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데믹> 스틸컷

영화 <팬데믹> 스틸컷 ⓒ (주)영화사 빅


  집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에바(프리다 핀토)'와 '윌(레슬리 오덤 주니어)'은 이상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검은 재가 흩날리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 후 외출한 사이 재를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진 친구를 데리고 병원에 간 에바와 윌. 그들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똑같이 피를 흘리며 들어오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난다. 그 즉시 상황을 깨달은 윌과 에바는 집으로 돌아가서 격리를 위한 시설을 갖추고, 팬데믹 속에서 기약 없이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한국에 수입되는 외국 영화들, 특히 저예산 혹은 인지도가 부족한 영화의 경우 제목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슷한 제목이 너무 많거나 영어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표기가 애매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헝거게임: 모킹제이 파트 2>가 <헝거게임: 더 파이널>이 된 것처럼 일부만 달라지기도 하고, <Split>라는 영화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목에서 착안해 <23 아이덴티티>라는 전혀 다른 제목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처럼 제목이 달라진 영화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바뀐 제목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내용과 제목 간의 괴리가 커서 실망감만 안겨주거나. 안타깝게도 <팬데믹>은 후자에 해당한다.

<팬데믹>은 치료법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팬데믹 세상에서 살아가는 에바와 윌의 이야기로, 영화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두 가지 플롯을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나는 질병이 시작된 첫날부터 영화의 첫 장면인 질병 발생 후 400일까지를 다루면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나타났고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에바와 윌은 어떻게 그 재난에 적응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들려준다. 다른 하나는 질병 발발 400일째부터 그 이후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에바와 윌이 폭포 여행을 떠나며 자유를 느끼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팬데믹> 스틸컷

영화 <팬데믹> 스틸컷 ⓒ (주)영화사 빅

 
타카시 도셔 감독은 <팬데믹>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인류의 마지막 여성을 통해 그는 "궁극적으로는 여성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인 압박과 상황에 굴하지 않고 삶과 몸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삶과 여성의 주체성뿐 아니라 생물학적인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팬데믹>의 본래 제목은 지구의 마지막 여성을 의미하는 'Only'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는 여러 대목에서 자신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재난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 중심에는 질병의 증상이 있다. 작중 나타나는 질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남성은 이 질병과 관계가 없고, 병에 걸린 여성은 출혈과 이어서 극심한 고통과 경련을 경험한다.

또 질병을 대하는 사회와 남성들의 태도는 이 작품이 여성 차별적인 사회를 그려낸 영화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작중 미국 정부는 질병이라는 자연현상을 이유로 여성들의 권리와 편의를 제한한다. 보호라는 명목 하에 군대와 같은 공권력이 동원되어 여성들을 무조건 알 수 없는 치료 시설로 보내고, 모든 여성들에게 현상금을 걸어 수배하는 것이다. 물론 작중 질병의 치사율이 100%라는 점에서 이를 마냥 무리한 전개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 그 누구도 여성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도, 작중 여성들의 권리 제한은 남성들의 생존과 위계를 유지하기 위한 과잉 대응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격리 생활에 지쳐버린 에바가 윌에게 언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했냐고 지적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인 이유다.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선택
  
 <팬데믹> 스틸컷

<팬데믹> 스틸컷 ⓒ (주)영화사 빅

  더 나아가 <팬데믹>이 애초에 일반적인 재난 영화가 아닌, 여성 영화라는 점을 알고 나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던 장면들은 서로 자연스레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영화는 유독 에바의 생활과 감정선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여성들을 비추기 위함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받는 세상에서 에바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뮬란처럼 가슴을 붕대로 누르고 긴 머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모자를 눌러쓴다. 애써 살아남은 여성들만이 모이는 익명 비밀 채팅방에서는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응원하고 격려하고 연대하면서 활력을 찾는다.

또한 에바가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에피소드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에바와 윌이 위기를 모면하는 순간에 모닥불 빛을 이용해 에바 개인이 아니라 여성의 실루엣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는 남성 사냥꾼에게 쫓기던 에바가 자신의 정체성과 힘을 깨닫고 본인의 삶과 사랑하는 이를 구해내는 것이 모든 여성들의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작중 긴박한 상황과 안 어울리는 슬로 모션이 활용되어 뜬금없다고 느껴지던 장면은 여성 영화라는 맥락 안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팬데믹>이라는 제목은 곧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를 모두 파괴해버린 선택일 수밖에 없다.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를 고발하는 영화를 재난 영화로 무리하게 포장한 것에서 코로나 19 시국을 이용해 이익을 내려는 의도가 명확히 보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극장가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는 이익을 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난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실망을 안기고,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가 최소한 국내에서는 왜곡되었으며, 감독과 배우들의 노력과 열연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원제와 동떨어진 제목을 선택한 것은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팬데믹 재난영화 여성영화 코로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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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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