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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4월 태백시 동점동 고수골 일대. 영풍광업이 연화광산에서 나온 폐석과 광미를 매립하면서 주변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1981년 4월 태백시 동점동 고수골 일대. 영풍광업이 연화광산에서 나온 폐석과 광미를 매립하면서 주변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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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 계곡 고수골 일대에서 중금속 중독으로 추정되는 생태계 파괴 현상이 나타나 환경청이 긴급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물이 겨울에도 얼지 않고 물고기가 멸종됐으며, 이 물을 먹은 닭·소 등 가축류가 떼 지어 병사하고, 이 물을 농용수로 사용할 경우 수확이 주는 등 심상치 않은 오염 중독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80.5.29.)

  
1980년 5월, 환경청은 태백시 동점동(당시 삼척군 장성읍) 고수골 일대에서 중금속 중독으로 추정되는 생태계 파괴 현상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중금속에 의한 생태계 파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고수골 생태계가 파괴된 것은 우리나라 최대의 납·아연 광산이었던 '연화광산의 광산폐수' 때문이었다. 당시 영풍광업은 고수골에 광미적치장(광미장)을 만들고 연화광산에서 나온 폐석과 광미(광물찌꺼기)를 매립하고 있었다. 광미에는 중금속과 맹독성의 청산가리(시안화칼륨)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심각한 오염이 나타난 것이다. 고수골 광미장은 낙동강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아 폐수가 낙동강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환경청은 종합 환경오염 실태조사반을 편성해서 연화광산에 급파했다. 생태계 파괴여부를 중점 조사하는 한편, 인근 2백여 가구 주민을 대상으로 정밀신체검사를 실시하고 광산의 공해처리시설을 점검토록 했다고 한다.

한 달 뒤 환경청은 낙동강 상류 5개 대형 폐수배출업체에 대해 공해방지시설 개선명령을 내렸다. 5개 업체에는 당시 영풍그룹의 주력 기업이었던 영풍광업과 영풍 석포제련소가 포함되었다. 나머지 3개는 한국티타늄 석포공장, 쌍용양회 문경공장, 구미공단이었다.

하지만 실태조사반의 조사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우리나라 공해대책이 그랬듯이 조사결과를 공표하지 않고 덮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로 고수골 일대의 생태계 파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영풍광업, 꽃밭 만든다며 고수골 땅 매입
 
연화광산 광미장이 들어서기 전인 1968년 3월 고수골 일대. 곳재밑 마을과 미늘골에 열 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연화광산 광미장이 들어서기 전인 1968년 3월 고수골 일대. 곳재밑 마을과 미늘골에 열 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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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광산이 있었던 연화산은 경북 봉화와 강원도 태백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차도와 철로가 놓이기 전, 연화산 자락의 곳재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는 교통의 요로였다. 지금은 곳재 아래로 31번 국도 연화터널이 놓여 있다.

곳재라는 이름은 옛날(고려시대로 추정) 고개 밑에 나라에서 곡식이나 병장기를 저장해 두는 곳집이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 곳재 아래 긴 골짜기도 곳골(庫谷) 또는 곳실골(庫室谷)이라 불리다 지금은 고싯골 또는 고수골로 불린다.

예전 곳재 아래에는 곳재밑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다. 곳재밑 아랫마을인 사군다리가 고향인 A(75세)씨에 따르면 곳재밑과 근처 미늘골에 열 가구가량의 주민이 살았다. 주민들은 골짜기 샘에서 나오는 자연수를 마셨다. 콩·옥수수·메밀 등 밭작물을 주로 재배했고 논농사도 일부 지었다.

A씨는 어린 시절 모내기를 하다 모가 모자라 어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연화산 너머 석포면 석포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의 영풍 석포제련소 1공장 자리가 예전에는 논밭이었는데 그곳까지 가서 모를 실어 왔다. 새벽에 출발해서 한밤중에 돌아오는 멀고 힘든 길이었다고 한다.

고수골 주변은 물이 깨끗해서 여름밤에 관솔불을 물웅덩이에 비추면 가재가 바글바글했다. 마을 사람들은 큰 가재를 주워 와서 끓여 먹곤 했다. 1급수에 사는 버들치, 뚜구리(동사리) 등도 많아서 주민들이 함께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반딧불이가 지천으로 날아다녔고 주변 산에는 버섯도 많았다.

1970년을 전후해서 영풍광업은 대리인을 내세워 꽃밭을 만든다며 고수골 일대의 땅을 매입했다.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한데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 하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어서 주민들은 땅을 팔고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원주민이 떠난 후 곳재밑 마을은 폐석과 광미로 메워졌고 주변 자연환경은 파괴되었다.

대현리 광미장에 이어 고수골에 두 번째 광미장 만들어
 
연화광산 휴광 5년 전인 1988년 10월 대현리 광미장과 고수골 광미장. 연화산을 관통하는 중앙갱을 통해 폐석과 광미가 고수골로 운반되었다.
 연화광산 휴광 5년 전인 1988년 10월 대현리 광미장과 고수골 광미장. 연화산을 관통하는 중앙갱을 통해 폐석과 광미가 고수골로 운반되었다.
ⓒ 국토지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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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광업은 1961년부터 연화광산을 개발했다. 채굴은 석포면 대현리의 연화산 중턱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사무실과 선광장 등 대부분의 시설도 대현리에 있었다.

개발 초기 영풍광업은 낙동강 지류인 송정리천에 광미를 흘려보냈다. 개발이 확대되면서 폐석과 광미가 많아지자 1968년경부터 대현리 골짜기에 광미장을 만들었다. 대현리 광미장이 채워지자 1970년대 초 연화산 너머 고수골에 두 번째 광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폐석과 광미는 연화산을 관통하는 중앙갱을 통해 운반되었다. 폐석은 광차로 운반되었고 광미는 중앙갱 안에 설치된 파이프를 통해 운반되었다. 고수골 광미 매립은 1974년경부터 연화광산이 휴광한 1993년경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2019년 11월 태백시 동점동 큰구무골 중앙갱. 연화광산의 폐석과 광미가 이 갱을 통해 운반되어 고수골에 매립되었다. 폐광 후 갱 입구는 레일과 철근으로 막혔다. 앞쪽의 콘크리트 벽은 계곡물을 갱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2019년 11월 태백시 동점동 큰구무골 중앙갱. 연화광산의 폐석과 광미가 이 갱을 통해 운반되어 고수골에 매립되었다. 폐광 후 갱 입구는 레일과 철근으로 막혔다. 앞쪽의 콘크리트 벽은 계곡물을 갱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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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군대 가기 전에 대현리 광미장을 만드는 현장에서 일용 노동자로 일했다. 제대 후 1970년대 중반에는 연화광업소에 채용되어 측량과 시추 일을 하면서 고수골 광미장 조성 과정을 직접 봤다.

A씨에 따르면 폐석으로 계곡 입구에 광미댐을 만든 후 광미를 매립했다. 처음에 광미댐을 완성한 후에 광미를 매립한 것이 아니라, 일정 높이의 광미댐을 만들고 광미를 채워가면서 광미댐도 높여갔기 때문에 공사가 부실했다고 한다.

현장 방문과 위성사진 등으로 판단해 볼 때 고수골 광미댐 높이는 100m가량 되고 길이는 200m가 넘는다. 광미장의 면적은 대현리 광미장의 3배가량 되어 보인다. 자료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매립된 폐석과 광미의 양도 매우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실공사로 폐석 붕괴사고 두 번 일어나
 
2019년 4월 태백시 동점동 큰구무골 일대. 앞쪽 평지는 2008년 집중호우로 무너져 흘러내린 폐석을 다시 실어 올린 곳이다.
 2019년 4월 태백시 동점동 큰구무골 일대. 앞쪽 평지는 2008년 집중호우로 무너져 흘러내린 폐석을 다시 실어 올린 곳이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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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집중호우로 고수골 광미장에서 폐석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계곡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 큰구무골 입구에 쌓아 놓은 폐석이 무너진 것이다. 흘러내린 폐석은 하천을 메웠고 불어난 빗물은 마을을 덮쳤다. 당시 A씨네를 포함해서 광미댐 아랫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침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보상을 요구했지만, 영풍광업은 천재라고 하면서 보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태풍 갈매기가 오면서 큰비가 내렸고 큰구무골 폐석은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1990년 같은 피해는 없었다. 당시 흘러내린 폐석을 다시 실어 올렸는데, 2019년 방문했을 때 폐석이 드러난 땅이 그대로 있었다.
 
큰구무골 사방댐. 2008년 폐석 붕괴사고 후 주민들의 요구로 설치되었다.
 큰구무골 사방댐. 2008년 폐석 붕괴사고 후 주민들의 요구로 설치되었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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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폐석 붕괴사고 후 주민들은 행정관청에 피해방지대책을 요구했다. 다음 해 태백국유림관리소에서 약 1억3000만 원을 들여 재해예방공사를 했다. 계곡 물길을 중앙갱으로 유도하는 콘크리트 벽이 설치되고 계곡에는 사방댐이 설치되었다.

현재 비가 올 경우 계곡물이 중앙갱을 통해 석포면 대현리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2019년 방문했을 때 중앙갱 입구에 자갈과 흙 등이 절반 높이쯤 쌓여 있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차수시설 하지 않아 식수 오염되고 주민건강피해도 발생"

대현리 광미장과 마찬가지로 고수골 광미장에도 차수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다. 곳재밑 주민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던 샘도 막지 않은 채 광미가 그대로 매립되었다. 동점동 일대는 석회암 지대여서 지하에 동공이 많고 샘도 지하수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고수골 광미장이 조성될 당시 광미댐 아래 주민들의 식수원은 물내이골 석굴에서 나오는 샘물이었다. 물내이골은 고수골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인데, 골짜기 안쪽에 있는 김녕김씨 종갓집 밑의 석굴에서 맑은 물이 나왔다. 물내이골은 '물 나오는 골'을 뜻하며 무래이골 또는 수한촌(水寒村)으로도 불린다.

고수골에 광미가 매립되자 석굴의 맑은 물은 광미가 포함된 주변 샘물과 섞였다.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던 냇물이 오염되었다. 광미댐 하부에 설치된 배수관에서 시커먼 폐수가 나오고 심한 악취도 났다. 고수골 오염과 관련해 1995년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고수골 호수는 시커멓게 물든 '죽음의 호수'였다. 태백지역 산악인 김부래(45, 태백시 화전2동)씨는 "당시 고수골 광미침전지는 연화광업소의 광산폐수 배출관으로부터 계속 시커먼 폐수가 쏟아져 나오고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수한촌 주민들은 "물이 맑아 무래이골이라고 불리던 수한촌이 25년 전께부터 샘물에서도 시커먼 물이 나올 정도로 오염돼 버렸다"며 "그러나 수돗물이 들어온 5년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샘물을 먹어왔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1995.8.28.)

  
식수가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미가루가 날려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건조한 봄철에는 안개가 낀 것처럼 검은 가루가 마을을 온통 뒤덮고 쾨쾨한 냄새가 진동했다. 주변 산의 풀과 나무가 고사하고 반딧불이와 버섯도 사라졌다. 광미로 인한 오염은 주민 건강에도 영향을 끼쳤다.

주민 김순남(70)씨는 "온몸이 가렵고 팔다리는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며 "23세인 손녀는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 한쪽 팔과 다리가 기형이 됐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1995.08.23)

수한촌 임복녀(58)씨는 "온 몸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프다"며 "공해에 시달리던 이웃들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으며 피해보상 등 여건만 허락한다면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호소했다. (연합뉴스 1995.8.28.)


고수골 광미장이 들어서기 전 수한촌에는 7가구 30여 명의 주민이 살았다. 연합뉴스 보도 당시 수한촌 주민은 3가구 6명으로 줄었고, 현재 수한촌에는 3가구 4명이 거주하고 있다. A씨는 주변 주민 중에 암으로 죽은 사람이 많은데 그 원인이 광미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역학조사 없이 연화광산 폐광돼
 
2001년 고수골 광미장 위에 모터스포츠 레저단지가 들어섰다. 2019년 11월 고수골 위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2001년 고수골 광미장 위에 모터스포츠 레저단지가 들어섰다. 2019년 11월 고수골 위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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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주민들이 식수오염과 신체통증을 호소하자 태백시가 수질검사를 했다. 광미침전지 최종방류구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강원도 보건환경연구원에 검사를 의뢰했는데, 결과는 1급수에 해당한다는 판정이 나왔다. (연합뉴스 1995.08.28.)

납·아연 광산의 광미장 침출수가 1급수라는 검사 결과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민들의 호소로 볼 때 역학조사와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수골 오염 문제는 묻혔다.

1980년 고수골 생태계 파괴 현상이 확인되고 영풍광업에 공해방지시설 개선명령이 내려졌지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듯이, 1995년 식수오염과 주민건강피해 사실이 알려졌지만 역학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또다시 유야무야되었다.

1998년 연화광산이 폐광되고 3년 뒤 고수골 광미장에는 모터스포츠 레저단지가 들어섰다. 30년간 이어진 주민들의 고통과 호소는 광미더미와 함께 서킷(경주코스) 아래에 묻혔다. 하지만 고수골 광미장으로 인한 오염과 위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연재는 '연화광산 태백 고수골 광미적치장 (2)'입니다.


태그:#영풍 석포제련소, #연화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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