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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작가: 김만근 서양화가
▲ 문혜영 시집<겁 없이 찬란했던 날들 > 표지 작가: 김만근 서양화가
ⓒ 도서출판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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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아주 강한 줄 알았다 두려울 게 없었으니까
그러나 초대치 않은 손님이 찾아와
한순간에 내 전부를 장악해버렸다
가장 무서운 적은, 가늠 안 되는 세력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포로였다
몸이 처절하게 무너지니 난 바퀴벌레보다 못한
무력한 미물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언제나 소중한 건 잃은 후에 깨닫는다

창문으로 숲의 풍경이 네 번 바뀌었다
그 사이 난 아주 힘겹게 숨을 모아
미물에서 사람으로 간신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고 찾은 푸켓 바다, 한없이 열린
푸르름 속에서 태어나고 또 태어나
온전하게 귀환해준 나를 껴안았다
지금도 눈감으면 꿈속인 듯 보인다
맑고 투명한 바다와 반짝이던 햇살이

-문혜영 시집『겁 없이 찬란했던 날들』 中
 
문혜영 시인은 마취에서 깨어난 후, 더듬더듬 수술 부위를 만져보며 안도했다고 한다. '까짓것, 살덩어리 좀 도려내는 게 뭐라고, 이렇게 살아 있는 걸...' 60조 개 온몸의 세포가 감사의 기도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이 희망으로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깊은 감동을 느낀다.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까짓것'이라는 언어가 마침내 꽃처럼 터져 나오기까지, 가슴으로 수없이 삼키고 비워냈을 두려움과 고통이 헤아려져 왈칵 눈물이 고였다.

<겁 없이 찬란했던 날들>은 반어법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 인간의 생애는 무(無)에서 유(有)를, 유(有)에서 다시 무(有)를 깨달아가며 깊이와 너비를 더해 가는지도 모른다. 생의 비의(悲意)에 몸서리치던 여울목 지나 순해진 귀와 맑은 눈으로 바다에 다다른 시인의 노래는 경전처럼 아름다웠다.

40여 년 문학 활동의 정수가 담긴 이번 시집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시간이 머문 자리' '봄을 기다리며' 등 4부에 걸쳐 수록한 80여 편의 작품이 담겨 있으며, 시와 매칭된 사진을 함께 실어 순수한 직관의 의미표상을 배가시켰다.
 
생존은
그 자체만으로 벅찬 빛남이다
온전, 영원하지 않아도

먹빛 같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유성처럼 빛을 발하던 찰나가 있기도 했다
그 시공을 붙들고 싶어 셔터를 누르고
허공에 벽화 새기듯 시를 쓴다

처마 밑 둥지엔 제비 돌아와 지줄대고
근처 무논에선 개구리들 합창이 들려온다
열정을 사르는 모든 생명에게
'겁 없이 찬란했던 날들'은 현재진행형이다
ㅡ시인의 말 중에서
 
상처와 좌절이 영원할 것만 같아 '먹빛 같은 날'에는 생에 대한 뜨거운 찬가 <겁 없이 찬란했던 날들>을 꺼내 읽어야겠다. '생존은 그 자체만으로 벅찬 빛남이다'라는 시인의 말을 묵직한 마음으로 깊이 새겨본다.

겁 없이 찬란했던 날들

문혜영 (지은이), 북인(2020)


태그:#문혜영, #문혜영시집, #겁없이찬란했던날들, #귀환, #김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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