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9 19:00최종 업데이트 20.07.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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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한국자생식물원 내에 건립된 조형물 '영원한 속죄'의 모습. 사비로 조형물을 제작한 김창렬 원장은 조형물 속 남성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특정한 것은 아니라고 28일 설명했다. 2020.7.28 ⓒ 연합뉴스

 
강원도 평창군의 한국자생식물원에 조성된 위안부 조형물이 국제적 논란이 되고 있다. 앉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남자 조형물을 두고 아베 신조 총리가 위안부에 절하는 형상 같다 하여 '아베 사죄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28일 정례기자회견에서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일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논평했다.

그 조형물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일본 총리는 엎드려 절하는 마음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피해자들도 바라는 바이고, 피해자의 동족들도 바라는 바다. 또 이를 바라는 나라가 또 있었다. 바로, 미국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13년 전인 2007년 이맘때에 명확히 표출됐다. 그해 7월 30일 일본을 규탄하는 위안부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서 채택됐다.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결의안은 아니었지만,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데다가 일본의 최대 동맹국인 미국이 내놓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결의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결의안은 세계 위안부 운동의 이정표가 될 만했다.

위안부 결의 1년 전인 2006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233석을 얻어 202석의 공화당을 누르고 다수당이 됐다. 조지 부시(아들 부시) 정권 하에서 민주당이 12년 만에 과반수를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민주당이 하원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은 양당의 전폭적 지지 하에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초당적 합의로 결의안을 도출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 결의안은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극우세력을 자극하고도 남을 만한 '핵폭탄'을 담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2006년 9월에 출범한 아베 내각은 결의안 2개월 뒤인 2007년 9월 26일까지 유지됐다. 그 뒤 2012년에 재출범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베 내각의 분노를 폭발시킬만했던 위안부 결의안의 서두는 이렇다.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제국군에 대한 성적 서비스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공식 위임했으며,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 매춘 제도인 위안부는 집단 강간과 강제 유산, 수치, 그리고 신체 절단과 사망 및 궁극적인 자살을 초래한 성적 폭행 등 잔학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 없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가운데 하나다.
 
한국인이 하고 싶은 말 대신해준 미국 의회

일본 국가권력이 위안부 강제동원을 주도했으며 위안부들이 자발적 매춘을 한 게 아니라 '강제 성매매'와 '성적 폭행'을 당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위안부 사건을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로 규정했다. 아베 신조와 일본 극우는 물론이고 이영훈과 <반일종족주의>로 대표되는 한국 극우조차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일본군국주의의 치부를 미국 의회가 과감히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결의안은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강력한 어조로 촉구했다.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알려진 성의 노예로 강제로 만든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로 공식 인정하면서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일본 총리에게 공식 성명을 통해 사과할 것도 요구했다. "일본 총리가 공식 성명을 통해 사과를 한다면 종전에 발표한 성명의 진실성과 수준에 대해 되풀이되는 의혹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일본의 진실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므로, 진정성 논란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제대로 사과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미국 의원들이 대신해준 셈이다.

결의안은 일본 정부가 가해자 편이 아닌 피해자 편에 설 것도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성의 노예로 삼고 인신매매를 한 사실이 결코 없다는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도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이다'처럼 시원스러운 내용들을 담은 결의안이었던 것이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국이 이런 결의안을 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국제법적 구속력은 없을지라도 미 의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왜 
 

미키 데자키 감독이 제작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시네마달


미 하원이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만든 원동력은 세계 위안부 운동이 갖는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운동은 이념과 정파와 민족과 계급을 초월해 세계인의 공분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에너지를 담고 있다. 여성이자 식민지 주민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반인간적 착취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들끓게 하고도 남을 만하다.

독도 영유권이나 역사 교과서 문제에 비해 위안부 문제가 단시간에 신속히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전 인류의 가슴을 저미게 할 만한 에너지가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슴 절절함을 경험한 미국 국민의 여론이 하원 결의안을 이끌어낸 원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원동력은 미국의 국익 추구다. 자국의 아시아 대리인인 일본 정부를 자극하면서까지 결의안을 내놓은 것은 이 사안이 미국의 국익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2007년은 미-일동맹이 점점 강화되던 때였다. 그 후의 버락 오바마 때도 그렇고 도널드 트럼프 때도 그렇고 미-일 동맹은 계속 강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조지 부시 때인 2007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력이 점차 쇠약해지는 미국이 일본에 대한 전략적 위임의 범위를 점점 확대하는 데 따른 결과였다.

이 시기에 미국이 일본을 얼마나 응원했는지는 2007년 9월 26일에도 드러났다. 이날 부시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일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며 일본이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와 똑같이 안보리 거부권을 갖게 되는 것을 공식 지지했다.

그전에도 미국은 일본의 진출을 지지했다. 하지만 세계무대에서 공식 지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위안부 결의안이 나온 2007년에도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그만큼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기에 미국 정치권이 대일 규탄 결의안을 내놓은 것은 결코 일본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미국의 동기는 정반대였다.

위안부 문제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고립되고 파렴치한 존재로 낙인찍히면, 일본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까지 덩달아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으로서는 미-일동맹이 한층 더 견고해지는 시점에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했다.

일본이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날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이 전향적인 자세를 갖게 되기를 미국은 희망했다. 일본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고자 결의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2007년에 <한일민족문제연구> 제12권에 게재된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의 논문 '동아시아 역사논쟁과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논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금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미 정부의 대응은 바람직한 미일관계 발전을 위한 고육책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미국은 일본 정부에 대하여 역사인식에 있어서의 책임 있는 대응과 이를 통한 지역적인 역할 확대를 유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가 역사인식의 차원을 넘어 여성인권 내지는 전쟁범죄 차원에서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의 관심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미 정부로서도 더 이상 묵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옛 일본대사관 터 앞에 세워진 소녀상. 2020.6.24 ⓒ 이희훈

 
위안부 결의문은 일본을 규탄하는 결의문이다. 그런데 이 결의문에는 일본을 칭송하는 대목도 들어 있다. 
 
미-일동맹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이익에 초석이며 지역 안정과 번영의 근본이다. 냉전 이후 전략적 환경의 변화에도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정치 및 경제적 자유와 인권과 민주적 제도에 대한 지지, 양국 국민과 국제사회의 번영 확보 등을 포함한 공동의 핵심 이익과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본을 규탄하는 결의문 중간에 다소 엉뚱하게도 이런 내용을 끼워 넣은 것은 미국 정치권이 일본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신네 일본이 싫어서 이 결의안을 만든 게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주는 동시에, 이 결의안을 내는 목적이 미-일동맹의 강화에 있다는 메시지를 일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이 일본의 도덕성 문제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반 인권 행태를 비판했던 것과 겹친다. 박 정권 후반기에 지미 카터 행정부가 박 정권을 비판한 것은 열악한 한국 인권에 분노하는 미국 내 여론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박 정권의 폭정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농후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0년 5·18 광주항쟁 때 미국이 한국 국민을 버리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미국의 일차적 관심은 결코 한국인의 복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박 정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후반기의 박 정권이 미국의 이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친미정권이 현지 민중들로부터 소외되면 미국의 영향력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친미정권이 민중을 억누르며 미국의 이익을 증진시켜주되 민중을 폭발시키는 단계까지는 가지 말아야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유지된다.

박 정권은 그 점에서 실패했다. 한국 민중을 '적당히' 억누르지 않고 과도하게 탄압해 민란을 유발하는 단계까지 갔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경우 주한미군이 한국 민중에 의해 쫓겨날 가능성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자면 한국 민주화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연출하면서 박 정권을 압박할 수밖에 없다.

미국 민중은 그렇지 않지만 미국 정부가 위안부 결의로 일본을 압박하는 기본 동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국의 국익이 손실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일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앞장서서 대리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순조롭게 전개되자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고립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사전에 차단해야 했다.

그런 배경에서 2007년 7월 30일의 위안부 결의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엎드려 절하는 심정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반성하도록 함으로써 자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그런 결의가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잘못을 범한 친구가 군중에게 뭇매를 맞지 않도록 자기가 먼저 나서 뺨을 때리는 격이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이 똑똑히 증명하듯이 일본은 위안부 결의를 따를 의지가 없다. 일본은 엎드려 사죄할 마음이 없다. 동시에 위안부 운동에 참여하는 세계 민중과 국가들 역시 이 운동을 멈추거나 늦출 생각이 전혀 없다. 두 개의 힘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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