 정안기는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은 어떤 짓을 행하냐 하면, 간도성 일대를 휘젓고 다니면서,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한국인들이 조선에서 살기 힘들어서 이주해 있는데, 그런 이주해 온 농민들을 가을만 되면 약탈하고 방화하고 살인을 하고 인질을 잡고... 그 참담한 내용들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많은 잡지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들을 묻지 않고 있어요.
 
김일성 부대처럼 독립운동을 빙자해 마적단 활동을 하는 집단으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고자 전투를 벌였으므로 간도특설대는 나쁜 부대가 아니라는 게 두 사람의 강조점이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이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심적 부담이 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사람은 독립군을 마적단으로 몰아붙이는 이 해괴한 논리를 59분짜리 방송에서 거듭 강조했다. 그러다가 김일성을 계승한 북한 정권뿐 아니라, 독립군의 정신을 추앙하는 남한 사람들까지도 마적단이라고 비하하는 엉뚱한 말들을 쏟아내게 됐다. 방송이 45분을 경과한 대목에서 정안기는 '백선엽 현충원 파묘'를 주장하는 김홍걸 민주당 의원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들은 북한 하면 빨치산 정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거는 마적단 정권이고... 지금 현재 문재인 정권 하에서 김홍걸을 비롯한 이 사람들이 마적단을 흉내내고 있는 거예요. 웃기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 말을 듣고 조갑제가 파안대소하며 "문재인 정권이 마적단화 되겠다"고 말하자, 정안기는 한걸음 더 나아가 문재인 정권의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을 겨냥해 "자기들이 직접 열심히 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람들 것을 빼앗아서 먹자고 하는 식의 그런 사고방식, 그게 바로 마적단식 사고방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렇게 독립군과 그 계승 세력을 마적단으로 격하시킨 두 사람은 '마적단과 싸운 간도특설대는 나쁜 부대가 아니었다'는 소결론을 도출한 뒤, '백선엽은 마적단과의 전투가 없었던 시기에 이 부대에 근무했으므로 백선엽과 독립군의 관계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직면한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다. 백선엽 자신이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과 싸웠노라고 시인한 일본어 회고록이 바로 그것이다.
 
73세 때인 1993년 일본에서 펴낸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이 번역문은 13일자 <한겨레> 기사 '백선엽 회고록,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이이제이였다'에 나와 있다.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한국어 회고록에는 쓰지 않았던 독립군 토벌 사실을 일본어판에서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조갑제·정안기에게는 이 솔직함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방송이 21분을 경과한 대목에서 이 부분에 대한 두 사람의 '무혐의 처리'가 있었다.
 
조갑제는 "문제는, 일본에서 번역되었다는 백선엽 장군이 쓴 대게릴라전-아메리카는 왜 졌는가"라고 말을 꺼내면서 위의 번역문을 읽어줬다, 그런 뒤 위 번역문을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근데 이게 내가 그렇게 했다는 게 아니고 일반론적으로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백선엽 장군이 독립군 토벌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 같애요.
 
백선엽 본인도 인정한 독립군 토벌 사실을 마음대로 재해석해서 부인해버린 뒤, 조갑제는 57분을 경과한 대목에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간도특설대는 독립군과 싸운 군대가 아니고 중국공산당과 싸웠고, 중국공산당 소속의 김일성 부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우리 조선인들을 학살하니까 그들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의 부대였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으로 말씀드리자면, 43년에 부임했으므로 이미 그때는 동북항일연군은 와해되고 그때는 없었다. 그러니까 백선엽 장군은 독립군과 싸운 적이 없다. 따라서 백선엽 장군은 사과할 일이 없다.
 
이렇게 백선엽의 무혐의·무죄를 주장하면서 이들이 중간중간에 강조한 것이 위에 언급한 '백선엽=이순신' 논리다. 조갑제는 방송이 9분을 경과한 대목에서 "한국전의 이순신 같은 분"이라고 백선엽을 치켜세웠고, 50분을 지난 대목에서 "백선엽 장군은 6·25 때 이순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거는 다 아는 얘기"라고 재차 강조했다. 결점투성이인 백선엽을 친일파 혐의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웅 이순신 이미지까지 씌워 '성웅 백선엽'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여전히 막강한 백선엽 세력
 
위의 <조선일보> 기고문과 더불어 조갑제TV 대담은 위기에 처한 보수세력이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짠한' 노력을 벌이는지를 보여준다. 전직 대통령 중에서 '조(祖)'를 찾기가 쉽지 않은 그들은 친일파 장군들로까지 '수색 범위'를 넓히고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지지층을 돌아오게 할 수 없으므로, 과거의 인물들이라도 소환하려고 애쓰는 그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애처로운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들이 치켜세우는 이승만·박정희와 더불어 백선엽은 '민주공화국의 적'이다. 이승만·박정희·백선엽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좌파 소탕을 빌미로 국민을 함부로 살상했다. 이승만·박정희·백선엽을 추앙하는 세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은 국민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일련의 선거에서 참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보수가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과 국민학살(민간인 학살)을 범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회고록을 쓰는 백선엽 같은 인물이 현충원에 버젓이 안장될 수 있다는 것은 아직은 그들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심하고 엉뚱한 논리를 개진한다 하여 그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전히 강하고 위력적일 뿐이 아니라,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있다. 현충원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 망령들에 맞서는 국민들의 '파묘 투쟁'이 한층 더 강도 높게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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