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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난민법의 시행으로 공항의 문이 열렸지만 공항에 온 난민들은 여전히 인권 침해를 받고 있다. 기획 '난민, 공항에 갇히다'를 통해서 '공항 난민'의 현실과 대안을 짚는다.[편집자말]
[이전 기사] 결국 치아 6개 발치... 왜 그는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나요 http://omn.kr/1o54d

오도 가도 못하고 공항에 있다는 앙골라 난민 가족의 연락을 받고 공항을 찾았다. 여권도 없이 공항에 출입하는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항에서 만난 루렌도 가족의 모습은 이미 꽤 지쳐 보였다. 간단한 인사말을 프랑스어로 준비해 갔지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긴 어려웠다. 지쳐 있는 상황에서도 부부는 애써 웃으며 변호사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명의 아이들도 엄마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선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첫 기억이다.

루렌도 가족이 출입국·외국인청(아래 '출입국')에서 받은 결정은 난민심사를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난민이 아님'이 너무나 명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상담 자료를 살펴본 변호사들의 판단은 달랐다. 출입국의 결정을 뒤집기 위해서는 난민심사를 받을 수 있게 해달란 취지의 소송을 해야 했다. 하지만 소송을 하기로 결정한 때는 이미 가족들이 공항에 도착한 지 보름이 지났고 이미 가지고 온 돈은 다 써버린 상태였다. 소송이 시작되면 적어도 몇 달은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러나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송이 아니면, 곧장 비행기에 실릴 운명이었다.

1심이 진행되는 4개월 간 변호사 접견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접견 시간은 제한돼 있었고, 통역까지 고려하면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가족들의 건강은 시간이 갈수록 극도로 나빠졌고, 네 명의 아동은 지루한 대화에 항상 참여해야 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열 명이 모여 너덧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버거운 일이었다.

소송의 장애물은 단지 외국어뿐이 아니었다
 
공항에서 변호사 접견 중인 루렌도 가족
 공항에서 변호사 접견 중인 루렌도 가족
ⓒ 최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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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을 위해서는 접견이 필수적이지만, 여기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사실관계 파악과 증거 수집을 위해서는 루렌도씨와 온라인 연락을 해야 했는데, 한계가 뚜렷했다. 접견을 제외한 유일한 소통수단은 '왓츠앱'이란 SNS 어플뿐이었다. 매번 통역인의 조력을 받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질문사항을 영어로 작성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은 구글 번역기를 활용했다. 간단한 내용은 번역이 가능했지만 복잡하고 민감한 질문은 번역기가 무용지물이었다. 어렵게 질문을 해도 질문의 취지나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아 엉뚱한 답변을 듣기 일쑤였다. 이럴 때는 질문을 한꺼번에 모아 통역인에게 번역을 요청하고 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관계 파악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증거 수집이었다. 본국에서 도피해 온 난민신청자의 특성상, 박해에 관한 증거를 갖춘 채 입국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루렌도 가족이 가지고 온 가방은 네 개뿐이었다. 옷가지와 생필품 외에는 가져온 물건이 거의 없단 뜻이었다. 그나마 몸에 남아 있던 고문의 흔적, 폭행의 후유증이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이미 입국한 지 수일이 지나 흉터가 흐려진 상태였고, 변호사와 접견을 한 후에야 겨우 사진과 진단서를 남길 수 있었다. 앙골라의 지인들과 연락하기도 쉽지 않았다. 앙골라에 연락이 닿은 것은 1심에서 패소한 뒤였다.

반면 출입국은 한국대사관을 통해 광범위한 현지 조사를 실시했다. 가족들이 가지고 온 서류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고, 아이들의 출결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고, 가족들이 살던 집과 그 주변을 탐문 조사했다. 

다만 실제로 대사관이 어떤 질문을 하고 상대방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대사관의 짧은 회신뿐이었다. 그 취지를 정리하면 루렌도 가족이 제출한 서류는 '위조'이고, 이들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대사관 탐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이상 반박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우리가 앙골라에 방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한국대사관이 본국에서 광범위한 탐문조사를 한 사실 자체였다. 가족들의 난민 신청 사실이 난민신청자를 보호해야 할 우리 정부에 의해 알려졌던 것이다.

피고가 아닌 '가짜 난민'이란 낙인과의 싸움
 
승소 후 기자회견을 하는 변호사들과 난민인권단체
 승소 후 기자회견을 하는 변호사들과 난민인권단체
ⓒ 최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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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루렌도 가족은 꿋꿋이 버텨내고 있었다. 첫 변론기일은 소장을 접수한 지 두 달 만에 잡혔다. 아직 대한민국에 '입국'하지도 않은 가족들을 기일에 어떻게 출석시킬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다행히 재판부의 지휘에 따라 두 번째 기일부터 가족들이 출석할 수 있게 됐다. 1심에서 변론기일은 세 번 열렸는데, 첫 기일엔 가족들이 출석하지 못했고, 두 번째 기일엔 다소 황당하게도 통역인이 출석하지 않아 가족들이 진술하지 못했다. 절차적인 문제로 기일이 세 차례나 열린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가족들은 공항에 사실상 갇혀 있었고, 인권침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재판부나 출입국에게는 단지 미숙한 절차적 실수였겠지만, 그 결과는 가족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한편, 루렌도 가족의 인천공항 체류 사실은 다수의 언론을 통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가족들은 가짜 난민이란 낙인이 찍힌 채 소송에 임해야 했다. 소송 과정에서 난민을 반대하는 집단이 탄원서를 제출했고, 기일마다 법원 앞에서 반대 집회를 열었다. 

첫 기일 때에는 변론이 끝나자마자 법정 바로 앞에서 가족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했다. 건물 안팎을 불문하고 큰소리로 욕을 했고, 흥분하여 음료수병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두 번째 기일부터는 재판부에서 방청객에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 것을 당부했고, 법원 경위가 차례로 사람들을 법원 밖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물론 건물 밖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이어졌다.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루렌도 가족은 인천공항에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1심에서 패소함에 따라, 항소하더라도 승소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인천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사그라들었던 이 시기가, 가족들에게도 변호사들에게도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체류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가족들은 눈에 띄게 지쳐 갔다.

항소심을 준비하면서는 증거를 보강했다. 앙골라 현지의 지인들과 연락을 시도했다. 출입국이 1심에서 제출한 증거 중, 루렌도 가족이 "경제적 목적"의 이민을 준비했다는 조사 결과가 담긴 대사관의 회신이 있었는데, 이 진술을 한 사람과 직접 통화를 해 그런 진술을 한 적이 없다는 새로운 진술을 확보했다. 또한, 기독교 커뮤니티를 통해 가족들이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과 연락이 닿았고, 진술서를 받았다. 항소심에서 새로 입수한 증거를 통해 진술의 신빙성을 보강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루렌도 가족은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이들의 난민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것이 아니므로, 구체적인 난민신청사유는 입국 후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최종적인 판단이었다. 루렌도 가족은 판결 선고 후 2주가 지나 정식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난민 신청을 한 지 자그마치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한국 땅을 밟은 가족,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입국 후 변호사, 통역사와 회의를 하고 있는 루렌도 부부
 입국 후 변호사, 통역사와 회의를 하고 있는 루렌도 부부
ⓒ 최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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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선고를 받고 공항을 찾았다. 공항을 가면서 처음으로 기쁜 마음이었고, 손에는 노트북 대신 꽃다발을 들었다. 소식을 들은 루렌도 가족도 밝은 표정이었다. 아이들도 공항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지 평소보다 활기찬 모습으로 변호사들을 맞았다.

이 사건은 원고가 제출한 증거가 100여 개, 피고가 제출한 증거가 5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인 사건이다. 본래 난민인정심사절차에 대한 회부는 형식적인 사항을 검토한 뒤, 7일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제도이지만, 루렌도 가족에 대해서는 공항에서부터 실질적인 난민 심사가 이루어졌다. 

이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어야 하는 사건이라면, 입국 후 엄격한 심사를 하였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출입국이 입국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루렌도 부부는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했고, 이에 대한 결과는 심각한 인권침해였다.

루렌도 가족은 공항 도착부터 입국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들의 소식이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되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이들이 입국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나머지, 승소하여 입국한 후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여전히 공항에는 난민 신청 후 출입국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말이다.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최초록 기자는 공익사단법인 두루 변호사입니다.


태그:#공항난민, #난민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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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인권센터는 한국사회 내에서 배제되고 있는 난민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로, 2009년도부터 난민권리상담, 사례대응, 사회적 인식과 제도개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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